전병현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 북간도 특파원으로 활동하며 만주 독립군의 통합에 노력한 독립운동가.
이칭
이명
왕삼덕(王三德)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78년(고종 15)
사망 연도
미상
출생지
평안남도 은산
주요 경력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대표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2015)
내용 요약

전병현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 북간도 특파원으로 활동하며 만주 독립군의 통합에 노력한 독립운동가이다. 1920년대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 북간도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중국 옌볜 지역 독립운동 세력과 임시정부와의 연계를 강화하여 중국 둥베이 지역 무장 독립운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정의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 북간도 특파원으로 활동하며 만주 독립군의 통합에 노력한 독립운동가.
인적 사항

전병현(全秉鉉)은 1878년(고종 15) 평안남도 은산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왕삼덕(王三德)이다. 국민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주요 활동

전병현은 개천 군수를 지낸 아버지 전효순(全孝舜)의 영향으로 유학을 공부하고 평안도관찰부 주사(主事)로 근무하였다. 그러나 관직 생활을 그만두고 1905년 말 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 을사조약)을 반대하는 상소 운동에 참여하였다. 김구에게 가르침을 받아 그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1910년 전후 국망의 위기에 즈음하여 계몽운동과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구국계몽운동의 방편으로 국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학교를 설립하고 교사로 활동하는 등 교육 운동에 매진하였다. 1907년경 서북학회(西北學會)에 가입하여 농촌 개량과 신교육 보급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1910년 ' 안악사건'과 ' 105인사건'으로 서북 지방에서 활동하던 신민회 회원들이 다수 체포되면서 왕삼덕으로 이름을 바꾸고 남만주의 주1로 망명하였다. 이후 서간도 지역의 민족운동 단체인 경학사 · 공리회 · 부민단(1917년 부단장) 등에서 활동하며 독립전쟁과 독립군 기지 건설을 위해 노력하였다.

1919년 중국 주2〔延邊〕의 길림군정사(吉林軍政司)에서 활동하다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 뒤 중국 주3〔東北〕 지역에서 활동하는 여러 무장 독립운동 단체의 실상을 파악하고 통합을 추진할 적임자로 지목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 특파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안정근(安定根)과 함께 서북간도 여러 독립운동 단체를 방문하고 임시정부 산하로 규합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또한, 독립운동 과정에서 러시아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보고, 안정근 · 홍범도(洪範圖)와 함께 1920년 12월 '중 · 러연합선전부'에 가담하였다. 전병현은 이 조직의 간도지부 선전위원장을 맡아 만주 독립군의 러시아 주4 지역 이동에 기여하였다.

1921년 이후에는 임시정부의 여러 문제점을 지적하는 한편,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임시정부의 개조를 주장하였다. 1923년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고려공산당 대표로 참여하여 임시정부에 비판적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는 별다른 성과 없이 결렬되고 말았다. 같은 해 7월 임시정부 임시헌법기초위원으로 선임되어 내각 각료 개선과 임시 헌법의 개정을 추진하였다.

1924년 3월 중국 둥베이의 주5〔吉林〕에서 양기탁(梁起鐸) · 신숙(申肅) 등 30여 명이 결성한 전만통일주비회(全滿統一籌備會)에 참가하여 선전문을 각 지역으로 배포하는 선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듬해 2월 지린에서 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들의 통합을 위한 전만통일회의(全滿統一議會)가 개최되었을 때 평안도 지역 독립운동가들 중심으로 조직된 동우회(同友會)에 가입하였다.

1925년 3월에는 지린의 영신소학교(永信小學校) 학무위원으로 위촉되어 학생 모집에 노력하였다. 주6 독립운동 통합 조직으로 1924년 11월 정의부(正義府)가 성립하자 참가하여 한인 교민들의 자치와 각종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다. 1926년 1월 정의부 중앙행정위원회 임시회의에서 국무 수행을 위한 5부(部)의 임원으로 선출되었다.

상훈과 추모

201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朝鮮民族運動年鑑」(1920년 5월 17일 조)
王三德, 「祝辭」, 「八月二十九日 기념 취지서」(『新興交友報』 2호, 신흥교우단, 1913, 독립기념관 소장)
全秉鉉, 「勸農歌로 勉學業」(『西友』 2, 西北學會, 1907)
전병현, 「賀腐儒就新」(『西友』 10, 西北學會, 1907)

단행본

『독립유공자 공훈록』 22권(국가보훈처, 2016)
『도산안창호전집』(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200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0(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8)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8(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9(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5)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4(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6(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7(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3)
金正明 編, 『朝鮮獨立運動』 Ⅱ(原書房, 1967)

논문

박경, 「王三德의 생애와 민족운동」(『한국민족운동사연구』 87,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6)
장세윤, 「新興校友團의 기관지 新興校友報」(『한국독립운동사연구』 36, 독립기념관, 2010)
송우혜, 「독립운동가 안정근의 생애」(『박영석교수 화갑기념 한민족독립운동사논총』, 탐구당, 1992)

신문

『신한민보』(1923. 10. 18.)
『동아일보』(1923. 7. 15.)
『동아일보』(1923. 6. 25.)
『동아일보』(1921. 9. 25.)
주석
주1

백두산 부근에서 시작하여 단둥(丹東)에 까지 이르는 압록강 유역의 만주 지방.    우리말샘

주2

중국 길림성(吉林省) 동부에 있는 자치주. 조선 말기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주하여 개척한 곳으로, 주민의 3분의 1 이상이 조선족이다. 1952년 자치구가 설립되었다가 1955년에 자치주로 바뀌었다. 6개의 시(市), 2개의 현(縣)이 있다. 주도(州都)는 연길(延吉), 면적은 4만 2700㎢.    우리말샘

주3

중국 동북부, 헤이룽장성(黑龍江省)ㆍ지린성(吉林省)ㆍ랴오닝성(遼寧省)의 세 성으로 이루어지는 지역. 북부는 농업, 남부는 중공업 지대를 이루고 있으며 중국에서 철도망이 가장 조밀하다. 1932년부터 1947년까지 일본의 지배를 받았으며, 일본이 건설한 공업 시설을 바탕으로 그 후 중국 최대의 중화학 공업 기지가 되었다.    우리말샘

주4

러시아의 동남쪽 끝에 있는 지방. 우리나라 동해에 접하여 있으며 두만강을 사이로 우리나라와 국경을 이루고 있다. 아연ㆍ석탄 따위의 지하자원이 많고 나무를 가공하는 산업이 발달하였다. 중심 도시는 블라디보스토크이다. 면적은 16만 5900㎢.    우리말샘

주5

중국 길림성(吉林省)에 있는 항구 도시. 송화강(松花江) 북부에 있는 교통 요충지이며 목재, 약재, 담배 따위의 집산지이다.    우리말샘

주6

중국 만주 지방의 남부. 궁주링(公主嶺) 이남의 땅을 이른다.    우리말샘

집필자
장세윤(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역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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