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현(全秉鉉)은 1878년(고종 15) 평안남도 은산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왕삼덕(王三德)이다. 국민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전병현은 개천 군수를 지낸 아버지 전효순(全孝舜)의 영향으로 유학을 공부하고 평안도관찰부 주사(主事)로 근무하였다. 그러나 관직 생활을 그만두고 1905년 말 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 을사조약)을 반대하는 상소 운동에 참여하였다. 김구에게 가르침을 받아 그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1910년 전후 국망의 위기에 즈음하여 계몽운동과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구국계몽운동의 방편으로 국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학교를 설립하고 교사로 활동하는 등 교육 운동에 매진하였다. 1907년경 서북학회(西北學會)에 가입하여 농촌 개량과 신교육 보급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1910년 ' 안악사건'과 ' 105인사건'으로 서북 지방에서 활동하던 신민회 회원들이 다수 체포되면서 왕삼덕으로 이름을 바꾸고 남만주의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이후 서간도 지역의 민족운동 단체인 경학사 · 공리회 · 부민단(1917년 부단장) 등에서 활동하며 독립전쟁과 독립군 기지 건설을 위해 노력하였다.
1919년 중국 옌볜〔延邊〕의 길림군정사(吉林軍政司)에서 활동하다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 뒤 중국 둥베이〔東北〕 지역에서 활동하는 여러 무장 독립운동 단체의 실상을 파악하고 통합을 추진할 적임자로 지목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 특파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안정근(安定根)과 함께 서북간도 여러 독립운동 단체를 방문하고 임시정부 산하로 규합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또한, 독립운동 과정에서 러시아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보고, 안정근 · 홍범도(洪範圖)와 함께 1920년 12월 '중 · 러연합선전부'에 가담하였다. 전병현은 이 조직의 간도지부 선전위원장을 맡아 만주 독립군의 러시아 연해주 지역 이동에 기여하였다.
1921년 이후에는 임시정부의 여러 문제점을 지적하는 한편,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임시정부의 개조를 주장하였다. 1923년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고려공산당 대표로 참여하여 임시정부에 비판적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는 별다른 성과 없이 결렬되고 말았다. 같은 해 7월 임시정부 임시헌법기초위원으로 선임되어 내각 각료 개선과 임시 헌법의 개정을 추진하였다.
1924년 3월 중국 둥베이의 지린〔吉林〕에서 양기탁(梁起鐸) · 신숙(申肅) 등 30여 명이 결성한 전만통일주비회(全滿統一籌備會)에 참가하여 선전문을 각 지역으로 배포하는 선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듬해 2월 지린에서 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들의 통합을 위한 전만통일회의(全滿統一議會)가 개최되었을 때 평안도 지역 독립운동가들 중심으로 조직된 동우회(同友會)에 가입하였다.
1925년 3월에는 지린의 영신소학교(永信小學校) 학무위원으로 위촉되어 학생 모집에 노력하였다. 남만주 독립운동 통합 조직으로 1924년 11월 정의부(正義府)가 성립하자 참가하여 한인 교민들의 자치와 각종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다. 1926년 1월 정의부 중앙행정위원회 임시회의에서 국무 수행을 위한 5부(部)의 임원으로 선출되었다.
201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