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金有信)은 1920년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태어났으며, 중국에서 소학교를 졸업한 후, 정저우〔鄭州〕 등지를 오가며 생활한 것으로 알려진다.
1930년대 초반 중국 난징〔南京〕 등지에서 활동하였으며, 중국 중앙군관학교(中央軍官學校) 뤄양분교〔洛陽分校〕에서 군사교육을 받았다. 당시 뤄양분교에는 한 · 중 간의 군사적 연대를 통해 한인특별반(정식명칭 제2총대 제4대대 육군군관훈련반 제17대)이 설치되어 있었다. 1935년 4월 뤄양분교를 졸업한 후 정저우와 난징 등지를 오가며 활동하였다.
당시 한인특별반에는 김구(金九)를 지지하는 계열과 김원봉(金元鳳)을 지지하는 계열, 그 외 지청천(池靑天, 이청천) 지지 그룹이나 기타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일제 측에서는 김유신을 김원봉 계열로 분류하였다. 그러나 한인 청년들이 특정한 당적을 갖고 활동한 데 반해, 김유신은 특정 계열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파악된다.
1938년 무정부주의 계열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 조직에 참여하여 본격적으로 무장투쟁의 길로 들어섰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화베이〔華北〕 지역의 요충지인 시안〔西安〕을 거점으로 군사 활동을 전개하며 대오를 확장해 갔다. 같은 시기 시안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설치한 군사특파단이 활동하며 한국광복군 창설을 준비하고 있었다.
1940년 9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가 성립되며 급물살을 탄 광복군의 무장 조직 통합 과정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광복군 제5지대로 편입되었다. 이후 광복군이 조선의용대를 포함한 좌우 연합부대로 거듭나면서 광복군 제2지대에 배속되었다.
김유신은 1942년 4월 광복군 제2지대 제1구대에 배속되어 뤄양 지역을 중심으로 항일 전쟁을 수행하였다. 중국어에 능통하고 군사 전문가여서 부구대장을 맡는 한편, 특수 임무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뤄양 부근 도구(渡口)우체국 직원으로 가장하여 광복군의 초모(招募) 공작과 정보 수집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한국광복군에서 활동하던 중 조선의용대에 후발로 합류하기도 하였다. 1942년 이후 조선의용대는 화베이 최전선으로 올라가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며 일본군과의 직접적 전투에 참여하였는데, 김유신은 이 무렵 합류하였다. 조선의용군과 중국 팔로군(八路軍)이 일본군에 포위되어 혈전을 치르던 산시성〔山西省〕 태항산전투에서 1943년 2월 전사하였다.
1963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서울 우이동에 조성된 한국광복군 동지묘역에 안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