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에 가입하여 의열 운동에 참여하다가, 1930년대 중반 중국 중앙군관학교(中央軍官學校) 뤄양분교〔洛陽分校〕 한인특별반(정식명칭 제2총대 제4대대 육군군관훈련반 제17대)에 입교하였다. 군관학교 졸업 후 중국군 장교로 임관하여 쑤저우〔蘇州〕 전선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1939년부터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는 한편, 김인(金仁) · 이재현(李在賢) · 김원영(金元英) 등과 함께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조직에 참여하였다. 전지공작대는 무정부주의 계열 청년들이 주도한 무장단체였으나, 김유철은 한국국민당을 지지하면서 김구(金九)를 경호하는 역할도 담당하였다.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가 창설되자 참모로 활동하였다. 충칭〔重慶〕에 있던 김유철은 영국대사관 정보처와 공조하였다. 1943년 3월 안원생(安原生) 등과 미국 공군 정보장교 윔스(Clarence N. Weems)를 만나 미국의 특수 공작 기관인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전략첩보국)와 제휴하여 한 · 미 간의 정보 활동을 담당하였다. 이 시기 미군, 영국군과 공조 활동을 하던 김유철은 1944년 6월부터 11월 말까지 임시정부 외무부 총무과장으로 활동하였다.
1944년 태평양전쟁이 치열해지며 한 · 미 간의 군사 공조가 본격화하던 시기 최전방에서 군사 활동을 전개하였다. 쿤밍〔昆明〕에 있는 미 제5군사령부에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일본군에 대한 정보 수집과 심리작전을 수행하였다. 일본군에 승전을 거두는 그림을 그려 전단을 만들고, 한국어 · 일본어 · 베트남어 · 미얀마어 등 4개 국어로 작성된 선전물을 만들어 적 진영에 살포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는 적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일제의 징용에 끌려간 한국인 병사들에게 투항을 권유하기 위한 것이었다. 김유철은 8 · 15광복 때까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가 1946년 귀국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