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인 17세기 초에 만들어진 3구의 대형 소조불좌상으로서 본존은 석가여래, 향좌측은 아미타불, 향우측은 약사불로 구성된 삼세불이다. 수조각승 원오(元悟)가 1605년 3월부터 7월까지 신현(信玄), 청허(淸虛), 神釰(신일), 희춘(希春) 등 네 명의 조각승과 함께 제작하였다. 이 시기에는 임진왜란 중에 소실된 사찰들에 대한 중창불사가 전국적으로 일어났는데, 쌍계사도 2층의 불전을 세우고 이들 삼세불을 조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대웅전은 1층으로 중수된 것이다.
삼세불은 대형의 수미단 위에 봉안되어 있는데 앙련과 복련으로 구성된 타원형의 대좌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있다. 중앙의 석가여래불이 가장 크고 좌우 아미타 · 약사불이 조금 작게 조성되어 있어 다소간의 위계를 두었다. 얼굴은 넓적하면서도 부분적으로 양감을 넣었고, 눈은 마치 졸린 눈처럼 지그시 뜨고 있으며, 도톰한 이등변삼각형의 콧등,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간 여유로운 미소 등은 원오가 제작한 다른 불상, 예를 들어 익산 관음사와 혜봉원에 분산 봉안된 문수 · 보현보살상 등과 유사하다. 본존인 석가불은 오른손을 무릎 밑으로 내려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왼손은 앞으로 내밀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었다. 커다란 신체에 비해 작고 섬세한 수인이 대조를 이룬다. 한편 아미타불은 오른손은 가슴 높이로 들고, 왼손은 배 높이로 들어 하품중생인을 결하였고, 약사불은 아미타불과 대칭으로 수인을 결하였다. 석가불의 착의법은 오른쪽 어깨를 덮은 변형 편단우견식인데 어깨 위의 옷자락 끝단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와 가슴의 일부를 가리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가슴 아래로는 수평의 내의가 보이는데 부채처럼 접힌 옷주름을 큼직하게 표현했다. 이에 반해 아미타불과 약사불의 착의법은 통견이면서 오른쪽 어깨를 덮는 대의를 걸치고 있어 석가불과는 차별된다. 옷주름은 깊지 않으면서도 유려하고 간략한 편이다. 하체를 덮은 대의자락은 종아리를 감싸는 부분은 인체에 밀착되어 있고, 바닥에 접하는 부분에만 얕은 단을 규칙적으로 부여하여 옷주름을 표현하였다. 이 옷주름들은 평행에 가까우나 발목 부분은 조금 높은 사선을 이룬다. 가사를 발목 교차점에서 바닥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게 해서 부채꼴 형상으로 펼쳤는데, 이러한 표현은 이 시기에 조성된 불상의 일반적인 형식이다.
복장유물로는 한지를 재단해서 두루마리로 만든 불상의 조성 발원문과 오곡 · 오약 · 사리 2과(顆)를 넣은 후령통, 『묘법연화경』 3책, 「관음보살예문」, 「아비달마대비바사론」등이 발견되었다. 특히 『묘법연화경』 권5·6·7은 완주의 안심사에서 제작된 것으로 1402년에서 1410년 사이에 판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은 2001년 보물로 지정된 『묘법연화경』의 원판본일 가능성이 있다. 「관음보살예문」은 1462년(세조 8)년에 중각한 것이다. 삼세불 위에는 중층 형태의 닷집이 각각 설치되어 있는데, 아미타불 위에는 ‘칠보궁’, 석가여래 위에는 ‘적멸궁’, 약사불 위에는 ‘원만궁’의 편액이 달려있다.
이 삼세불상은 2013년 4월 22일에 ‘논산 쌍계사 목조 석가여래삼불좌상’이라는 명칭으로 충청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된 바 있다. 그러나 이후 보물급 문화재로 2015년 재지정되면서 순수한 목조가 아니라 최종 마감이 소조로 되어 있음이 밝혀져 소조상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