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열녀도는 명대 『고금열녀전(古今列女傳)』에 수록된 중국 왕조의 역대 현비, 현황후(賢皇后)의 사적을 독립적으로 그린 현비고사도와, 남편을 위해 열행을 실천한 중국과 한국의 일반 여인을 그린 열녀도가 있다. 열녀도는 중국과 조선의 행실도 등에 수록된 열녀도, 이를 독립시켜 병풍과 족자로 그린 그림으로 나눌 수 있다. 현비, 현황후의 경우 황후로서의 검소함, 외척 배제, 충심을 강조하는 내용이 그려졌고, 열녀도는 남편에 대한 수절의 의무를 지키기 위해 부인이 죽음을 선택하거나 신체를 훼손한 내용이 주로 그려졌다. 이러한 그림은 왕실, 사대부, 일반 여인들에게 충심, 정절을 중심으로 한 유교적 여성상을 유포하고 실천하도록 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조선의 열녀도는 유향(劉向)의 『열녀전(列女傳)』이나 명대 『고금열녀전』에 수록된 삽도를 참고하고 조선시대까지의 열녀 이야기를 새롭게 수집, 종합하여 제작되었으리라 추정된다. 『고금열녀전』은 1404년(태종 4) 3월 조선의 요청으로 1차로 유입되었고, 같은 해 11월 1일 2차로 조선에 유입되었다. 『고금열녀전』은 명대 해진(解縉, 1369∼1415)이 1403년에 유향의 『열녀전』에 수록된 인물에 명대 초기까지 사서(史書)에서 수집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더해 상권은 역대 후비(后妃), 중권은 제후 대부(諸侯大夫)의 처(妻), 하권은 사서인(士庶人)의 처로 구성하여 편찬한 것이다. 유향의 『열녀전』은 『고금열녀전』과 구별하기 위해 『고열녀전』으로 불렸으며 여기에는 고개지(顧愷之)가 그렸다는 삽화가 수록되었다. 고개지의 삽화가 있는 유향의 『고열녀전』은 1543년 열녀전 언해본을 만들면서 참고한 기록이 있어 조선에서 두 가지 종류의 열녀전을 참고하여 열녀도를 제작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현비고사도의 경우 『고금열녀전』에 수록된 현후, 현비가 주로 그려져 그 영향이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의 『삼강행실도』(1434년 초간)에 처음으로 등장한 110명의 열녀 삽화는 『삼강행실도 언해본』, 『속삼강행실도』(1514년 초간), 『동국신속삼강행실도』(1617), 『오륜행실도』(1797년 초간)에 재차 수록되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는 700여 명에 달하는 한국 여인들의 열행을 수록하고 그에 대한 삽화가 포함되었다. 『삼강행실도』에 수록된 110명의 열녀 중 15명이 한국 여성이고 나머지는 중국의 여성이다.
열녀도는 병풍으로도 제작되었는데 이때 그려진 고사는 『소학』·『시경』·사서(四書) 등에 수록된 여인들의 이야기였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열녀도 병풍은 조구명(趙龜命, 1691∼1751), 한필교(韓弼敎, 1807∼1878)가 딸이나 며느리에게 주기 위해 제작한 것이 대표적이다. 오륜행실도 병풍 중에도 열녀도가 그려졌는데 이때 차용된 고사는 승당유고(升堂乳姑), 왕씨감연(王氏感燕), 목강무자(穆姜撫子)였다. 그 중 승당유고는 조구명, 한필교 등이 찬을 쓴 열녀도 병풍에 그려진 고사였다. 단일 인물의 열녀를 그린 예로 〈열녀향낭도〉, 〈열녀서씨포죽도(烈女徐氏捕竹圖)〉와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 1848∼1941)이 그린 〈열녀한씨추암도(烈女韓氏墜巖圖)〉가 남아 있다.
조선 전·중기에 많이 그려진 현비고사도는 주로 명대 『고금열녀전』을 참고하여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태종, 성종, 중종대에는 궁궐 벽에 현비고사도를 그리거나 병풍으로 제작하였는데, 주선왕강후(周宣王姜后), 당태종황후장손씨(唐太宗皇后長孫氏), 주문왕후태사(周文王后太姒), 제효공부인맹희(齊孝公夫人孟姬), 초번희(楚樊姬), 한원제풍소의(漢元帝馮昭儀), 한성제반첩여(漢成帝班婕妤), 한명제명덕마황후(漢明帝 明德馬皇后), 당태종문덕장손황후(唐太宗 文德長孫皇后), 송인종광헌조황후(宋仁宗 光獻曹皇后), 송영종선인고황후(宋英宗 宣仁高皇后) 등의 고사가 포함되었다.
조선 전기부터 제작된 열녀도는 조선 후기까지 지속적으로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면서 제작되었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 지방지에 수록된 열녀의 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이는 양반 가문에서 자신의 집안의 과시를 위해 열녀를 만들었기 때문이면서 당시 여인들이 정절 이데올로기를 내재화한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