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해도는 물고기와 게 등 바다 생물을 그린 그림이다. 어해도라는 말은 18세기 김창업과 이덕무의 기록에서 처음 사용된다. 어해도에 등장하는 잉어, 쏘가리, 게, 거북 등은 입신양명을 기원하는 의미로 쓰였다. 물고기가 알이 많은 것을 비유하여 부귀와 다산의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18세기 이후 어해도는 중국과 달리 화훼, 산수가 결합되거나 병풍으로 제작되었다. 이는 어해도가 길상의 의미를 지닌 선물이나 집안의 장식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대표 작품으로는 김인관의 「어해도」나 장한종의 「어해도」 8폭 병풍 등을 들 수 있다.
어해도의 ‘어해(魚蟹)’라는 용어는 7세기 중국의 역사서인 『북사』에 처음 등장하였다. 그러나 어해도라는 용어는 송대 『선화화보(宣和畵譜)』(1120년 편찬)에 3세기 화가 원의(袁嶬)의 어해도가 황실에 보관되어 있다는 기록이 처음이다. 이를 통해 송대에 어해도라는 장르가 이미 확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송대에는 쏘가리, 잉어를 그린 궐어도(鱖魚圖), 이어도(鯉魚圖) 등 어도(魚圖)와, 게를 수생 식물과 함께 그린 해도(蟹圖)가 전해져 어해도는 이들과는 다른 개념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라 유추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시대 『동문선』에 공민왕의 잉어를 그린 그림인 「이어도」에 대한 찬문이 있어 고려시대에도 어해도라는 장르 개념이 없었으며, 조선 중기까지는 관련 기록이 확인되지 않는다.
어해도라는 말이 등장한 것은 18세기에 이르러서였다. 김창업(金昌業)이 1712년 연행 시 마유병(馬維屛)의 집에서 「어해도」 병풍을 보았다는 기록과 이덕무가 「해어도(海魚圖)」를 평문했다는 기록은 18세기에 이르러서야 어해도라는 장르 개념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어해도는 단일 종류의 물고기인 쏘가리, 잉어가 바닷속에서 유영하는 모습을 게, 새우 등 바다 생물과 함께 그린 유형이 있고, 수많은 물고기가 유영하는 모습을 그린 유형도 있다.
송대 어도, 해도, 어해도가 별도로 존재했던 것과 달리 고려시대와 조선 전‧중기까지 어해도는 정립되지 않았고 어도와 해도가 별도로 그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것이 18세기 이후에 물고기와 게가 함께 등장하는 어해도가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시기는 대량의 물고기와 게를 그리기 위해 족자, 화첩뿐 아니라 병풍으로 많이 제작되었는데 8폭, 10폭이 일반적이었다. 이들 작품은 모두 치밀한 사생을 바탕으로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어해도는 다양한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어해도에 등장하는 잉어는 등용문 고사와 연관시켜 남성의 입신양명을 기원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또한 쏘가리, 게, 거북도 입신양명과 연관이 많은데 쏘가리는 궐(鱖)로 궁궐(闕)과 동일한 의미로, 게와 거북은 등껍질인 갑(甲)과 과거급제의 갑(甲)과 동일한 의미로 쓰여 입신양명과 연관이 있다.
입신양명의 의미뿐 아니라 부귀와 다산의 의미로도 사용되었는데 물고기 어(魚)와 남을 여(餘)의 중국어 발음이 유사하여 풍족한 삶을 상징하였다거나 물고기의 알이 많은 것을 들어 다산을 상징하기도 하였다.
18세기 이후 조선시대 어해도의 특징은 중국과는 달리 화훼, 산수가 결합되거나 장한종 이후에는 병풍으로 제작된 점이다. 이는 당시 어해도가 과거를 보는 선비나, 결혼을 앞둔 이들에게 길상의 의미를 지닌 선물이나 집안의 장식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