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녀도는 중국풍 궁중 복식의 여인을 그린 그림이다. 중국에서 사녀는 원래 여자 또는 상층부의 부녀를 가리켰다. 사녀가 미인의 의미로, 사녀도를 미인도의 의미로 사용한 것은 명·청시대이다. 조선 시대에 사녀를 미인의 뜻으로 처음 쓴 이는 이하곤(1677∼1724)이다. 신위의 기록에서도 사녀도를 미인도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했다. 다만 미인도는 미인을 그린 것을 망라한 개념이다. 사녀도는 중국 궁중 복식의 여인을 그린 그림으로, 미인도의 하위 개념이다. 현전하는 조선 시대 사녀도는 작자 미상의 「사녀도」, 신명연의 「인물」 등이 있다.
사녀도(仕女圖)의 사녀(仕女)의 연원은 ‘사녀(士女)’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녀(士女)라는 말은 중국 진한 이전에는 결혼하지 않는 남녀를 지칭하다가, 진한 이후에 여자 또는 상층부의 부녀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림에 사녀(士女)를 처음 쓴 예는 당 주경현(朱景玄, 841∼846 활동)의 『당조명화록(唐朝名畵錄)』에서 볼 수 있는데 이때 사녀도는 귀족 부녀를 소재로 그린 그림을 칭하였다. 또한 이 책에서는 사녀도를 잘 그리는 작가를 소개하고 있어 당시 사녀도를 전문적으로 그린 이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대(唐代)까지도 사녀도는 아직 장르로 확립되지 않았고 보편적으로 사용되지도 않았다.
그러던 것이 송대에 와서야 본격적으로 사녀가 미인의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곽약허(郭若虛)의 『도화견문지(圖畵見聞誌)』에 “사녀는 빼어난 아름다움과 날씬하고 고운 자태가 풍부해야 한다”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이 시대에 주방(周肪)의 사녀화를 미인위기도, 미인안락도로 개칭하여 기록한 것을 보아도 송대 이후 사녀(士女)는 미인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사녀(仕女)는 원대 이후의 기록에 나오는데 탕후(湯垕)의 『화론(畵論)』, 『고금화감(古今畵鑑)』 등에는 사녀화를 사녀(士女)가 아닌 사녀(仕女)로 바꾸어 기록하였다. 이후 명 · 청대 사녀도는 미인도와 동일한 의미로 혼용되었다.
중국 왕조의 사녀도가 황실, 귀족, 일반 여인들을 그린 그림에서 명 · 청대에 미인도와 동일하게 널리 사용된 것과 달리, 조선시대에는 사녀도(仕女圖, 士女圖)라는 용어는 그다지 많이 사용되지 않았다.
사녀(仕女)라는 용어가 조선시대에 처음 등장한 것은 이하곤(李夏坤, 1677∼1724)이 사녀도를 보고 쓴 감상인 「제사녀장자(題仕女障子)」에서였다. 신위(申緯, 1769∼1845)도 「사녀독서도(仕女讀書圖)」, 「사녀권수도(仕女倦睡圖)」, 「사녀의권도(仕女倚倦圖)」를 본 후의 감상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하곤과 신위의 사녀도 감상평을 고려할 때, 그들은 사녀도를 미인도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명 · 청대 사녀도가 미인도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 것과 동일한 맥락이다.
또한 일반적으로 조선에서 미인도는 사서(寫書)미인도, 탄금미인도 등 앞부분에 인물의 활동 내용을 쓰고 뒷부분에 미인이라 붙여 감상되었는데 사녀도 역시 여인의 활동 내용을 뒷부분에 쓴 것과 유사하다. 이 역시 조선시대 사녀도가 미인도와 동일한 의미로 인식, 유통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다만 미인도가 조선과 중국의 미인을 그린 것을 망라한 개념이라면 사녀도는 중국 궁중 복식의 여인을 그린 그림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사녀도는 미인도의 하위 개념으로 볼 수 있다.
현전하는 조선시대 사녀도는 작자 미상으로 전해지는 「사녀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신명연(申命衍)의 「인물」이나 「벽오청서도」(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