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전(板殿)이란 불전(佛典)이나 유가서적(儒家書籍) 등을 목판 인쇄하고, 인쇄에 사용된 책판(冊板)들이 부식되거나 훼손되지 않도록 특별한 건물을 건축하여, 이 건물 내에 목판의 보존에 만전을 다할 수 있도록 건축된 건물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판전’으로 가장 유명한 건물은 ① 합천 해인사(海印寺) 장경판전(藏經板殿), ②서울 봉은사(奉恩寺) 판전을 들 수 있다. 그밖에 유가책판(儒家冊板)의 판전으로는 ③ 대전 송자대전(宋子大全) 장판각(藏板閣) 등을 들 수 있다.
/사진 배치 메모 숨김 <사진 4장> 배치/
우리나라는 8세기에 이미 세계 최초의 목판 인쇄본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706~742년)』을 간행한 나라이다.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高麗再造大藏經)』은 이와 같은 유구한 한국 인쇄 문화가 농축된 한국 목판 인쇄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팔만대장경』은 1237년부터 1248년까지 남해(南海) 섬에서 8만여 장의 대장경 경판[經板, 木版]이 제작된 뒤, 강화산성(江華山城)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大藏經板堂)에 보관되었다. 1251년에는 대장경의 제작을 마친 것을 기념하기 위한 의식이 거행되었으며, 1318년에 강화도의 선원사(禪源寺)로 옮겨졌다가, 고려 말기의 빈번한 외침으로 인하여 1398년에 현재의 해인사 장경판전으로 옮겨졌다. 기록에 따르면 국왕이 대장경의 이송을 직접 감독하기 위해 용산강(龍山江: 지금의 한강(漢江))으로 행차했다고 전해진다.
해인사 장경판전은 고려시대 13세기 전기에 판각된 8만여 장의 대장경판을 보존하고 있는 건물로, 해인사 현존 전각 중 최고의 건물이다. 조선 건국 초기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 세조 3년(1457)에 크게 다시 지었고, 성종 19년(1488)에 학조 대사(學祖, 김수온(金守溫, 1410~1481)의 친형)가 왕실의 후원으로 다시 지어 ‘보안당’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가야산(伽倻山) 산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 임진왜란 때에도 피해가 없어서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광해군 14년(1622)과 인조 2년(1624)에 보수(補修)가 있었다.
해인사 장경판전은 가야산의 중턱에 자리 잡은 해인사 대웅전 뒤편에 높은 축대(築臺)를 쌓고 터를 마련한 뒤, 앞면 15칸, 옆면 2칸 크기의 두 건물을 나란히 배치하였다. 남쪽 건물은 ‘수다라장(修多羅藏)’이라 하고 북쪽의 건물은 ‘법보전(法寶殿)’이라 칭한다. 장경판전의 서쪽과 동쪽에는 각각 앞면 2칸, 옆면 1칸 규모의 작은 서고(書庫)가 있어서, 전체적으로는 긴 네모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대장경판을 보존하는 건물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장식 요소는 두지 않았으며, 자연 통풍(自然通風)을 위하여 창호(窓戶)의 크기를 각 칸의 남쪽과 북쪽의 크기를 서로 다르게 하고, 각각의 칸마다 배치한 아래 위의 창의 크기도 달리 내었다. 또한 건물 내부의 흙바닥 속에 숯, 횟가루, 소금 등을 모래와 함께 차례로 차곡차곡 쌓아 다져 넣음으로써 건물 내부의 습도를 자연 조절하도록 조치하였다. 그리하여 대장경판이 오랜 세월이 흐르더라도 훼손되지 않고 효과적으로 보존하는 데 필요한 자연 통풍과 적절한 온도 및 습도 조절이 가능한 독특한 구조를 갖추었다.
장경판전 건물 안에 배치된 육단(六段)의 판가(版架) 역시 실내 온도와 습도가 균일하게 유지되도록 배열되어 있다. 또한 각각의 경판은 경판 두께의 2배 정도 되는 마구리 사이에 끼워져, 각 층 판가에 세로[縱] 형태로 겹으로 세워진 상태로 보존됨으로써, 경판과 경판 사이 및 6단 판가의 아래 위를 관통하는 공기 통로를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판가와 각 경판 사이에 공기의 흐름을 원활하게 함으로써 경판에 침투하는 습기나 부패를 방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
요컨대, 해인사 장경판전은 위와 같이 자연의 조건을 최대한 이용하고 첨단 과학을 능가하는 설계 · 건축 공법을 장치함으로써,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관점으로 대장경판의 완벽한 보존을 목적으로 한 책판서고이다. 그리하여 고려 13세기 전기에 완성된 대장경판을 600년이 넘도록 조금도 훼손되지 않고 온전하게 지금까지 잘 보존할 수 있었다고 평가 받고 있다.
한편, 해인사 장경판전을 ‘한국 현존(現存) 가장 오래된[最古] 도서관’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제임스 W.P 캠벨(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건축사(建築史) 교수)은 세계의 도서관 건축물을 다룬 세계의 도서관을 펴내면서, 그 첫머리에 해인사 장경판전을 언급했다. 프랑스에서는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아름다운 도서관 건축에 해인사 장경판전을 선택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장경판전도 엄연히 도서관에 포함될 수 있다.
봉은사 판전은 단층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이다. 4단으로 쌓은 장대석 위에 건물을 올렸으며, 기둥은 둥글고 주춧돌은 네모나다. 정면 기둥마다 주련(柱聯)을 달아두었다.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용마루 끄트머리에 취두를 올렸으며 지붕마루는 기와로 마감했다. 합각 부분에는 나무로 만든 풍판(風板)을 덧대었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공포는 삼익공이다.
/사진 및 그림은 본문에 나타나지 않음.<사진 2장>/ 배치 코너 봉은사 판전 건물 사진. 추사 김정희의 현판 사진
<그림 2>의 봉은사 판전 현판(懸板)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71세 때 병중(病中)에 쓴 글씨로, 고졸(古拙)하고 천진난만(天眞爛漫)한 수작(秀作)으로 평가되며, 김정희 생애 최후의 작품이다.
<봉은사 판전> 실내의 벽 가장자리에는 받침대를 만들어 경판을 보관하고 있다. 경판에 습기가 스며들지 않게 하려는 목적으로 전각의 바닥에 온돌을 깔았다.
<그림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봉은사 판전에는 화엄경소를 비롯한 많은 목판본이 보관되어 있는데 현재 총 ‘16부(部) 1,480매(枚)’에 달한다. 보존 목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대방광불화엄경소초(大方廣佛華嚴經疏抄), ②유마힐소설경직소(維摩詰所說經直疏), ③천로금강경(川老金剛經), ④불설천지팔양신주경(佛說天地八陽神呪經), ⑤불설아미타경(佛說阿彌陀經), ⑥심경(心經), ⑦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⑧한산시(寒山詩), ⑨불설천수천안관세음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경(佛說千手千眼觀世音菩薩廣大圓滿無碍大悲心陀羅尼經: 千手經), ⑩준제경(准提經), ⑪육조법보단경(六祖法寶壇經), ⑫고왕경(高王經), ⑬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藥師瑠璃光如來本願功德經: 藥師如來本願經), ⑭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원품소(大方廣佛華嚴經普賢行願品疏), ⑮불설칠구지불모준제다라니병염송관행법(佛說七俱胝佛母准提陀羅尼竝念誦觀行法), ⑯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
판전은 책을 인쇄한 목판을 보존하기 위하여 건축된 건물을 말하는 것으로, 해인사 장경판전, 봉은사 판전, 송자대전 장판각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중 해인사 장경판전은 『팔만대장경』이라는 고려인의 호국염원이 담긴 신앙심의 결정체를 보존하고 있으며, 건축 또한 풍수지리(風水地理)를 활용하고, 습도와 풍향 등을 자동으로 조절하는 과학적 건축물이다. 이러한 점에서 판전은 경판의 보존을 위한 완전무결(完全無缺)한 걸작으로 인정 받는 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