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모는 2000년에 설립되어 2019년에 해체된 정치인 노무현을 지지하는 단체이다.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줄임말로 대한민국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이다. 노사모는 인터넷 동호회로 출발하여 점차 현실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정치적 결사체로 변모하였다. 2002년 새천년민주당 국민참여 경선 및 16대 대통령 선거에 참가하여 노무현의 후보 선출과 대통령 당선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후 열린우리당 창당, 국회의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 17대 국회의원 선거 등에 개입하여 정치 변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2000년 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 가능성이 큰 종로구를 떠나 부산 북강서을 지역구에 출마한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는 지역주의의 벽을 넘지 못하고 패배하였다. 그의 낙선을 안타깝게 여긴 네티즌들이 ‘바보 노무현’의 정신에 공감하며 노무현 팬클럽을 만들 것을 제안하였다. 같은 해 4월 15일부터 회원 가입 신청을 받기 시작하였고 4월 17일 노무현 팬클럽 임시 게시판이 개설되었다. 5월 7일 첫 노사모 전국 모임이 개최되었으며 5월 17일 노사모 홈페이지가 개설되었다. 그리고 6월 6일 대전의 한 PC방에서 공식적으로 노사모 창립 총회가 개최되었다.
2002년 5월 당시 노사모 회원의 연령 분포는 25세 이상 40세 미만이 약 67%로 압도적으로 많았고 특히 30대 초중반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이들이 노사모를 설립한 목적은 무엇보다 회칙인 노사모의 약속에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제시하였다.
첫째, 1. 나는 노무현과 함께 우리나라의 왜곡된 지역 감정의 극복에 동참한다. 둘째, 2. 참된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하여 우리 노사모 회원들과 함께 결정한 활동에 대해 자발적으로 동참한다. 셋째, 3. 노사모의 약속과 노사모의 활동이 기록된 관례가 회칙을 대신하며, 이 약속과 관례는 노사모의 전자 투표만으로 바꿀 수 있다.
노사모는 이 회칙에 근거하여 2002년 새천년민주당 국민 경선에서부터 정치 참여 활동을 본격화하기 시작하였다.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명칭이 함축하듯이, 노사모는 조직적 구속력이 약한 팬들의 동호회의 성격을 띠었다. 적어도 노사모가 새천년민주당 국민참여 경선 참여를 결정하기 전까지 이러한 느슨하고 자율적인 연대가 회원 활동의 동기이자 회원 수 증가의 동력이었다. 노사모는 200여 명이 가입하여 출범한 이래 새천민주당 국민참여 경선 참여까지 지속적으로 회원수가 증가하여 10만 명을 웃돌았다.
노무현이 대선 후보 경선 참여를 공식화하고 노사모의 선거 참여에 반대하는 회원들이 이탈하면서, 노사모는 자연스럽게 정치적 결사체로 성격이 전환되었다. 그리고 한국 정치사의 첫 국민 경선 실험에서 노사모는 수십만 명을 동원하여 노무현의 대선 후보 선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나아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의 대결에서 지지율 열세가 지속되는 가운데, 민주당 내의 대선후보 교체 압력, 정몽준과의 후보 단일화, 정몽준의 지지 철회 등의 상황에서 노사모는 재빠르게 대응하며 대선 승리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노사모 게시판이 사실상 온라인 대선 캠프로 기능하며, 정치 자금 모금과 정치 광고 아이디어 등 전통적인 정당의 캠페인 기능을 주도하였다.
노무현 정부 출범과 열린우리당 노선 경쟁 과정에서 노사모는 정치 참여 여부와 방식을 둘러싸고 지속적으로 논쟁과 분열을 겪었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노사모의 조직 이슈는 크게 ‘발전적 해체, 참여정부에 대한 비판적 견제, 노무현 대통령의 결사 옹위’로 나누어졌다. 그리고 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노사모 내 주요 인사들이 각 대선 후보 캠프에 참여하면서 친노 세력과 참여정부 평가 문제를 둘러싸고 내부에서 문제가 심해졌다. 결국 대통합민주신당의 17대 대선 패배와 더불어 노무현 대통령 퇴임 이후 노사모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위축되었으며 2019년에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노사모의 주요 활동은 참여정부 출범 전과 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참여정부 출범 전의 노사모 활동은 노무현의 새천년민주당 대선 후보 선출과 캠페인 지원 활동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당시 김대중 정부의 지지율이 급락하고 대선 후보들의 지지율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에게 크게 뒤처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선 후보 선출에 국민 참여 경선이 처음 도입되어 2002년 3월 9일 제주도를 시작으로 전국 순회 경선에 돌입하였다. 그리고 전체 선거인단의 50%를 차지하는 국민 선거인단 모집에 무려 190만명이 신청함으로써 대흥행을 예고하였다. 이후 조직 동원과 세몰이에 치중한 다른 후보 캠프와 달리 노사모는 당원과 국민을 대상으로 각 집을 방문하거나, 손 편지를 쓰는 등 열정적으로 대면 접촉을 하며 국민 선거인단 모집 활동을 벌여나갔다. 그리고 같은 해 3월 13일 이회창(40.6%)과의 양자 대결에서 노무현(41.7%)이 앞서는 결과(『문화일보』 · SBS 공동 여론조사)가 보도되면서 노무현 바람이 본격화되었으며 노무현은 최종적으로 60%를 얻으며 대선 후보로 뽑혔다. 이후 대선 캠페인에서 노사모는 소액 후원금을 모금하는 희망 돼지 저금통 및 노란 목도리와 노란 풍선 물결로 유세를 지원하는 활동 등을 통해 노무현 바람을 확산하는 데 힘썼다. 그리고 당내의 후보 사퇴 압력과 정몽준의 지지 철회의 상황에서 노무현 지지 동원을 강화하여 그의 대통령 당선에 지대하게 기여하였다.
참여정부 출범 후의 노사모 활동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저지와 열린우리당 개혁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노무현 대통령은 선거 중립 의무 및 헌법 준수 의무 위반 사유로 2004년 3월 12일 야당 국회의원 193명의 찬성으로 탄핵 소추되었다. 입헌 정치의 역사에서 첫 대통령 탄핵 소추에 압도적으로 반대하는 민심이 분출되었다. 특히 노사모와 국민을 협박하지 말라(cafe.daum.net/antitanhaek)가 온라인 공간에서 탄핵 반대 여론을 확대하며 촛불 시위를 주도하였다.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이 진행되는 가운데, 4월 15일 17대 국회 의원 선거가 시행되어 열린우리당이 152석을 차지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는 민주화 이후 집권당이 과반수 이상의 의석을 차지한 첫 사례였다. 5월 14일 헌법재판소가 탄핵 소추안을 기각하며 노무현 대통령은 직무에 복귀하였다. 열린우리당의 창당에 관여하였던 노사모는 탄핵 기각 이후 또 다시 전성기를 누리며 정당 정치에 개입하였다. 그리고 열린우리당이 통합신당 창당으로 내부 분쟁을 겪으며 노사모 회원들이 점유한 기간 당원제를 폐지하면서 노사모의 입지는 크게 위축되었다. 또한 노사모 주요 인사들이 정동영 등 잠재적 대선 후보 진영에 참여하면서 해체 논란이 가중되었다. 아울러 대통령에 대한 옹호와 비판적 지지 등으로 입장이 나뉘며 정당에 대한 영향력도 크게 줄어들었다. 노무현 대통령 퇴임 이후 사실상 노사모 활동도 정리되었다.
노사모 조직과 활동의 의의 및 평가는 다음과 같이 제시할 수 있다. 첫째, 노사모는 팬클럽의 형식으로 한국 정치의 문제와 과제를 제기한 최초의 정치인 후견 집단이었다. 노사모를 시작으로 개별 정치인에 대한 지지 집단의 정서적 일체감이 팬덤 정치(fandom politics)로 나타나는 현상이 확산되었다. 이는 정치적 무관심을 해결하는 순기능과 정치적 사인화(political personalization)가 공공성을 침해하는 역기능을 동시에 내포하였다. 둘째, ‘자유로운 개인들의 느슨한 연대’라는 노사모의 슬로건이 시사하는 것처럼 회원들은 리더를 따르면서도 자율적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노사모는 16대 대통령 선거 및 이후 노무현 정부의 정치 이슈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정치적 결사체로 변하게 되었다. 이는 다른 정치 세력과 대립할 개연성을 내포하였으며, 실제 노사모는 주요 이슈에서 정치 행위자로 역할하며 논란과 갈등의 주요한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셋째, 노사모는 온 · 오프라인을 연계하여 시민 정치 참여의 독창적인 방식을 추구하며 정치적 길을 개척하였다. 노사모 활동을 계기로 한국 사회에서 참여 민주주의 담론이 활성화되었으며, 선거 캠페인과 정당 정치가 시민에게 폭넓게 열리기 시작하였다. 나아가 지역주의를 내세운 한 3김 리더십의 퇴장과 맞물리며, 한국 사회에 탈지역주의와 정치 개혁 이슈가 급격히 확산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