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구 ()

종로구청
종로구청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서울특별시의 중북부에 위치한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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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서울특별시의 중북부에 위치한 구.
개관

청계천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동쪽은 동대문구 · 성동구, 남쪽은 청계천을 경계로 중구, 서쪽은 서대문구 · 은평구, 북쪽은 성북구 · 경기도 고양시와 접해 있다. 위치는 동경 126°57'~127°01', 북위 37°33'~37°37'이다. 면적은 23.91㎢이고, 인구는 15만 4986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7개 행정동(87개 법정동)이 있고, 구청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에 있다.

자연환경

백악산을 진산(鎭山)으로 동쪽에 낙산, 서쪽에 인왕산이 솟아 있어 분지를 형성하며, 청계천이 동류하면서 배수역할을 한다. 풍수지리적 측면에서 볼 때 이 지역은 장안에서 으뜸가는 명당자리이다. 지형상 백악산 사면의 말단부에 해당해 북고남저(北高南低)로서 일조와 배수가 양호하며 전망도 매우 좋다. 구기동 · 평창동 · 신영동 · 홍지동 · 부암동 일대는 삼각산 · 인왕산 · 백악산이 에워싼 분지로 그 사이에 홍제천 상류가 흐른다. 구의 중앙은 창덕궁과 종묘로 이어지는 구릉에 울창한 도심의 숲을 형성하고 있으며, 구의 서쪽에서 발원한 청계천이 동쪽으로 흐르면서 저지대 평지를 이루고 있다. 지질은 대부분 대보화강암의 침식과 풍화작용으로 형성된 전형적인 화강암 지대로 되어 있다.

종로구의 삼각산 지맥에서 뻗어 내린 백악산을 주산으로 하여 낙산과 인왕산이 좌청룡 · 우백호를 형성하는 전형적인 명당 산세를 형성하고 있다. 즉 삼각산 보현봉에서 남쪽으로 뻗은 줄기가 형제봉 · 구준봉을 이루고 백악산 정상에 이르러 동쪽으로 낙산줄기, 서쪽으로 인왕산 줄기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보현봉에서 서쪽으로 뻗은 줄기는 문수봉 · 비봉 · 향로봉을 이루다가 탕춘대능선을 따라 홍제천에 이르고, 이는 물을 건너 인왕산 줄기로 다시 이어지며 인왕산에서 서쪽으로는 무악줄기로 이어진다. 이러한 산줄기 사이 백악 뒤쪽으로 홍제천이 흐르고, 인왕산과 백악산 계곡은 청계천 상류가 되어 구의 남쪽 경계를 이루고 동쪽으로 흐르면서 대학천 등과 합류하여 중랑천으로 흐르고 다시 한강에 합류하게 된다.

기후는 대륙성 기후의 특징을 바탕으로 한강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도시기후를 나타내고 있으며, 연평균 기온은 13.0℃, 1월 평균기온은 0.4℃, 8월 평균기온은 26.5℃, 연 강수량은 1,212.3㎜이다.

역사

종로 지역의 선사문화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삼각산 · 백악산으로 이어지는 산세와 청계천 · 한강으로 둘러진 배산임수의 지리적 조건을 바탕으로 선사시대의 인류들이 살았을 개연성은 높다. 종로 지역은 서울의 중심 지역으로 이곳을 무대로 최초의 정치세력이 등장한 것은 진국(辰國)과 삼한사회의 마한(馬韓) 그리고 초기 백제였다. 서기전 1세기 말 백제국이 마한을 정복하고 초기 고대국가인 백제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이들은 한강 유역의 경제성을 이용하여 보다 많은 생산 활동과 인구 증가를 이루었고 보다 큰 정치집단을 형성하여 4세기 중엽 근초고왕 때 전성기를 이루었다. 신문로 경희궁지 일대의 지하철 공사장에서 백제시대 토기편이 무수히 발견되어 당시에도 많은 주민들의 생활터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4세기 후반 고구려 광개토왕의 침공과 5세기 들어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서울 지역은 양국의 각축장이 되었다. 급기야 475년 장수왕이 한성을 공략하여 백제의 개로왕을 살해하였고, 이후 77년간 한강 유역은 고구려의 통치하에 들어갔으며, 남평양이 설치되었다. 한편 신라는 553년 고구려로부터 수복한 백제의 한강 유역을 기습 공격하여 한강 유역을 독점함으로써 삼국통일의 전진기지로 삼았다. 신라의 한강 유역 진출은 삼각산 비봉에 세워졌던 진흥왕순수비를 통해서 알 수 있으며, 진흥왕은 한강 유역에 군사체제의 행정구획인 신주를 설치하였다. 이어 신라는 전국에 9주를 설치했고 서울 지방은 한산주(漢山州)에 편입되었다. 한산주는 757년(경덕왕 16) 서울 지방에 한양군(漢陽郡)을 설치하면서 한주(漢州)로 개칭되었다. 후삼국시대에는 왕건의 활동으로 태봉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918년 왕건이 국왕에 추대되어 고려왕조를 개창함에 따라 한양군(漢陽郡)은 고려에 편입되었으며, 940년(태조 23) 전국의 행정구역을 재편성하고 주 · 군 · 현를 개칭함에 따라 한양군은 양주(楊州)로 편제되었다. 성종 14년 도제(道制)가 실시되어 양주는 관내도(關內道)에 속하였고 절도사가 배치되어 좌신책군(左神策軍)이 되었다. 현종 9년에 양주는 양광도에 속하게 되었으며, 1067년(문종 21) 양주는 남경으로 승격되어 고려 삼경제의 하나로 운영되었고, 1069년에 신경기(新京畿)에 편입되었다. 그 후 다시 양주가 되었다가 1101년(숙종 6) 남경개창도감이 설치되면서 남경후보지를 물색하여 지금의 청와대 자리인 면악(面嶽) 남쪽으로 결정되어 연흥전 · 천수전 등의 궁궐 건물이 마련되었다. 이때 남경의 관할구역은 동서로는 대봉에서 안산에 이르고, 남북으로는 사리(한강)에서 백악산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1390년(공양왕 2) 경기좌도에 속하여 과전과 공신전의 반급지역이 되었다. 한편 종로구 지역에 남경궁궐을 중심으로 관아, 객사, 향교, 성황당, 사찰, 정자 등이 설치 운영되었다. 남경의 관아는 고려 후기 한양부의 관아로 이어지고, 다시 조선의 한성부 관아로 이어지고 있다.

1394년 태조 이성계는 한양천도를 단행하고, 좌묘우사(左廟右社) 전조후시(前朝後市)의 도시계획 원칙에 따라 궁궐과 종묘 · 사직, 성곽과 관아, 시전과 도로 등을 설치하여 왕도의 면모를 갖추었으니, 그 자리가 바로 종로구이다. 한양 천도에 따라 도성 내의 중심가로인 종로와 남대문~종로를 연결하는 남대문로가 구획되었으며, 이들이 교차하는 지점(종로네거리)에 형성된 시전이 육의전으로 발전해 도심의 핵을 형성하였다. 이때 형성된 관청가와 주요 간선도로망의 상가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따라서 종로구 지역은 한성부의 중심으로 한성부 중부의 서린방(瑞麟坊) · 견평방(堅平坊) · 경행방(慶幸坊) · 징청방(澄淸坊) · 수진방(壽進坊) · 관인방(寬仁坊) · 장통방(長通坊) · 정선방(貞善坊), 동부의 연화방(蓮花坊) · 창선방(昌善坊) · 건덕방(建德坊) · 숭신방(崇信坊) · 숭교방(崇敎坊), 서부의 인달방(仁達坊) · 여경방(餘慶坊) · 적선방(積善坊), 북부의 순화방(順化坊) · 준수방(俊秀坊) · 의통방(義通坊) · 관광방(觀光坊) · 안국방(安國坊) · 진장방(鎭長坊) · 가회방(嘉會坊) · 양덕방(陽德坊) 등의 지역이 청계천 북쪽지역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이후 영조∼고종 연간과 갑오개혁을 통하여 계와 동이 설치되는 등 행정구역의 개편이 있었다.

종로 지역에는 1394년 한양천도로부터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의 궁궐과 각종 이궁이 건립되었고, 종묘와 사직 및 도성 문묘와 성균관 등이 축조되었다. 지금의 세종로, 종로, 남대문로에 해당하는 육조거리와 운종가에 국가 상징도로가 개설되었으며, 생활하수의 통로격인 개천이 청계천이라는 이름으로 경영되어 준천공사가 이루어졌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궁궐 등 도시 시설이 불에 탔고 초근목피로 생명을 연장하면서 겨우 수천 명이 머무는 폐허를 경험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국운을 다시 일으키고자 했던 실학의 대두와 북학파의 활동 무대가 종로 일대였으며, 조선 후기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와 추사 김정희의 활동, 김홍도 등 풍속화가의 등장으로 인한 문예부흥의 터전도 종로구 일대였다.

1860년대에는 경복궁이 복원되었다. 조선 후기 장동(안동)김씨의 외척정치 60년의 본거지도 오늘날 종로구 청운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흥선대원군의 정치권력도 운니동 운현궁을 중심으로 행해졌다. 그리고 고종 연간의 민씨 척족정치의 중심 무대도 경운동 일대를 비롯한 종로구 지역이었다. 임오군란 · 갑신정변의 현장이 종로구이며, 갑오개혁으로 홍범14조가 발표되고,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경복궁 건청궁에서 시해되었으며,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가 운종가에서 개최되는 등 조선왕조 500년 역사의 흔적이 모두 종로구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은 경복궁 · 창덕궁 · 경희궁 · 종묘 · 문묘 등에서 이루어졌으며, 오늘날 광화문거리, 세종로 · 종로 그리고 북촌과 동촌 등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한편 종로네거리를 중심으로 동쪽으로 연화방(종로4가 일대), 서쪽으로 혜정교(종로1가 교보빌딩 뒤), 남쪽으로는 훈도방(을지로2가), 북쪽으로는 안국방(견지동 일대)에 이르기까지 긴 행랑이 설치되어 있었다. 여기에서 비단 · 면포 · 모시 · 종이 · 청포 · 어물 등 육의전을 중심으로 각종 물화가 매매되고 궁중과 관아에 물품을 납품하는 어용상인 조직으로서 시전이 자리 잡았고, 이를 관리하는 평시서(경시서)가 위치하였다. 또한 조선 후기에는 도고사상(都賈私商)이 상세를 확장하며 이현시장을 형성하면서 많은 사람이 구름같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운종가를 이루었다.

1910년 한성부를 경성부로 개칭하고, 1911년 경성부의 행정조직을 도성을 기준으로 성 안은 5부 36방, 성 밖은 8면으로 하는 5부 8면제를 실시하면서, 종로구 지역은 중부 8방과 동부 2방 지역에 해당되었다. 1914년에 5부의 행정구역을 확장하여 8면 가운데 도성 근처의 지역을 5부에 편입하였고, 이와 동시에 경성부의 186개 동 · 정의 명칭과 구역을 공포함에 따라 조선시대 이래 계속 사용되어왔던 고유의 방명을 이어받고 동시에 일제식 동명이 새로 생겨났다. 1943년 6월 10일 구제(區制)가 실시됨에 따라 경성부에는 7개 구가 설치되었는데, 종로구를 비롯하여 중구, 동대문구, 성동구, 서대문구, 용산구, 영등포구가 출발하였다. 이때 운종가 가운데에 종루(鐘樓)가 있어 종로구라 하였다.

1907년 순종이 황제에 올라 창덕궁에 유폐되어 동물원 · 식물원 · 박물관 등이 꾸며지고, 일제의 강점으로 조선총독부 건물이 경복궁의 외조공간에 위협적으로 건립되었다. 시정5주년기념 물산공진회라는 이름으로 경복궁의 주요 건물이 철거되고, 경희궁과 사직단 등 많은 국가 상징의 건축물들이 훼손되었다. 이에 우리 민족은 3·1운동과 6·10만세운동 등으로 민족의 자존을 꾀하였으니, 그 운동의 중심이 탑골공원을 비롯한 종로 지역이었다. 『동아일보』 등의 민족지가 발간된 곳도 종로구이다. 뿐만 아니라 일제의 식민통치행위에 의한 가혹한 민족 시련의 현장이 되기도 하였다.

광복 후 1945년 10월 16일 경성부를 서울시로 개칭하고, 1946년 종로구의 지위를 서울시 8개 구 가운데 1위로 규정하였다. 이어 1970년 5월 18일에 명칭이 일치하지 않는 법정동과 동사무소의 이름을 일치시켰는데, 당시 행정동을 36개동에서 25개동으로 통합 조정하였다. 1975년 10월 1일 종로구의 관할구역이 크게 확장되었다. 즉 서대문구 평창 · 부암동 등 창의문(彰義門) 밖의 12개 동을 편입했으며, 동대문 밖의 창신 · 숭인동 및 신설동 일부를 종로구로 편입하여 종래 관할구역이 10.68㎢에서 24.10㎢로 2.25배 늘어났다. 종로구는 87개 법정동을 17개 행정동에서 관할하고 있다. 그러나 종로구는 상당한 면적을 삼각산 · 백악산 · 인왕산 · 낙산 등의 산지가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경희궁 등의 궁궐과 종묘 · 사직 · 청와대 · 탑골공원 · 사직공원 · 삼청공원 및 성균관대학교 · 상명대학교들이 자리하고 있어 도심의 활동면적은 6㎢에 못 미치는 좁은 지역이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한 서울시민은 종로네거리와 세종로, 덕수궁 앞과 서울역 앞에 모여들어 광복과 독립만세를 부르짖으면서 새 역사를 맞이하였다. 종로구는 구역소를 구청으로, 구장을 구청장으로 바꾸고, 최탁을 초대 구청장으로 삼았으나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미군정이 실시되고 신탁통치를 결의하자 동대문종로중앙청 건물에 이르는 거리는 신탁통치 반대운동의 집결지가 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식이 중앙청 광장에서 열렸으니 종로구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중심이라는 역사성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한편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종로구 관내에서는 660명이 납치되고 주택 2,410동이 전파되거나 소실되는 등 피해가 대단히 컸다.

1960년 제4대 정부통령의 선거의 부정부패로 야기된 4·19의거의 주 무대로 세종로 · 대학로에서 경무대에 이르는 길과 이승만 대통령의 사저 이화장이나 이기붕 부통령 당선자의 사저 또한 종로구에 있었다. 이러한 전통은 5·16군사정변이나 한일협정 반대 데모 이후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이르기까지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화운동의 요람으로 종로구의 대한민국 정치 중심지 지위는 확고부동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종로구는 조선시대 한양천도 후 형성된 육백년 역사의 구시가지와 서울의 주요 지정문화유산의 약 절반이 분포되어 있는 전통문화의 전승지이다. 또 청와대 · 감사원 · 헌법재판소 · 국무총리공관 등 국가 주요 공공기관이 집결되어 있고, 문화시설 · 고궁 · 녹지 등 우수한 문화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다. 아울러 지하철과 노선버스가 집중되는 교통의 연결점으로 방사형 도로의 중심지이고, 백악산 · 인왕산 · 낙산 · 삼각산 · 고궁 등 풍부한 녹지공간과 수려한 자연경관을 보유한 서울의 심장부이자, 대한민국 정치 · 경제 · 문화 · 예술의 중심지이다.

유물 · 유적

종로구에는 조선왕조의 도읍으로서 갖추어야 할 도시 시설이 집중되어 있다. 조선왕조 전기 · 중기 · 후기를 걸쳐 이룩된 5대 궁궐 가운데 경복궁을 비롯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창덕궁과 창경궁 · 경희궁 등 북궐 · 동궐 · 서궐이 위치하고 있으며, 봉건국가의 상징물인 종묘와 사직단이 정궁의 동 · 서에 자리 잡고 있다. 그 외에 궁궐의 궁성과 도성(서울성곽)의 동 · 북 · 서쪽이 관방 기능을 하고 있으며, 궁궐 좌우와 전면에 의정부와 육조를 비롯한 각종 관아들이 위치하였다. 이들 관아건물은 식민통치와 근대도시로 탈바꿈하면서 철거되고 전쟁으로 파괴되었지만 종친부와 삼군부 총무당 · 청헌당 등은 다른 지역으로 이전되어 있으며, 관아유지에는 표석을 설치하였다.

해당 국가유산은 다음과 같다. 경복궁 근정전(국보, 1985년 지정), 경복궁 경회루(국보, 1985년 지정), 창덕궁 인정전(국보, 1985년 지정), 창경궁 명정전(국보, 1985년 지정), 창덕궁 돈화문(보물, 1963년 지정), 창경궁 홍화문(보물, 1963년 지정), 창경궁 명정문 및 행각(보물, 1963년 지정), 창경궁 옥천교(보물, 1963년 지정), 경복궁 자경전(보물, 1985년 지정), 경복궁 자경전 십장생굴뚝(보물, 1985년 지정), 경복궁 아미산 굴뚝(보물, 1985년 지정), 경복궁 근정문 및 행각(보물, 1985년 지정), 창덕궁 인정문(보물, 1985년 지정), 창덕궁 선정전( 보물, 1985년 지정), 창덕궁 희정당(보물, 1985년 지정), 창덕궁 대조전(보물, 1985년 지정), 창덕궁 선원전( 보물, 1985년 지정), 창경궁 통명전(보물, 1985년 지정), 경복궁(사적, 1963년 지정), 창덕궁(사적, 1963년 지정), 창경궁( 사적, 1963년 지정), 서울 우정총국( 사적, 1970년 지정), 경희궁지(사적, 1980년 지정), 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보물, 2021년 지정).

조선시대 성균관 · 문묘 · 중학 · 동학이 위치하고 있으며, 관상감 · 전의감 · 도화서에서는 각종 기술교육을 담당하여 조선왕조를 유지하는 관료의 인적 자원을 배출하였으며, 정치이념인 유학을 실천하고자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종묘를 비롯하여 여러 단 · 묘 · 사를 건립하였다. 관련 유적으로 종묘 정전(국보, 1985년 지정), 서울 문묘 및 성균관(보물, 1963년 지정), 서울 동관왕묘(보물, 1963년 지정), 사직단 대문(보물, 1963년 지정), 종묘 영녕전(보물, 1985년 지정), 사직단(사적, 1963년 지정), 종묘(사적, 1963년 지정), 서울 문묘와 성균관(사적, 1964년 지정), 서울 육상궁(사적, 1966년 지정), 선희궁터가 있다. 선희궁터는 1975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 한양천도 직후 도성을 방어하는 서울성곽이 축조되었으며, 이곳에는 4대문 ·4소문이 설치되었다. 또 숙종 연간에 북한산성과 탕춘대성을 축조하여 도성의 기능을 보강하였다. 서울 숭례문(국보, 1962년 지정), 서울 흥인지문(보물, 1963년 지정), 서울 한양도성(사적, 1963년 지정), 북한산성(사적, 1968년 지정), 홍지문 및 탕춘대성(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1976년 지정)이 있다.

종로구는 조선시대 양반관료의 집중주거지 전조후시와 좌묘우사의 전통적인 도시설계가 이루어짐으로써 청계천 수계와 백악의 산줄기에 따라 신분제 사회의 특성을 나타내며 직주근접(職住近接)의 원칙에 주민 배치가 이루어졌다. 따라서 종로지역은 궁궐과 중앙관아가 집중된 양반관료의 주거 집중지로서 권세가들이 모여 사는 북촌 즉 ‘윗대’를 형성하였다. 따라서 어의궁, 순화궁, 창의궁, 운현궁, 안동별궁, 무계정사, 석파정 등 왕실관련 주거 · 휴식공간과 육상궁으로 대표되는 칠궁과 경모궁, 누동궁 등 사묘(祠廟) 공간이 위치해 있다.

또한 백세청풍(百世淸風)과 증주벽립(曾朱壁立), 청송당유지(聽松堂遺址), 운강대(雲江臺)의 암각글씨가 전하는 김상용, 김상헌 후손의 안동김씨 외척세력이나 송시열, 성수침 조원의 주거지, 기타 정도전, 이이, 이완, 이항복, 권율, 성삼문, 성석린, 맹사성, 박지원, 김옥균, 신광한, 박규수, 서광범, 지석영 등 수많은 인물들의 주거공간이 위치하고 있어 그 일부가 유적으로 확인되며, 유적이 없는 곳은 표석을 설치하였다.

현재 국가유산으로 지정된 주거 · 누정으로 운현궁, 무계정사, 대원군별장, 황학정, 석파정, 탑골공원 팔각정, 오운정, 침류각, 세검정, 이화장, 보신각지, 부암동 윤웅렬대감가, 원서동 백홍범가, 가회동 산업은행관리가, 경운동 민익두가, 명륜동 김종국가, 가회동 백인제가, 안국동 윤보선가, 혜화동 김상협가, 체부동 홍종문가, 김형태 가옥, 박노수 가옥, 이준구 가옥 등이 있다.

조선시대는 유학을 정치이념으로 삼았지만, 민심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삼국시대 이후 전승되어 온 불교세력을 포용하여야 했다. 따라서 불교의 중심기능을 한성에 두고 관장하였으며 그 문화유적이 종로구에 남아 있다. 북한산 구기리 마애석가여래좌상,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상, 안양암 석감마애관음보살상, 조계사 대웅전, 조계사 목석가불좌상, 조계사 대웅전 후불탱화, 원각사지 십층석탑, 창경궁내 팔각칠층석탑, 대원각사비, 장의사지 당간지주 등이 있다.

종로구는 근대에도 서울의 중심지였던 관계로 남아 있는 근대건축물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구대한의원 본관, 구서울대학교 본관, 구공업전습소 본관, 중앙고등학교 본관 · 서관 · 동관, 천도교 중앙대교당, 번사창, 승동교회, 동아일보 사옥 등이 있다.

기타 유적지 · 명승으로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유지, 함춘원지, 탑골공원, 정업원구기, 어정 등이 있다.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국사당의 무신도, 각궁, 인왕산 국사당, 산청 전주최씨 고령댁 상여가 있으며,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유산으로 평창동 보현산신각, 선바위 등이 있다. 국사당의 무신도는 1970년, 각궁은 1976년, 인왕산 국사당은 1973년, 산청 전주최씨 고령댁 상여는 1996년에 전부 국가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으며, 평창동 보현산신각은 1973년, 선바위는 1973년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현, 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천연기념물로 서울 재동 백송(천연기념물, 1962년 지정), 서울 조계사 백송(천연기념물, 1962년 지정), 서울 문묘 은행나무(천연기념물, 1962년 지정), 서울 삼청동 등나무(천연기념물, 1976년 지정), 서울 삼청동 측백나무(천연기념물, 1976년 지정), 창덕궁 향나무(천연기념물, 1968년 지정), 창덕궁 다래나무(천연기념물, 1975년 지정) 등이 있다.

등록유산으로는 서울 계동 배렴 가옥, 서울 배화여자고등학교 생활관, 서울 혜화동성당, 서울 계동 근대 한옥, 서울 원서동 고희동 가옥, 서울 누하동 이상범 가옥과 화실, 창경궁 대온실, 창덕궁 경훈각 삼선관파도, 창덕궁 경훈각 조일선관도, 창덕궁 대조전 백학도, 창덕궁 대조전 봉황도, 창덕궁 희정당 금강산만물초승경도, 창덕궁 희정당 총석정절경도, 서울 평창동 박종화 가옥, 서울 홍지동 이광수 별장 터, 서울 홍파동 홍난파 가옥, 화동 구 경기고등학교 등이 있다. 서울 계동 배렴 가옥은 2004년, 서울 배화여자고등학교 생활관은 2004년, 서울 혜화동성당은 2006년, 서울 계동 근대 한옥은 2006년, 서울 원서동 고희동 가옥은 2004년, 서울 누하동 이상범 가옥과 화실은 2005년, 창경궁 대온실은 2004년, 창덕궁 경훈각 삼선관파도는 2006년, 창덕궁 경훈각 조일선관도는 2006년, 창덕궁 대조전 백학도는 2006년, 창덕궁 대조전 봉황도는 2006년, 창덕궁 희정당 금강산만물초승경도는 2006년, 창덕궁 희정당 총석정절경도는 2006년, 서울 평창동 박종화 가옥은 2004년, 서울 홍지동 이광수 별장 터는 2004년, 서울 홍파동 홍난파 가옥은 2004년, 화동 구 경기고등학교는 2002년에 전부 국가등록문화재(현, 국가등록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국가무형유산으로는 종묘제례악 조선왕조궁중음식, 종묘제례, 석전대제, 사직대제가 있으며, 서울특별시 무형유산으로는 칠장, 붓장, 장안편사놀이, 침선장, 오죽장, 휘몰이잡가, 궁중다례의식 등이 있다. 종묘제례악은 1964년, 조선왕조궁중음식은 1971년, 종묘제례는 1975년, 석전대제는 1986년, 사직대제는 2000년에 국가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로 지정되었으며, 칠장은 1989년, 붓장은 1992년, 장안편사놀이는 2000년, 침선장은 1996년, 오죽장은 1996년, 휘몰이잡가는 1999년, 궁중다례의식은 2001년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현, 무형유산)로 지정되었다.

교육 · 문화

종로구는 조선시대 대학기능을 하였던 성균관이 위치하여 일찍이 교육환경이 조성되었으며, 사부학당 가운데 중학과 동학이 위치하였다. 그리고 관상감 · 전의감 · 도화서 등에서 관련 전공교육을 담당하였다. 여기서 유교덕목을 실천하며 왕조의 행정을 담당하는 관료를 배출하였다. 아울러 교육기관에는 강학공간 외에 제례공간을 설치하여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의 선현을 제향하였다. 이러한 교육적 전통은 근대교육에도 계승되어 최초의 초등학교인 교동 · 재동 · 매동초등학교, 의학교육기관인 경성의학교,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경신학교 · 정신여학교가 위치하였고, 경성중학교 · 제일고등보통학교 등을 비롯하여 엄귀비가 후원하여 설립한 숙명여고 · 진명여고 등과 보성학교 · 중동학교 · 중앙학원 · 배화학교 등 명문 사립학교들이 계속하여 설립되어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다. 한편 최초의 종합대학인 경성제국대학이 낙산 기슭에 위치하였다가 서울대학교가 되어 관악산 기슭으로 이전되었으며, 조선시대 이래 600년 전통을 잇는 성균관대학교와 상명대학교 등 종합대학교가 있다.

교육기관으로 2015년 현재 초등학교 14개교, 중학교 9개교, 고등학교 15개교, 특수학교 4개교, 배화여자대학 · 적십자간호대학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과 치과대학 · 성균관대학교 · 상명대학교 · 가톨릭대학 신학부, 한국방송대학교 등이 있다.

아울러 종로시립도서관, 어린이시립도서관, 정독시립도서관 등 시립도서관이 있고, 관청 · 사회단체 · 기업의 자료실로 국립문화유산연구원 자료실, 생산성본부 자료실, 동아일보 자료실, 총무처 행정자료실, 한국산업은행 자료실, 해운산업연구원 정보자료실, 중앙교육연수원 자료실, 현대건설 자료실이 있다. 또 사회과학도서관, 학산기술도서관, 4·19도서관과 각 대학교 도서관이 운영되어 사회교육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관훈동과 인사동거리 주변은 우리 문화유산이 산재한 유서 깊은 곳이다. 조선 초부터 미술활동의 중심지로서 견지동에는 도화서가 위치하여 회화교육과 관제 그림을 집대성하였으며, 인사동의 탑골공원 터에는 연산군 때 연방원을 설치하여 춤과 음악을 관장하기도 하였다. 원각사는 숭유억불의 정책 속에서도 서울 도심에서 불교문화를 견고하게 지키는 상징적인 공간이 되었고, 3·1독립운동의 발원지가 되기도 하였다. 골동품, 고미술품, 현대화랑, 민속공예품, 도자기, 전통찻집, 필방 등이 들어서 있어 우리 문화를 소개하는 거리 박물관으로도 유명하다.

1985년 서울대학교가 동숭동에서 관악캠퍼스로 이전함에 따라, 그 자리의 보존과 휴식공간의 확충을 목적으로 종로 5가에서 이화동 사거리를 거쳐 혜화동 로터리에 이르는 대학로를 문화예술의 거리, 낭만의 거리로 조성하였다. 그리고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 종묘공원에서의 국악한마당과 창경궁로에서의 국악축제 등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세종문화회관 등 종합공연시설이 위치하여 대한민국 문화예술을 이끌고 있다.

문화시설로는 공연장, 미술관, 전시관, 영화관, 도서관, 박물관 등을 비롯하여, 지역문화예술의 증진을 위해 활동하는 종로문화원과 종로문화의 집 등이 있다.

미술관으로 서울시립미술관이 중구로 이전하고, 전 서울고등학교 자리에 가설 전시관이 남아 있으며, 금호미술관, 서울미술관, 월전미술관, 환기미술관, 선재서울미술관, 성곡미술관, 일민미술관 등과 인사동, 삼청동 일대에 많은 화랑이 분포되어 있다.

박물관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구로 이전하였으나 그 자리에 궁중유물박물관이 들어와 있고, 국립민속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국립서울과학관, 경찰박물관, 체신기념관, 한국통신박물관, 한국교회백주년기념관, 백상기념관, 이승만박사기념관, 한국잡지박물관이 있으며, 대학박물관으로 성균관대학교박물관, 가톨릭대전례박물관, 서울대학교의학박물관, 상명대학교박물관이 있다. 또 서울교육사료관, 한국불교미술박물관, 재동사료관 등이 있다. 문화예술교육연구기관으로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대한출판문화협회, 한국학술진흥재단, 서울기독교청년회관, 중앙문화센터, 한국일보문화센터, 기독교방송종로문화센터가 있다. 그리고 지역문화예술 시상제도로 종로문학상 제도가 운영되고 있으며, 그 외 무형유산 판소리전수소가 있다.

종로구는 한국의 종교 중심지로 민속신앙으로부터 유교, 불교, 천주교, 개신교, 천도교, 관왕신앙, 무속신앙 등 대부분 종교의 총본부가 위치하고 있다. 오늘날 탑골공원 터에는 고려시대 흥복사가 있었고, 세조 때 원각사가 건립되었다. 이는 국가차원에서 숭유억불정책을 추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성부 중심지에서 불교 중심지의 성격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왕조에 의한 불교정책 또한 종로 지역에서 추진되었음을 알 수 있고, 그 전통이 계승되어 조계사 등 현대 한국 불교의 중심이 종로에 위치하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 말기를 전후하여 천도교회당, 개신교의 새문안교회와 승동교회, 종교교회, 연동교회 등 긴 역사를 자랑하는 교회들이 자리하여 종교 중심지로 기능하였다.

전통민간신앙으로 부암동 산제당, 평창동 보현산신각, 선바위 등이 있어 동제당의 역할을 해오고 있는데, 서울의 주산과 좌청룡 우백호로 둘러싸인 종로구에서 그 전통이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다. 그리고 관왕신앙도 민간신앙화되었으며 동묘를 본부로 하고 있다. 아울러 무속의 샤마니즘도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조선시대 나라 만신이라 하여 국무당으로 칭앙되었는데, 고종 때 명성왕후 측근에 있던 이성녀와 엄귀비 측근의 윤성녀라는 무녀는 진령군 · 현령군이라는 칭호까지 하사받았다. 그 전통은 오늘날 제도적으로는 단절되었으나 남산의 목멱신사가 인왕산으로 옮겨와 국사당으로 유지되는 것으로 그 생명력이 살아 있음을 볼 수 있다. 유교의 총본부인 성균관은 명륜동에 위치해 있으며, 오랜 기간 우리 사회의 지도이념을 형성하고 생활종교가 되었다. 성균관은 문묘제례를 비롯한 전국 232개의 향교를 관리하고 있으며, 봄 · 가을로 석전대제를 행한다.

우리나라 최대 불교종단인 조계종의 총본산인 조계사가 위치해 있다. 조계종 종단 소속의 사찰로 조계사, 대각사, 승가사, 문수사, 관음사, 소림사, 청룡사, 묘각사, 안양암 등 17개 사찰이 있으며, 승려 108명에 신도는 약 11만 5천 명에 이른다. 한편 조계종과 더불어 한국 불교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는 태고종의 사찰 또한 종로구 관내에 원각사, 법륜사, 견진사, 삼각사, 정토사 등 25개 사찰에 약 60명의 승려와 약 3만 명의 일반신도가 수행과 교화 및 신앙활동을 하고 있다. 그 외 여러 종파의 사찰이 분포되어 있다.

종로구 지역은 조선 후기 새로운 신앙을 전래한 천주교의 수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09년에는 성베네딕트수도회가 지금의 혜화동 지역인 백동에 진출하여 교육사업을 진행할 수도원을 건립하여 지속적인 발전을 하였다.

개신교는 1884년에 알렌이 파견되어 고종과 명성왕후의 시의가 되어 국립병원 광혜원을 열면서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때 종로구 지역에는 경신학교, 정신여학교 등이 세워져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근대식 교육이 도입되었다. 1894년 황토현 서쪽 신문로1가에 새문안교회를 열었고, 1905년에는 인사동에 승동교회를 열었다. 또 연동교회가 설립되고, 배화여학당과 종교교회가 건립되고, 종로의 개신교에서는 황성기독교청년회를 창립하였다. 오늘날 종로관내는 한국 개신교의 발상지의 전통을 잇는 새문안교회, 연동교회, 동대문교회, 승동교회, 종교교회, 자교교회, 안동교회 등 명문 교회들이 전통과 명성을 자랑하고 있으며, 종로2가에는 기독교청년회의 회관이 있고 연지동에는 기독교회관, 원남동에는 예수교 장로회 여전도회관의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천도교는 그 총본부를 종로구 경운동에 두고 있다.

YMCA스포츠,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 세종문화복지센터, 종로문화의 집, 종로구민회관 등이 있다. 북한산국립공원과 인왕산의 다양한 등산로는 어느 체육시설보다 훌륭하며, 동네 뒷산에 설치한 각종 체육시설은 생활체육공간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아울러 종로구민체육대회, 종로구씨름왕선발대회, 종로구민걷기대회 등이 개최되고 있다.

민속

세시풍속은 일정한 시기에 주기적 · 관습적으로 행해지는 연중행사인데, 주로 명절에 따라 행해진다. 설날의 세배 · 덕담 · 성묘, 정월대보름날의 부럼 · 오곡밥 · 약밥 · 묵은나물먹기와 답교놀이, 한식날의 사초와 성묘, 삼짇날의 답청, 초파일의 연등회, 단오날의 창포에 머리감기, 유두날의 머리감기와 시절식 먹기, 추석의 차례 · 성묘, 시월 시향 제사, 동짓날 팥죽먹기, 그믐날 폭죽과 묵은세배 등이 행해졌다.

종로구의 생활민속은 궁중 풍속과 민간 풍속으로 구별되나, 신분의 다양성으로 여러 모습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재에 전승되고 있는 모습은 지극히 제한된 범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종로의 세시풍속에서 특징적인 것의 일부를 살펴보면, 양반가에서 부녀자가 정초에 세배를 다니는 대신 문안비를 보낸다든가, 농가에서는 폭죽놀이를 하는 대신에 세포(歲砲)를 쏘았고, 관에서는 세수에 나이 70세가 넘으면 조관들에게 쌀과 고기를 하사하는 상치세전(尙齒歲典)이 있었다. 그리고 청계천의 광통교와 수표교 등지에서는 대보름날 다리밟기를 하여 군중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야단법석이었으며, 그 전통은 서울시에 의해 한강 다리밟기로 발전시켜 관련 자치구에서 계승하고 있다.

또 궁궐에서 왕이 궁녀들과 함께 놀이하던 투호놀이가 사대부 집안으로 파급되었다. 투호놀이는 우아하고 여유가 있어 반가에서 주로 놀았으며, 정월과 9월 중양절 그리고 명절날이나 집안 잔칫날에 친척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다. 이 또한 오늘날에 계승되어 명절날 경복궁 등 궁궐을 개방하여 민속놀이를 베풀 때 행해지고 있다. 기타 연날리기, 널뛰기, 윷놀이 등이 계승되고 있다. 초파일날에는 종로거리에 연등을 달아 길을 밝히고 축제를 벌였으며,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여의도에서 조계사까지 행진하는 화려하고 장대한 제등행렬로 발전하였다. 또한 삼청동 일대에서는 석전, 신무문 밖에서는 씨름판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또한 상류층에서는 승경도(陞卿圖)라는 관직도가 그려진 놀이가 성행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정월 대보름에 장사동과 예지동(禮智洞) 주민들과 연싸움을 벌였다고 하며, 관수동 비파정은 정월 대보름에 편싸움을 하던 곳으로 유명하였다.

종로구는 여러 궁궐과 양반 세가들이 거주하던 곳으로 궁중무속이 있었다. 여기서는 왕당을 관장하는 신인 어실당을 부르고, 별군웅 · 산마누라 · 왕신 · 국대부인 · 말명 · 용왕 등을 불러 기원하였다. 그리고 백악산신을 모시는 국가적 의식이 있었다. 민간에서 길흉화복이 이어지면서 현생의 부귀와 저승의 편안함을 기원하는 바램은 각종 굿거리로 남아 전하고 있다. 즉 재수굿, 병굿, 내림굿, 지노귀굿, 대수대명굿, 주당맞이굿, 살풀이굿, 노망굿 등이 있다. 특히 부군당 제의에 유교풍의 제사가 끝나면 굿을 진행하는데 남이장군사당에서는 가망청배, 부정거리, 신장거리, 호구거리, 말명거리, 조상거리, 상산거리, 별상거리, 대감거리, 창부거리, 제석거리, 군웅거리, 황제푸리, 뒷전으로 이어졌다. 이 굿은 부암동산제당, 평창동보현산신각, 선바위 등에서 산신을 받들어 안녕을 기원하기도 하였다.

설화 · 민요

종로구 일대는 한양천도와 정치적 비화 및 관인들의 생활과 관련된 많은 구비전설과 민요, 지명유래 등이 전한다. 조선왕조 500년 건국신화의 성격을 지닌 ‘용비어천가’의 대서사시가 종로지역에서 만들어져, 그 성격이 전설적 인간화로 대체되었다. 한양천도와 도읍지 선정에 관련된 정도전과 무학의 유교와 불교의 주도권 다툼을 전하는 선바위 전설이 있으며, 시조가 인간이 아닌 꽃의 신령의 아들로 태어난 한양조씨의 시조설화, 중종과 신씨 부인의 역사적 일화와 관련된 치마바위전설이 있다. 또한 아들을 기원하는 기자신앙과 관련된 부암동 부침바위 전설과 기자바위 설화, 종묘의 대문 이름인 창엽문(蒼葉門)의 획수가 28획이 되어 조선왕조는 28대로 끝났다는 이야기 등이 전한다.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의 사건과 관련되어 다리에서 일부러 떨어져 후일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는 허침 · 허종 형제의 종침교 돌다리설화, 인왕산 호랑이와 효자설화가 전하는 인왕산 범바위, 채제민이라는 청년과 채제공 대감과의 미담을 담은 돈의동 지명유래, 육상궁의 우물과 관련된 궁정동 지명유래 등 다양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이외에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명나라 군인들에 의해 모셔지고, 급기야 조정에서 국가적으로 후원한 관우묘 이야기와 나아가 명성황후의 미래를 예견한 공으로 북묘가 건립되어 무당이 권세를 부렸던 이야기가 종로의 특이한 설화로 전해지고 있다.

민요는 서민의 생활과 정서를 담고 있는 것이나, 종로는 일찍이 도읍의 중심지가 되어 노동요보다는 유흥민요가 발달하였으며, 특히 정치와 관련하여 참요가 발달하였다.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관계를 예언하였다는 미나리요, 고종의 총애를 받던 기생 도화와 엄비의 관계를 풍자하였다는 도화타령, 병인양요 때 전쟁을 예언한 매화타령, 러일전쟁을 예언한 나비참요 등이 있었다. 한편 선소리꾼에 의해 전파된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공사와 관련하여 경복궁타령이 불려졌고, 시대 변화를 엿볼 수 있는 한강수타령이 있었다. 이 외에도 실타령, 건드렁타령이 불렸으며, 기타 부녀자들이 부르는 부요로 시집살이노래, 베틀노래, 빨래노래와 동요로 술래잡기노래, 두꺼비집만들기노래 등이 있었다. 그리고 서울의 공장인들에 의해 발달한 긴 잡가, 휘모리잡가 등 잡가가 발달하기도 하였다.

산업 · 교통

종로구의 상주인구는 상업과 업무용 지역 확장으로 감소 추세에 있으며, 주간활동 인구는 200만여 명 내외이고, 호적인구는 140만여 명 내외로 주민등록인구 약 19만 명에 비해 월등히 높은 편이다. 이러한 인구분포로 현재 율곡로 이남은 상업지구, 율곡로 북쪽은 주거지구, 서부는 관공서 · 경제 · 언론지구로 대별된다. 의류 · 식품 · 제분 · 과자 · 약품 · 전자기기부품 · 공구 · 양복 등의 소규모 공장들이 시가지 전역에 분포하는 도시공업이 발달한 곳이다. 또한 상업의 중심지역을 형성해 도산매상(都散賣商) 등 동일 업종의 상점이 밀집하는 경향을 나타내는 것이 특징이다. 즉 인사동 · 견지동의 골동 · 표구 · 화랑, 익선동과 종로3가의 자동차부품상, 청계로의 전자제품과 공구상, 종로4·5가의 약품, 남대문로의 양복상, 동대문 부근의 농약 · 종묘상, 광화문 부근의 양화상(洋靴商) 등이 그 예이다. 자하문(창의문) 밖의 화초 · 과수재배와 이곳의 명물이었던 한지(韓紙) · 메주제조업은 도시화에 밀려 자취를 감추었다.

한편 조선시대 육의전으로 대표되는 시전이 위치함으로써 조선왕조 경제생활의 중심지를 형성하였다. 또한 종로구는 궁궐 · 관아와 시전이 배치된 시가지가 형성되어 양반관료, 하급관인, 시전상인, 공장, 노복 등이 혼재하면서, 서로 다른 신분을 의식한 생활양태가 연출되었다. 이에 따라 뒷골목 문화가 형성되었다. 왕을 비롯한 고위 관인들이 대로로 통행하는데 비해, 낮은 신분의 사람들은 이를 의도적으로 피하여 뒷골목에 피마골이 형성되었고, 여기에 목로주점과 장국밥집 나아가 각종 유흥 음식점이 상호 필요에 의해 자리하게 되어 마치 자연 생태계의 먹이사슬처럼 얽혀져 독특한 생활문화를 형성하였다.

한편 강남개발로 종로구의 도시 기능이 분산되면서 경제권 또한 쇠퇴하였다. 그러나 화신백화점과 신신백화점의 전통을 계승하여 많은 기업의 본사가 많이 분포되어 있다. 즉 강원산업, 고려합섬, 고려상사, 금호석유화학, 남한제지, 대림산업, 대림통상, 대성산업, 대상탄좌개발, 대원제지공업, 동양시멘트, 보령제약, 삼양사, 삼양식품, 삼환기업, 성신양회공업, 신성무역, 연합철강공업, 현대건설, 현대자동차, 현대정공, 현대종합상사 등 상장기업이 위치하여 아직도 우리나라 산업의 중추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금융업, 대형서점과 광장시장 · 동대문종합상가 · 종로세운상가 등 대형 상권을 형성하고 있다.

종로구는 조선시대부터 궁궐에서 4대문에 이르는 대로와 4소문에 이르는 중로가 잘 발달되어 있고, 뒷골목 생활문화가 정착했듯이 소로 또한 잘 나 있어 교통이 편리한 곳이었다. 종로를 따라 서대문에서 청량리까지 전차가 통행하는 등 서울의 중심가로로 운행되었다. 현재 또한 서울 도심에 있기 때문에 교통량이 가장 많은 복잡하며 편리한 곳이다. 종로 · 율곡로 · 세종로와 종로5가를 지나는 1호 국도 등이 종로구 도로교통의 간선을 이루고, 북악터널을 지나는 세검정길 등도 교통 소통에 큰 몫을 하며, 지하철 1호선이 종로를 통과하는 외에 3·4·5호선이 종로3가와 동대문에서 교차함으로써 시내 교통의 소통이 더욱 원활해졌다. 이러한 교통로는 빌딩과 빌딩, 상가와 상가, 기관과 기관, 학교와 학교를 사통팔달로 연계하여 경제유통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종로구의 도로 구조는 궁궐을 중심으로 도성 내 수계에 따라 형성된 도로망으로 폭 56척의 대로가 오늘날 세종로 · 종로 · 남대문로 · 신문로로 정착되었다. 여기서 도성의 4대문과 4소문으로 이어지는 전국 도로망이 하나로 모이고 있어 인구와 문화의 중심 집산지로서 기능하였다. 지금도 한성부 중심표석이 인사동 하나로 빌딩 옆에 있으며, 조선시대 도로의 중심은 창덕궁 돈화문이었고, 일제강점기 이래 현재는 광화문네거리가 되고 있다. 그리고 종로사거리는 시전거리의 중심으로 광장 구실을 하였는데, 인원 동원이 필요한 국가적 행사나 집회 및 국가의 조칙을 공고하는 장소가 되기도 하였고, 척화비와 인정과 파루를 알리는 종루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지금도 제야의 종을 칠 때면 그때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다.

그 외 간선도로로 왕산로, 율곡로, 사직로, 효자로, 자하문로, 우정국로, 창경궁로, 대학로, 동소문로, 진흥로, 내자동길, 돈화문로, 삼봉길, 인왕산길, 북악길, 우암길 등이 있다.

종로구 중심가를 지나는 종로에는 지하철 1호선이 지난다. 1971년 4월 12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기공식을 한 후 1974년 6월 30일 완공하고 8월 15일 개통식을 하였다. 구간 중 시청역종각종로3가종로5가동대문신설동 구간의 48공구가 종로구 지역이었다. 이어 2호선 공사를 착수하였으나 도심의 인구를 수송하는데 한계가 있는 것으로 인식되어 3·4호선의 건설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따라서 1980년 2월에 3·4호선의 기공식이 있었고, 1985년 10월 18일 완공되었다. 3호선의 318321공구가 종로지역이었으며, 무악재독립문경복궁안국종로3가을지로3가 구간이었다, 4호선은 411412공구가 종로지역이었으며 혜화동대문충무로 구간이었다. 그리고 지하철 5호선이 1990년 기공되어 1994년 완공되었는데, 종로구간은 동대문운동장종로3가광화문서대문 구간이었다. 또 지하철 6호선의 동묘앞역과 창신역이 종로구에 있다.

관광

선사시대 이래 역사의 무대였으며, 백제의 한성시대와 삼국의 쟁패지, 고려의 남경으로 경영되었던 종로구는 특히 조선왕조 이후 600년의 수도가 위치하였던 곳으로 한국의 문화유산이 집중되어 있고, 문화예술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관광자원 또한 집중되어 있다. 고궁과 성곽 등 많은 사적지가 있고 시전 등 서민의 생활터전 등에 이르기까지 발이 닿는 곳마다 문화유적이니 한국 최대 관광자원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도시 시설과 삼각산, 인왕산 · 백악산의 빼어난 자연경관은 세계적으로도 이름난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다.

북악산은 도시 자연공원으로 서울의 주산이 되어 그 남쪽 기슭에 경복궁을 비롯한 중요 궁궐과 도시 시설을 안주시킨 명산이다. 그 전통은 현재까지 이어져 청와대가 위치하고 있으며, 서울성곽이 지나고 삼청공원, 세검정계곡을 품고 있으면서 백석동천 · 청송당유지 · 운강대 · 창의문 등 빼어난 자연경관과 역사유적은 천하제일복지로서의 지위를 한층 뽐내고 있다. 또 북악스카이웨이가 산 중턱을 통과하며 팔각정에서는 주변 경관과 서울 전경을 바라볼 수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인왕산은 서울의 우백호에 해당하는 산으로 소나무 숲과 육중한 바위를 자랑하고 있다. 백운동계곡과 청풍계곡을 비롯한 송석원의 맑은 물과 깨끗한 바위로 이름 높던 명승지는 비록 주택가로 변하였지만 비온 뒤 개인 인왕산의 전경은 우리나라 진경산수화의 대표적인 경승이 되었다. 기기묘묘한 바위와 만백성의 풍요와 평온함을 빌던 사직단 무계정사, 석파정, 국사당 등 다양한 관광자원을 간직하고 있다.

종로구는 종묘를 비롯한 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경희궁 등 조선왕조의 국가를 상징하는 유적들이 현존하며, 나아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궁궐 등을 구성하고 있는 전각과 석조물 등 우리의 문화유산을 대표하는 유물들 또한 제 위치에 배치되어 있어, 대한민국을 알고자 하는 외국인이 필수적으로 방문하는 관광자원이 되고 있다. 이들은 서울 도심에서 가까운 거리로 교통편도 편리하여 언제라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도 갖추고 있다.

북한산국립공원 1983년 4월 우리나라에서 15번째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도봉산과 북한산 전역을 포함하여 총 78.45㎢이다. 삼각산이라고 불리던 북한산은 북한산성으로 유명하다. 최고봉인 백운대를 정점으로 남북으로 길게 뻗어 북으로 상장봉, 남으로 보현봉에 이르며, 이곳에서 서쪽으로 형제봉 줄기는 북악산을 이루고, 문수봉으로 이어진 줄기는 비봉과 탕춘대 능선을 이루며 종로구를 에워싸고 있다. 이들 33개 봉우리와 정릉계곡, 삼천사계곡, 평창계곡, 구기계곡 등에서 흐르는 물줄기는 중랑천, 창릉천, 불광천, 홍제천 등을 이루어 한강으로 유입된다. 구기동 들머리, 평창동 들머리 등 도심에서 종로지역을 지나 산에 오르는 길목에는 북악파크호텔 · 올림피아호텔 · 킴스호텔 · 자하문호텔 등 크고 작은 숙박시설이 있어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다. 도심에도 뉴내자호텔, 서울관광호텔, YMCA관광호텔, 서린호텔, 센츄럴호텔 등이 있다.

관훈동 · 인사동거리 주변은 우리 문화유산이 산재한 유서 깊은 곳으로 골동품, 고미술품, 현대화랑, 민속공예품, 도자기, 전통찻집, 필방 등이 들어서 있어 우리 문화를 소개하는 거리 박물관으로도 유명하며, 문화의 거리로 조성되어 서울을 방문한 외국인이 필수적으로 관광하는 코스가 되어 있다. 또 서울대학교가 동숭동에서 관악캠퍼스로 이전함에 따라, 그 자리의 보존과 휴식공간의 확충을 목적으로 종로 5가에서 이화동 네거리를 거쳐 혜화동 로터리에 이르는 대학로가 문화예술의 거리, 낭만의 거리로 조성되어 젊은이의 광장이 되면서 연극 문예 공간이 되었다. 따라서 국가유산 탐방, 전통문화의 거리 탐방, 궁궐 탐방, 세검정길 탐방, 우리 얼 탐방, 대한제국 역사탐방, 고궁길 탐방, 왕궁길 탐방, 북촌길 탐방, 인사동 탐방, 젊음의 거리 탐방 등 여러 관광코스가 개발되어 있다.

또한 관광쇼핑지역으로 인사동 전통문화의 거리 일대, 부암동 외국인전용 남산관광쇼핑센터, 피맛골 식당가, 젊음의 거리 대학로, 외국여행자를 위한 동화면세점, 종로3∼4가 귀금속거리, 관철동 주단포목상가와 공구상가, 견지동 조계사 일대 불교용품 전문거리, 교보문고 · 영풍문고 등의 대형서점가가 있기도 하다.

종로구의 예술 및 축제행사로 다음과 같은 행사가 있다. 종묘공원 국악정에서 열리는 3·1절 기념행사, 단군성전에서 열리는 개천절 대제전과 어천절 제전, 인사동길에서 개최되는 인사동 전통문화축제, 종묘에서 열리는 종묘대제, 탑골공원에서 열리는 광복절기념행사에서의 탑골국악축제, 인사동 문화장터, 사직공원 황학정에서 열리는 장안편사대중회, 돈화문로에서 열리는 국악인 국악로대축제, 사직단에서 열리는 사직대제, 종로 전국국악경연대회 등이 있다.

그리고 지역문화예술단체로 종묘제례보존회, 인사동보존회, 택견계승회, 서울시립교향악단, 황학정, 국악로문화보존회, 북촌가꾸기회, 모던 팝스 오케스트라 등이 있다.

동(洞)
  1. 수송동(壽松洞)

구의 중앙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송현동(松峴洞), 동쪽은 견지동(堅志洞), 남쪽은 청운동(淸雲洞), 서쪽으로는 세종로동 · 중학동(中學洞)과 접해 있다. 동명은 옛 지명인 수동과 송현의 머리글자를 합성한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관광방(觀光坊)과 중부 수진방(壽進坊) · 징청방(澄淸坊)에 속하였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되었을 때는 중학동 · 송현동 · 수동 · 박동 · 괴정동 · 사복동 등이 수송동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1914년 4월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위 동의 각 일부를 통합하여 수송동이 되었다가, 1936년 수송정이 되었다. 1943년 4월 구제 실시로 신설된 종로구에 속하였으며, 1946년 수송동이 되었다.

조선시대 제용감 · 사복시 · 사포서 등의 관아와 제안대군의 수진궁, 명종의 아들 순회세자의 거처였던 용동궁(龍洞宮), 정도전 집터, 각황사(覺皇寺) 등이 있었으며, 수송동과 조계사 사이에 박석고개가 있어 일대를 박동이라 하였다. 종로구청 · 종로구의회 · 종로소방서 등이 있고, 목은선생영당, 숙명여고터, 보성사터 등이 있는 수송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1. 청운동(淸雲洞)

구의 서쪽에 있는 동이다. 북악산 서남쪽 기슭에 있으며, 동쪽은 세종로 · 삼청동, 서쪽과 북쪽은 부암동, 남쪽은 옥인동 · 신교동 · 궁정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인왕산 청풍계(淸風溪)라는 계곡과 백악산 백운동(白雲洞) 계곡의 머리글자를 합성한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순화방(順化坊) 지역이었으며, 1914년 경성부 북부 백운동 · 청풍동 · 박정동 · 신교의 각 일부를 합쳐 청운동이라고 하였고, 1936년 청운정이 되었다. 1943년 종로구에 편입되었고, 1946년 청운동이 되었다. 청운동은 행정동 이름과 같으며, 법정동인 청운동 · 신교동 · 궁정동 · 세종로 1번지를 관할하고 있다.

청운동은 청와대와 경복궁 지역을 포함하고 있으며, 창의문길과 자하문터널이 지나는 자하문길이 도성 밖으로 이어지고 있다. 경복고등학교, 경기상업고등학고, 청운중학교, 청운초등학교 등이 자리하여 일찍이 근대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다. 세검정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서울성곽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원형이 남아 있는 창의문이 있다.

  1. 신교동(新橋洞)

구의 서쪽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청운동, 동쪽은 궁정동, 남쪽과 서쪽으로는 옥인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19세기 중엽 선희궁 동쪽에 새 다리(신교)가 놓여진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순화방(順化坊) 지역이었으며, 1914년 신교동이 되었다. 1936년 신교정이 되었으며, 1943년 구제 실시로 종로구에 속하였다가 1946년 신교동이 되었다. 특수학교인 서울맹학교와 서울선희학교가 있는데, 학교 안에 있는 선희궁지가 있다. 선희궁은 폐지된 후에 제생원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1. 궁정동(宮井洞)

구의 서쪽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청운동, 동쪽은 세종로, 남쪽은 효자동, 서쪽은 신교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육상궁과 온정동의 이름을 합성한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순화방(順化坊)에 속하였으며, 1914년 북부 순화방 육상궁동, 동곡, 온정동, 신교동, 박정동 등의 각 일부를 통합하여 궁정동이 되었다. 1936년 궁정정이 되었다가, 1943년 구제 실시로 종로구에 속하였고, 1946년 궁정동이 되었다.

옛 지명인 팔도배미는 임금이 직접 농사를 짓던 곳인데 현재는 주택가가 되었다. 청운동사무소와 로마교황청대사관이 있다. 육상궁은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淑嬪崔氏)의 사당으로 연호궁 · 덕안궁 · 경우궁 · 선희궁 · 대빈궁 · 저경궁과 더불어 칠궁(七宮)이라고 한다. 그 앞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저격당했던 곳으로 1993년 무궁화동산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1. 세종로(世宗路)

구의 중앙에 있는 동으로 동의 중앙을 관통하는 도로인 세종로의 동 · 서쪽 연변과 경복궁 · 청와대를 포함한 지역으로, 동쪽은 종로 1가 · 청진동 · 수송동 · 사간동 · 소격동 · 팔판동 · 삼청동, 서쪽은 당주동 · 도렴동 · 적선동 · 통의동 · 창성동 · 효자동 · 궁정동 · 청운동, 북쪽은 삼청동, 남쪽은 태평로1가와 접해 있다. 동명은 우리나라 정치 · 행정의 중심지인 것과 관련하여 조선시대 제왕인 세종의 묘호를 따서 붙인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북부 관광방, 서부 적선방 · 여경방, 중부 징청방 · 서린방 일원이었다. 1910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7호에 의해 한성부에서 경성부로 바뀌었고, 1914년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앞에 있는 동이라는 뜻에서 광화문통(光化門通)이라 하였다. 1943년 구제 실시로 종로구가 신설되면서 경성부 종로구 광화문통이 되었다가, 1946년 세종로가 되었다.

한편 세종로는 광화문에서 광화문사거리에 이르는 길 이름이기도 하며, 조선시대의 주작대로인 육조거리를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즉 세종로는 길이 600m, 너비 100m의 수도 서울과 한국의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를 상징하는 중심도로이다. 왕복 16차선으로 일반국도 제48호선으로 남쪽으로 태평로와 이어지고 새문안길 · 종로 · 사직로 · 율곡로와 교차한다. 도로 가운데를 지하철 5호선이 가로지르고 3호선과 1호선이 가까이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세종로에는 광화문 · 경복궁 · 국립민속박물관이 자리하고, 도로 양옆에는 정부서울청사 · 세종로공원 · 세종문화회관 · 광화문 시민열린마당 · 미국대사관 · 교보빌딩 등이 있다.

  1. 효자동(孝子洞)

구의 서쪽에 있는 동이다. 동쪽은 세종로(경복궁), 서쪽은 옥인동, 남쪽은 창성동, 북쪽은 궁정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효자로 이름난 조선 중기의 문신 조원의 아들로 임진왜란 때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희정 · 희철 형제가 살았던 곳인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순화방(順化坊) 지역이었으며, 1914년에는 경성부 북부 효곡 · 백구동 · 동곡 · 육상궁동 · 장동 · 온정동 · 신교의 각 일부를 합쳐 효자동이라고 하였고, 1936년 경성부 효자정이 되었다. 1943년 구제 실시로 종로구에 속하였고, 1946년 효자동이 되었다. 효자동은 행정동과 이름이 같으며 법정동인 효자동 · 창성동 · 통인동 · 누상동 · 누하동 · 옥인동을 관할하고 있다.

경복궁 가까이에 있으므로 환관(宦官)들의 집단거주지였으며, 일제 때 지금의 효자로에 원효로와 총독부 관사가 있던 효자동을 잇는 전차노선이 개설되어 있었다.

  1. 창성동(昌成洞)

구의 서쪽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청운동, 동쪽은 세종로(경복궁), 남쪽은 통의동, 서쪽은 통인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조선시대 창성동이라 불린 데서 계승된 것이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순화방(順化坊) 사재감계(司宰監契)에 속하였다. 1914년 경성부 북부 옥정동 · 간곡 · 창성동 · 대동 · 장동 · 백구동 등의 각 일부가 통합되어 창성동이 되었다. 1936년 창성정이 되었으며, 1943년 구제 실시로 종로구에 속하였다가, 1946년 창성동이 되었다.

정부기록보존소 서울사무소가 있는데, 이곳은 체신관리양성소 · 국민대학교 · 문화재관리국(현, 국가유산청)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또 1906년 엄귀비의 후원으로 설립된 진명여학교가 있다가 1989년 양천구 목동으로 이전되었다. 국제연합아동기금 한국위원회(유니세프)가 있다.

  1. 통인동(通仁洞)

구의 서쪽에 있는 동으로 동쪽은 창성동 · 통의동, 남쪽은 체부동, 서쪽은 누하동, 북쪽은 옥인동(玉仁洞)과 접해 있다. 동명은 한성부 북부 준수방 통곡(通谷)과 인왕산의 머리글자를 합성한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준수방(俊秀坊)에 속하였고, 1914년 경성부 북부의 통곡, 사포동 · 옥동(玉洞) 등의 각 일부가 통합되어 통인동이 되었다가, 1936년 통인정이 되었다. 1943년 구제(區制) 실시로 종로구에 속하였다가, 1946년 통인동이 되었다.

조선시대의 관아인 내시부 · 사포서가 있었는데, 사포서는 수진방(수송동)으로 이전하였다. 137번지 일대는 세종의 탄생지이고, 154번지는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상(李箱)이 살았던 곳이다.

  1. 누상동(樓上洞)

구의 서쪽 끝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옥인동, 동쪽은 누하동, 남쪽은 필운동 · 사직동 · 무악동, 서쪽은 서대문구 홍제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광해군 때 조성한 인경궁(仁慶宮)의 누각 위에 있었던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순화방(順化坊)에 속하였고, 1914년 누각동 일부가 누상동이 되었으며, 1936년 누상정이 되었다. 1943년 구제 실시에 따라 종로구에 속하였다가 1946년 누상동이 되었다.

서쪽의 인왕산 능선을 따라 서울성곽이 축조되어 있으며, 일대 곡성(曲城)에 는 부처바위 · 범바위 등이 있다. 동명의 유래가 된 인경궁은 필운동 · 누하동 · 옥인동 일대에 건립되었는데, 인조반정으로 중단하였다가 1692년(인조 11)에 일부를 철거하여 창경궁 건립에 사용하였다. 활터인 백호정(白虎亭)과 제갈량을 모시던 사당인 와룡당 등이 있었다.

  1. 누하동(樓下洞)

구의 서쪽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옥인동, 동쪽은 통인동 · 체부동, 남쪽은 필운동, 서쪽은 누상동과 접해 있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순화방(順化坊)에 속하였고, 1985년 갑오개혁에 따라 북서 순화방 상패계의 누각동 일부와 남척동, 유목동, 장성동, 복정동, 오거리, 송목동 등이 누하동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1914년 누각동 아래 일부를 통합하여 누하동이 되었으며, 1936년 누하정이 되었다. 1943년 구제 실시에 따라 종로구에 속하였다가 1946년 누하동이 되었다. 동명의 유래가 된 인경궁은 필운동 · 누하동 · 옥인동 일대에 건립되었는데, 인조반정으로 중단하였다가 1692년(인조 11)에 일부를 철거하여 창경궁 건립에 사용하였다. 효령대군과 안평대군이 살던 곳이다.

  1. 옥인동(玉仁洞)

구의 서쪽 끝에 있는 동으로 동쪽은 효자동, 남쪽은 통인동 · 누상동 · 누하동, 서쪽은 서대문구 홍제동, 북쪽은 부암동 · 청운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자연마을인 옥동(玉洞)과 인왕동(仁王洞)의 머리글자를 합성한 데서 유래되었다. 즉 인왕산에서 흐르는 옥류에서 연유된 이름이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준수방(俊秀坊) 구사포서계(舊司圃署契)에 인왕동과 옥동이 속하였다. 1914년 옥인동이 되었으며, 1936년 옥인정이 되었다. 1943년 구제 실시로 종로구에 속하였다가, 1946년 옥인동이 되었다.

옥인동 · 필운동 · 누하동 · 누상동 일대를 포함한 지역에 인경궁(仁慶宮)과 송석원(松石園) · 자수궁 등이 있었는데, 인경궁은 광해군 때 건립되다가, 인조반정으로 중단되었는데 1692년(인조 11)에 일부를 철거하여 창경궁 건립에 사용하였다. 나머지 전각들은 효종 때까지 있다가 숙종과 영조 때 없어지고 민가들이 들어섰다.

효자동사무소 자리는 전염병 격리시설인 순화원(順化院)이 있었으며, 대한제국 때 문신이자 친일파인 윤덕영(尹德榮)의 별장이 크게 건립되었고, 8·15광복 직후 미군의 숙소로 사용되다가, 6·25전쟁 후에는 유엔군 숙소로 이용되었다. 이후 시립 중부병원이 되었다. 1977년에 중부병원이 폐지된 뒤 지금은 동사무소와 아파트가 들어섰다.

  1. 사직동(社稷洞)

구의 서쪽에 있는 동이다. 동쪽은 필운동 · 내자동 · 내수동, 서쪽은 행촌동 · 무악동, 남쪽은 송월동 · 신문로 2가, 북쪽은 필운동 · 누상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조선시대에 설치된 사직단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 인달방(仁達坊)에 속하였다. 1914년 창평동 · 무덕문 · 사직동 · 박정동의 각 일부를 합쳐 사직동이 되었고, 1936년 사직정이 되었다. 1943년 구제 실시로 종로구에 속하였다가, 1946년 사직동이 되었다. 효자동은 행정동과 이름이 같으며 법정동인 사직동 · 체부동 · 필운동 · 내자동 · 통의동 · 적선동 · 도염동 · 당주동 · 내수동 · 세종로 · 신문로1·2가를 관할하고 있다.

  1. 체부동(體府洞)

구의 서쪽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통인동, 동쪽은 통의동, 남쪽은 내자동, 서쪽은 필운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체찰사부 또는 체부청이라 하던 관아가 있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순화방(順化坊) 사재감계(司宰監契)에 속하였다, 갑오개혁 때 한성부 북서 순화방 하패계(下牌契) 구곡동 · 체부동 · 누각동 등 지역이었다. 1914년 체부동이 되었다가, 1936년 체부정이 되었다. 1943년 구제 실시로 종로구에 속하였다가, 1946년 체부동이 되었다. 청계천 상류 물줄기가 흐른 곳에 금천교(禁川橋)가 있었는데, 지금은 십자로에 묻혀 있다.

  1. 필운동(弼雲洞)

구의 서쪽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누상동 · 누하동, 동쪽은 체부동 · 내자동, 남쪽과 서쪽은 사직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인왕산의 별칭인 필운산과 그 아래 이항복이 집터를 마련한 필운대(弼雲臺)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 인달방(仁達坊)에 속하였으며, 1914년 도가동, 사직동, 송목동, 전정동, 필운대, 구동, 대구도가동 등이 통합되어 필운동이 되었다. 1936년 필운정이 되었다가, 1943년 구제 실시로 종로구에 속하였으며, 1946년 필운동이 되었다.

필운동을 비롯하여 옥인동 · 누하동 · 누상동 일대를 포함한 지역에 인경궁(仁慶宮)이 있었는데, 인경궁은 광해군 때 건립되다가, 인조반정으로 중단되었는데 1692년(인조 11)에 일부를 철거하여 창경궁 건립에 사용하였다. 나머지 전각들은 효종 때까지 있다가 숙종과 영조 때 없어지고 민가들이 들어섰다.

  1. 내자동(內資洞)

구의 서쪽에 있는 동으로 동쪽은 적선동, 남쪽은 내수동, 서쪽은 필운동, 북쪽은 체부동(體府洞)과 접해 있다. 동명은 조선시대 궁중에서 쓰는 여러 식품과 직조 및 궁중 잔치를 맡아 보던 관아인 내자시(內資寺)가 있었던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 인달방(仁達坊) 지역이었으며, 1914년 전립동, 고윤동, 창염동, 은행동, 남정현, 장흥고동, 종교 등을 통합하여 내자동이 되었으며, 1936년 내자정이 되었다. 1943년 구제 실시로 종로구에 속하였다가 1946년 내자동이 되었다.

조선시대 장흥고(長興庫)와 종침교(琮沈橋)가 있었으며, 효종의 출생지인 어의궁이 있던 자리에는 현재 서울지방경찰청이 들어서 있다.

  1. 통의동(通義洞)

구의 서쪽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창성동, 동쪽은 세종로(경복궁), 남쪽은 적선동, 서쪽은 통인동 · 체부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조선시대 이곳이 한성부 북부 의통방이었다가 갑오개혁 때 통의방으로 바뀐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조선 초기에 한성부 북부 순화방(順化坊)이었다가, 1751년(영조 27)에 한성부 북부 순화방 사재감계(司宰監契)와 의통방(義通坊) 영추문계(迎秋門契)에 속하였다. 1914년 서문동, 대동, 장동, 매동 등이 통합되어 통의동이 되었으며 1936년 통의정이 되었다. 1943년 구제 실시로 종로구에 속하였다가, 1946년 통의동이 되었다.

35번지는 영조의 잠저인 창의궁(彰義宮)이 있던 곳으로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설립됨에 따라 폐궁이 되었고, 8·15광복 이후 귀속재산으로 접수 · 분할된 이후 주택이 들어섰다. 7번지는 관상감(觀象監)과 사재감(司宰監)이 있던 곳으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효자로와 자하문길이 지나며,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이 있다.

  1. 적선동(積善洞)

구의 서남쪽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통의동, 동쪽은 세종로, 남쪽은 도렴동, 서쪽은 내자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이곳이 조선시대 서부 적선방이었던 데서 유래되었는데,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란 말에서 연유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인달방(仁達坊)과 적선방에 속하였으며, 1914년 어교, 월궁동, 십자교, 사온동, 장흥고동, 종교 등의 각 일부가 통합되어 적선동이 되었다. 1936년 적선정이 되었다가, 1943년 구제 실시로 종로구에 속하였으며, 1946년 적선동이 되었다.

조선시대 궁중에 술과 감주를 공급하던 관아인 사온서가 있었고,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이자 영조의 부마인 월성위 김한신(金漢藎)이 살았다. 현대소설가 염상섭(廉想涉)의 출생지이다. 1973년 도심으로서의 공공기능 확보와 불량주거건물 개선을 위하여 재개발되었으며,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 파나마대사관, 한국생산성본부, 적선현대빌딩 등이 있다.

  1. 삼청동(三淸洞)

구의 중앙 북쪽에 있는 동이다. 동쪽은 명륜동, 서쪽은 청운동 · 부암동, 남쪽은 세종로동 · 팔판동 · 화동 · 가회동, 북쪽은 성북구 성북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조선시대 이곳에 도교의 태청(太淸) · 상청(上淸) · 옥청(玉淸)의 삼청전(三淸殿)이 있었던 데서 유래되었다. 또 산과 물이 맑고, 인심 또한 맑고 좋다고 하여 삼청(三淸)이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진장방(鎭長坊)에 속하였으며, 1914년 삼청동이 되었다가, 1936년 삼청정이 되었다. 1943년 구제 실시로 종로구에 속하였고, 1946년 삼청동이 되었다. 삼청동은 행정동과 이름이 같으며 법정동인 삼청동 · 팔판동 · 안국동 · 소격동 · 화동 · 사간동 · 송현동을 관할하고 있다.

  1. 팔판동(八判洞)

구의 중앙에 있는 동으로 북쪽과 북동쪽으로는 삼청동, 남동쪽으로는 화동, 남쪽은 소격동, 서쪽은 청운동 · 세종로와 접해 있다. 동명은 조선시대 이곳에 8명의 판서가 살았던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진장방(鎭長坊)에 속하였으며, 1914년 팔판동이 되었으며, 1936년 팔판정이 되었다. 1943년 구제 실시로 종로구에 속하였다가, 팔판동이 되었다.

  1. 안국동(安國洞)

구의 중앙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화동, 동쪽은 재동, 남쪽은 경운동 · 관훈동, 서쪽은 송현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조선시대 이 일대가 안국방(安國坊)이었던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안국방과 가회방(嘉會坊)에 속하였으며, 1914년 소안동 · 홍현 · 안현 · 재동의 각 일부를 통합하여 안국동이 되었다. 1936년 안국정이 되었으며, 1943년 구제 실시로 종로구에 속하였고, 1946년 안국동이 되었다.

유적으로 감고당(感古堂) 터, 한성은행 터, 안동별궁 터가 있다. 1903년에 설립된 안동교회, 한국불교의 선맥을 이은 선학원과 안국선원이 있으며, 덕성여자고등학교 · 풍문여자고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1. 소격동(昭格洞)

구의 중앙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팔판동, 동쪽은 화동, 남쪽은 송현동 · 사간동, 서쪽은 세종로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조선시대 도교를 관장하던 소격서가 있었던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관광방(觀光坊)과 진장방(鎭長坊)에 속하였으며, 1914년 소격동 · 화개동 · 대안동의 일부를 통합하여 소격동이 되었다. 1936년 소격정이 되었으며, 1943년 구제 실시로 종로구에 속하였다가, 1946년 소격동이 되었다.

조선시대 소격서 · 규장각 · 종친부 등이 있었으며,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을 확인한 국군수도지구병원이 있다. 1980년에 지정된 전통가옥 보존지구가 1990년 초에 북촌가꾸기사업으로 그 모습을 보존하고자 하였다. 대우에서 운영하는 아트선재센터가 있다.

  1. 화동(花洞)

구의 중앙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삼청동, 북서쪽은 팔판동, 동쪽은 가회동, 남서쪽은 소격동, 남쪽은 안국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조선시대 화초를 관장하던 관아인 장원서(掌苑署)가 있던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가회방(嘉會坊), 안국방(安國坊), 관광방(觀光坊) 등에 속해 있었으며, 1914년 동곡 · 홍현 · 소안동의 일부를 통합하여 화동이 되었다. 1936년 화정이 되었다가, 1943년 구제 실시로 종로구에 속하였고, 1946년 화동이 되었다. 성삼문(成三問)이 살던 곳으로 성선생터, 김옥균(金玉均)이 살던 곳으로 김옥균터, 앞 계류의 작은 다리인 장원서교(掌苑署橋) 등이 있었으며, 현재 서울특별시립정독도서관이 있는 곳은 옛 경기고등학교 자리이다.

  1. 사간동(司諫洞)

구의 중앙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소격동, 동쪽은 송현동, 남쪽은 중학동, 서쪽은 세종로(경복궁)와 접해 있다. 동명은 조선시대 사간원(司諫院)이 있었던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관광방(觀光坊)에 속하였으며, 1914년 벽동과 간동을 합하여 사간동이 되었다가, 1936년 간정(諫町)이 되었다. 1943년 구제 실시로 종로구에 속하였다가 1946년 사간동이 되었다. 종로구문화원 · 법륜사 · 금호미술관 · 출판문화회관 등이 있고, 중학천길 아래로 흐르는 삼청동천(중학천)에 십자각교가 있었다.

  1. 송현동(松峴洞)

구의 중앙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소격동, 동쪽은 안국동, 남쪽은 중학동 · 수송동, 서쪽으로는 사간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소나무가 무성한 솔고개가 있었던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관광방(觀光坊)에 속했으며, 1914년 송현, 벽동 일부와 고리정동을 합하여 송현동이 되었다. 1936년 송현정이 되었으며, 1943년 구제 실시로 종로구에 속하였다가, 1946년 송현동이 되었다. 덕성여자중학교 · 백상기념관이 있으며, 미국대사관직원 숙소가 있었는데, 용산으로 이전되었다.

  1. 부암동(付岩洞)

구의 서북쪽에 있는 동이다. 인왕산 동북쪽 기슭과 백악산 서북쪽 기슭에 있으며, 동쪽은 삼청동, 서쪽은 홍지동과 서대문구 홍제동, 남쪽은 청운동 · 옥인동, 북쪽은 신영동 · 평창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이곳에 부침바위[付岩]가 있었던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의통방(義通坊)에 속하였고, 1914년 고양군 은평면 부암리가 되었다가, 1936년 경성부 부암정(付岩町)이 되었다. 1943년 구제 실시에 따라 서대문구에 속하였다가, 1946년 부암동으로 바뀌었으며, 1975년 종로구 관할이 되었다.

  1. 신영동(新營洞)

구의 서북쪽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구기동, 동쪽은 평창동, 남쪽은 부암동, 서쪽은 홍지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1750년(영조 26)에 5군영의 하나인 총융청을 이곳으로 새로 이전한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의통방(義通坊) 조지서계(造紙署契)에 속하였다가, 갑오개혁 북서 상평방(常平坊) 경리청계(經理廳契) 신영동이 되었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신영리가 되었다가, 1936년 경성부 신영정이 되었다. 1943년 구제 실시에 따라 서대문구에 속하였고, 1946년 신영동이 되었다가, 1975년 종로구에 편입되었다.

신라 때 지은 장의사(莊義寺)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당간지주만 남아 있다. 연산군 때 유흥을 위한 수각(水閣)으로 세웠다는 세검정이 있는데, 이 일대에 조선시대 종이를 만들던 관아인 조지서가 있었다. 장의사지이자 신군영터였던 곳에는 세검정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1. 홍지동(弘智洞)

구의 서북쪽 끝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구기동, 동쪽은 신영동, 남쪽은 부암동, 서쪽은 서대문구 홍은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탕춘대성의 성문인 홍지문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의통방(義通坊) 경리청계(經理廳契)와 조지서계(造紙署契)에 속해 있었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홍지리가 되었다가, 1936년 경성부 홍지정이 되었다. 1943년 구제 실시에 따라 서대문구에 속하였고, 1946년 홍지동이 되었다가, 1975년 종로구에 편입되었다.

  1. 평창동(平倉洞)

구의 북쪽에 있는 동이다. 동쪽과 북쪽은 성북구 정릉동, 서쪽으로 구기동, 남쪽은 부암동 · 삼청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조선시대에 선혜청(宣惠廳)의 평창이 있었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의통방(義通坊)에 속하였으며, 갑오개혁 때 북서 상평방(성외) 평창이었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恩平面) 평창리(平倉里)가 되었다가, 1949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편입되어 1950년 평창동이 되었으며, 1975년 종로구 관할이 되었다. 평창동은 행정동과 이름이 같으며 법정동인 평창동 · 구기동을 관할하고 있다.

대부분의 지역이 북한산국립공원 기슭으로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산기슭에 고급주택들이 많이 있다. 세검정길이 동의 동서로 통과하며 북악터널과 연결된다. 조선시대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한 제단인 여단(癘壇, 북단)의 흔적이 북악파크호텔 뒷편에 남아 있고. 소설가 박종화가 살던 조수루(釣水樓)가 있다.

  1. 구기동(舊基洞)

구의 서북쪽 끝에 있는 동으로 동쪽은 평창동, 남쪽은 홍지동 · 신영동, 서쪽은 서대문구 홍제동과 은평구 불광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예전에 구텃굴이라 하던 것을 한자로 표기한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의통방(義通坊) 경리청계(經理廳契)였다가, 1867년(고종 4)에는 상평방(常平坊) 경리청계(經理廳契)에 속하였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구기리가 되었으며, 1949년 8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편입되었다. 1950년 구기동으로 변경되었으며, 1975년 종로구 관할이 되었다.

대부분의 지역이 북한산국립공원 기슭으로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산기슭에 고급주택과 빌라들이 많이 있고 이북오도청이 자리하고 있다. 구기터널로 이어진 진흥로가 동의 중심가를 지나며, 삼각산 등산로인 구기동들머리 · 사자능선 · 탕춘대능선이 있어 휴일에는 많은 시민들이 찾아드는 곳이다.

  1. 무악동(毋岳洞)

구의 서쪽 끝에 있는 동이다. 인왕산 서쪽 기슭에 있으며, 동쪽은 사직동 · 누상동, 서쪽은 서대문구 현저동, 남쪽은 행촌동, 북쪽은 서대문구 홍제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1975년 서대문구 현저동 일부를 종로구에 편입할 때 무악고개가 있는 곳이라 하여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 반송방(盤松坊)에 속하였으며, 1914년 경성부 현저동, 1936년 현저정(峴底町)에 속하였다. 1943년 서대문구에 편입되었고, 1946년 현저동에 속하였다가, 1975년 종로구에 편입되면서 무악동이 되었다.

6·25전쟁 이후까지 무허가 건물이 난립한 달동네였으나, 현재는 재개발로 인하여 현대아파트 등 대형 아파트단지가 들어섰으며,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부근에 상가가 발달되어 있다. 의주로의 무악재고개는 서울에서 서북지방으로 통하는 역사상 중요한 통로였으며, 사현 · 모화현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선바위 아래의 인왕사는 우국지사들의 은신처와 현저동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한 사람들의 명복을 비는 사찰로 많이 이용되었다고 한다.

  1. 교남동(橋南洞)

구의 서남쪽 끝에 있는 동이다. 동쪽은 평동, 서쪽은 서대문구 냉천동 · 옥천동 · 천연동, 남쪽은 서대문구 냉천동, 북쪽은 교북동 · 송월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만초천 상류인 교남지구대 앞에 있던 돌다리 남쪽 마을인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 반송방(盤松坊)에 속하였으며, 1914년에는 경성부 교남동이 되었다가, 1936년 교남정(橋南町)으로 바뀌었다. 1943년 구제 실시에 따라 서대문구에 편입되었고, 1946년 교남동이 되었으며, 1975년 종로구 관할이 되었다. 교남동은 행정동과 이름이 같으며, 법정동인 교남동 · 평동 · 송월동 · 홍파동 · 교북동 · 행촌동을 관할하고 있다. 1898년 서대문~청량리 간 전차궤도가 놓인 이후 독립문로터리에 있던 전차 종점과 가까워 자연스럽게 시장으로 발전하였다.

  1. 평동(平洞)

구의 남서쪽 끝에 있는 동으로 북쪽으로는 송월동 · 신문로, 동쪽은 중구 정동, 남쪽은 서대문구 충정로2가, 서쪽은 냉천동 · 옥천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예전의 거평동(居平洞)이었던 것을 거자를 떨쳐서 표기한 데서 유래하였으며, 또 안산과 인왕산 사이의 만초천 상류지역 분지형 평지였던 데서 유래하였다고도 한다.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 반송방(盤松坊)에 속하였으며, 갑오개혁 때 서서(西署) 반송방 지하계(池下契) 평동이 되었다. 1914년 경성부 평동이 되었다가, 1936년 평동정이 되었으며, 1946년 평동이 되었다. 1946년 구제 실시에 따라 서대문구에 속하였으며, 1975년 종로구 관할이 되었다.

서대문사거리 북쪽 지역인데, 경교(京橋) 인근의 서울적십자병원과 서대문우체국 일대는 조선시대의 경기감영 자리였고, 강북삼성병원의 일부는 8·15광복 직후 김구(金九)가 머문 경교장 건물이었다. 그리고 4·19혁명기념도서관은 국회의장을 역임한 이기붕(李起鵬)의 집터이다.

  1. 송월동(松月洞)

구의 서남쪽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홍파동, 동쪽으로는 신문로, 남쪽은 평동, 서쪽은 교남동 · 홍파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송정동과 월암동의 머리 글자를 합성한 데서 유래되었다. 갑오개혁 때 서서(西署) 반송방(盤松坊) 지하계(池下契)에 속하였으며, 1914년 송정동(松亭洞), 월암동(月岩洞), 천변동(川邊洞) 각 일부를 통합하여 송월동이 되었다. 1936년 송월정이 되었다가 1943년 구제 실시에 따라 서대문구에 속하였으며, 1946년 송월동이 되었고, 1975년 종로구 관할이 되었다. 인왕산 기슭에 서울성곽을 끼고 있으며, 돈의문뉴타운정비지역으로 개발되고 있다.

  1. 홍파동(紅把洞)

구의 서남쪽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행촌동, 동쪽은 사직동 · 송월동, 서쪽은 교북동, 남쪽으로는 교남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홍문동과 파발동의 머리글자를 합성한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반송방(盤松坊)에 속하였으며, 1914년에 신촌동(新村洞), 홍문동(紅門洞), 어수정동(御水井洞), 월암동(月岩洞), 천변동(川邊洞), 파발동(把撥洞)의 일부를 통합하여 홍파동이 되었다. 1936년 홍파정이 되었다가 1943년 구제 실시로 서대문구에 속하였고, 1946년 홍파동이 되었으며, 1975년 종로구 관할이 되었다.

파발마가 있는 역참과 주막, 정문(旌門)이 있었다. 이이(李珥)의 사당인 문성묘가 있었는데, 구세군교회당이 건립되면서 철거되고 현재는 암각글씨와 표지석만 있다. 또 대한제국시기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영국 언론인 베델이 살던 집이 있다.

  1. 교북동(橋北洞)

구의 서남쪽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행촌동, 남쪽은 교남동, 서쪽은 서대문구 영천동 · 옥천동, 동쪽은 홍파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만초천 상류인 교남지구대 앞에 있던 돌다리 북쪽 마을인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 반송방(盤松坊)에 속하였으며, 1914년에는 경성부 교북동이 되었다가, 1936년 교북정으로 바뀌었다. 1943년 구제 실시에 따라 서대문구에 편입되었고, 1946년 교북동이 되었으며, 1975년 종로구 관할이 되었다.

  1. 행촌동(杏村洞)

구의 서남쪽에 있는 동으로 동쪽과 북쪽은 사직동(社稷洞), 서쪽은 무악동, 남쪽은 교북동 · 홍파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은행동(銀杏洞)과 신촌동(新村洞)에서 한 글자씩 따서 붙인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 반송방(盤松坊)에 속하였으며, 1914년 곡정동 · 은행동 · 신촌동 · 어수정동 등을 통합하여 행촌동이 되었다. 1936년 은행정에 속하였다가 1943년 서대문구에 속하였고, 1946년 행촌동이 되었고, 1975년 종로구 관할이 되었다.

대신고등학교 교내에 정유재란(1597) 때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의 경리(經理) 양호(楊鎬)를 기리기 위해 세운 양공거사비(楊公去思碑)가 있으며, 그 위쪽 권율(權慄)의 집터에는 수령 400년의 은행나무가 있다. 대신중 · 고등학교와 성결신학교 · 상록수어린이집이 있으며, 1981년 개원한 행촌공원이 있다. 인왕산 기슭에 서울성곽을 끼고 있으며, 돈의문뉴타운정비지역으로 개발되고 있다.

  1. 당주동(唐珠洞)

구의 남서쪽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도렴동 · 내수동, 동쪽은 세종로, 남쪽은 신문로1가, 서쪽은 신문로2가와 접해 있다. 동명은 조선시대 지명인 당피동과 야주현의 이름을 합성한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 인달방(仁達坊)과 적선방(積善坊)에 속하였으며, 1914년 봉상시동 · 내섬동 · 창례동 · 북문동 · 대창동 · 훈조동 · 야주현 · 당피동의 일부를 통합하여 당주동이 되었다. 1936년 당주정이 되었다가, 1943년 종로구에 속하였고, 1946년 당주동이 되었다.

조선시대 경희궁 흥화문 현판이 야간에서 빛나 보여 야주개라 이름붙은 언덕이 있었으며, 봉상시 · 내섬시 등의 관아가 있었다. 당주동은 1970년대 신문로지구 재개발이 시행되기 전에 입시학원 골목이었으며, 1980년대 학원가가 강남으로 이전되면서 재개발로 인하여 업무지구 빌딩군이 들어서게 되었다.

  1. 내수동(內需洞)

구의 남서쪽에 있는 동으로 남쪽은 당주동, 북쪽은 내자동, 서쪽은 사직동 · 신문로 2가, 동쪽은 도렴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궁중의 정상 경비 이외에 사사로운 물자를 제공하던 관아인 내수사가 있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 인달방(仁達坊)에 속하였으며, 1914년 영빈동 · 누정동 · 승전교 · 내수동 · 내수사전동 · 사직동 · 박정동 · 대창동 · 북문동 등의 각 일부를 통합하여 수창동이 되었다가, 1936년 내수정이 되었고, 1946년 내수동이 되었다. 내자동길 · 주시경길 · 세종문화길이 지나며, 2004년 경희궁의 아침, 파크팰리스 등의 대형 아파트단지로 개발되었다.

  1. 신문로1가(新門路一街)

구의 남서쪽에 있는 동으로 가로명과 일치한다. 동쪽은 세종로, 남쪽은 중구 정동, 북쪽은 당주동, 서쪽으로는 신문로2가와 접해 있다.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 적선방(積善坊)과 여경방(餘慶紡)에 속하였으며, 1914년 훈조동 · 야주현 · 염정동 · 송교 · 상방교 · 오궁동 · 정자동 · 중방교 · 동령동 · 원동 · 선공동의 일부를 합하여 서대문정 1정목이 되었고, 1943년 구제 실시로 종로구에 속하였다가, 1946년 신문로1가가 되었다.

조선시대 비변사 · 선공감 · 훈련도감 등의 관아가 있었으며, 새문안교회 · 구세군대한본영 등 오랜 역사의 개신교회가 위치해 있다. 최초의 국립극장인 원각사와 청계천에 놓여진 송기교(松杞橋)가 있어 여기서부터 청계천 본류가 시작되었다.

  1. 신문로2가(新門路二街)

구의 남서쪽에 있는 동으로 가로명과 일치한다. 동쪽은 내수동 · 당주동 · 신문로1가, 남쪽은 평동과 중구 정동과 충정로1가, 서쪽은 송월동 · 홍파동 · 행촌동, 북쪽은 사직동과 접해 있다. 조선 초기까지 한성부 서부 여경방에 속했으며, 1914년 자문동 · 함춘원 · 농포 · 방추동 · 오궁동 · 장생동의 일부를 합하여 서대문 2정목이 되었고, 1943년 구제 실시로 종로구에 속하였다가, 1946년 신문로2가가 되었다.

  1. 가회동(嘉會洞)

구의 중앙에 있는 동이다. 북쪽은 삼청동, 동쪽은 계동, 남쪽은 재동, 서쪽은 화동 · 삼청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조선시대의 명칭인 가회방(嘉會坊)에서 유래되었는데, 가회란 어진 신하가 어진 임금을 만나서 국운이 창성하는 좋은 만남을 뜻한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가회방 지역이었으며, 1914년 맹현(孟峴) · 재동(齋洞) · 동곡(東谷) · 계동(桂洞) 일부를 합쳐 경성부 가회동이 되었다가, 1936년 가회정이 되었고, 1946년 다시 가회동이 되었다. 가회동은 행정동과 이름이 같으며, 법정동인 가회동 · 계동 · 재동 · 원서동을 관할하고 있다.

가회동은 정독도서관과 중앙고등학교 사이, 응봉 남쪽 기슭의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있어 서울 북촌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일대는 1981년부터 한옥보존지구로 지정되었다가 주민들의 재산권 보호를 위해 1991년 해제되었다. 그러나 2001년부터 북촌가꾸기사업이 진행되어 가회박물관이 자리하는 등 한옥보존과 무형유산 전승사업이 계속되고 있다. 유길준유배지, 취운정터, 일가정터, 완순궁터, 능성위궁, 손병희집터 등이 있다.

  1. 재동(齋洞)

구의 중앙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가회동, 동쪽은 계동, 남쪽은 경운동, 서쪽은 안국동(安國洞)과 접해 있다. 동명은 조선시대 마을 이름인 잿골을 한자로 표기한 데서 유래되었다. 잿골은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 시기에 수양대군 일파가 황보인(皇甫仁) 등을 유인하여 살해할 때 흘린 피가 내를 이루고 비린내가 나서 사람들이 집안에 있는 재를 가지고 나와 길을 덮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가회방 지역이었으며, 1914년 재동 · 동곡 · 홍현의 일부를 합하여 재동이 되었다. 1936년 재동정이 되었고, 1946년 재동이 되었다.

조선시대 이래 전형적인 양반 마을의 특성을 지니고 있어 한옥보존지구로 지정되기도 하였으며, 2001년 북촌가꾸기 사업이 진행되어 전통가옥과 무형유산 전승지가 되었다.

헌법재판소가 위치한 곳인 제중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후에 제중원)이 있던 곳으로 조선 후기의 세도가문인 풍양조씨가 대대로 살던 곳이다. 또한 홍영식의 집터이기도 하였고,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경기여고 전신)와 경성제3고등학교(창덕여고 전신)가 위치해 있었다. 뒤편 백송이 있는 곳은 박지원이 살던 곳으로 손자 박규수가 거주하였고, 김옥균 · 박영효 · 서광범 등이 왕래하면서 개화사상을 꽃피웠던 곳이기도 하다.

  1. 계동(桂洞)

구의 중앙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가회동, 동쪽은 원서동, 남쪽은 운니동, 서쪽은 가회동 · 재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조선시대 의료기관인 제생원(濟生院)이 있어 제생동이라고 하다가, 계생동(桂生洞)으로 변하였고, 줄여서 계동이 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양덕방(陽德坊)에 속하였으며, 1914년 계동이 되었고, 1936년 계동정이 되었으며, 1946년 계동이 되었다.

우리나라 기업을 대표하는 현대그룹 본사와 현대건설㈜, 현대자동차㈜, 현대모비스, 현대종합상사㈜ 등이 관상감과 휘문고등학교터에 세워져 있다.

  1. 원서동(苑西洞)

구의 중앙에 있는 동으로 북쪽과 동쪽은 와룡동, 남쪽은 운니동, 서쪽은 계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창경궁 후원의 서쪽에 있는 데서 유래되었다. 한편 창덕궁의 정원인 함춘원(含春苑)이나 정업원(淨業院)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광화방(廣化坊)에 속했으며, 1914년 원동 · 관현 · 계동의 일부가 통합되어 원서동이 되었고, 1936년 원서정이 되었다가, 1946년 원서동이 되었다.

선조 때의 시인 유희경(劉希慶)이 살던 침류대와 창덕궁 공북문 밖에 훈련도감 군영인 북영이 있었으며, 원서공원에는 옛 궁중에 미곡과 장을 공급하던 사도시(요물고)가 있었다. 공연장으로 북촌창우극장이 있고, 외국공관으로 포르투갈대사관이 있다.

  1. 인사동(仁寺洞)

구의 중앙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관훈동, 동쪽은 낙원동, 남쪽은 종로 2가, 서쪽은 공평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옛 지명인 관인방과 대사동의 이름을 합성한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중부 관인방(寬仁坊)과 견평방(堅平坊)에 속하였으며, 1914년 대사동 · 이문동 · 향정동 · 수전동 · 승동 · 원동의 일부가 통합되어 인사동이 되었다. 1936년 인사정이 되었으며, 1946년 인사동이 되었다.

중종반정 때의 정국공신 구수영(具壽永)이 살던 곳은 조선 후기에 김흥근(金興根)의 소유였다. 이후 헌종의 후궁 경빈이씨의 순화궁(順化宮)이 되었다가 이완용의 소유가 되었으며, 뒤에 명월관의 분점으로 3·1운동 당시 33인이 모인 태화관(泰和館)으로 운영되었다. 지금은 재개발사업으로 헐려 12층의 태화빌딩이 건립되었다. 고미술품과 골동품상가 · 화랑 등이 밀집되어 있으며, 관훈동과 함께 1988년부터 해마다 ‘관훈 · 인사동 전통문화의 마을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3·1운동 때 학생시위운동이 일어난 승동교회와 성신양회공업㈜의 본사가 있다.

  1. 청진동(淸進洞)

구의 중앙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수송동, 동쪽은 공평동, 남쪽으로는 종로1가, 서쪽은 세종로와 접해 있다. 동명은 옛 지명인 징청방과 수진방의 이름을 합성한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중부 징청방(澄淸坊) · 수진방(壽進坊) · 견평방(堅平坊)에 속하였으며, 1914년 상미전전동(上米廛前洞), 상미전후동, 외상동(外相洞), 금부후동(禁府後洞), 상동(相洞), 상사동(相思洞), 수동(壽洞)의 일부를 통합하여 청진동이 되었다. 1936년 청진정이 되었다가 1946년 청진동이 되었다.

조선시대 육조거리 뒤쪽에 있어 상권이 발달하고 부호들을 상대로 한 고급 음식점이 발달하였으며, 지금도 낙지골목 · 빈대떡골목 · 해장국골목 등의 먹자골목을 형성하고 있다. 제안대군의 사저인 수진궁(壽進宮)이 있었으며, 피마골은 임금이나 고관의 행차를 피하기 위하여 생긴 골목길이었고, 상사병이 난 말을 골목에 몰아넣어 잡았던 곳이기도 하다. 서울관광호텔이 있으며, 종로 쪽으로 재개발사업이 크게 진행되어 고층빌딩이 들어서고 있다.

  1. 서린동(瑞麟洞)

구의 남쪽 끝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종로1가, 동쪽은 관철동, 남쪽은 중구 다동 · 무교동, 서쪽은 신문로1가와 접해 있다. 동명은 옛 지명인 서린방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중부 서린방(瑞麟坊)에 속하였으며, 1914년 송교(松橋), 피마동(避馬洞), 추동, 모교(毛橋), 부정동(富井洞), 전옥후동(典獄後洞), 허병(許屛), 전옥전동(典獄前洞), 백목전후동, 혜천동 등의 일부를 통합하여 서린동이 되었다. 1936년 서린정이 되었으며, 1946년 서린동이 되었다.

조선시대 시전이 있던 곳으로, 전옥서 · 우포도청 등이 있었다. 124번지 부근 청계천에 광통교(廣通橋)가 있었다. 1973년 공공시설 확보와 불량주거건물 개선을 위한 재개발지역으로 지정된 이후 여러 차례 재개발사업이 추진되어 고층업무빌딩이 들어서 도심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스웨덴대사관 · 광화문우체국 · 서울체신청 등이 있으며, 금호석유화학㈜ 본사와 대형서점인 영풍문고, 서린호텔 등이 있다.

  1. 중학동(中學洞)

구의 중앙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사간동 · 송현동, 동쪽과 남쪽은 수송동, 서쪽은 세종로와 접해 있다. 동명은 조선시대 4부학당의 하나인 중부학당이 있었던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관광방(觀光坊) · 가회방(嘉會坊)에 속하였으며, 1914년 중학동 · 동곡 · 송현 · 벽동 · 수문동의 일부가 통합되어 중학동이 되었다. 1936년 중학정이 되었다가 1946년 중학동이 되었다.

한국일보사와 건너편 미국대사관 직원용 관사 사이의 고개를 솔재(송현)라고 하는데, 1911년 도시계획에 따라 도로가 넓어지면서 매우 낮아졌다. 한국일보, 연합뉴스㈜, 코리아타임스, 서울경제신문 등 언론기관이 밀집되어 있으며, 일본대사관이 있다.

  1. 종로동(鐘路洞)

광화문사거리에서 동대문에 이르는 도로를 따라 이어진 동이다. 종로구의 중앙을 지나는 종로가로의 남북을 따라 서쪽에서 동쪽 방향으로 1가에서 6가에 이른다. 조선시대 한성부 중부 징청방 · 서린방(이상 1가), 경행방 · 장통방 · 견평방,정선방(이상 2·3가), 동부 연화방(4가), 창선방 · 건덕방(5·6가) 지역이었다. 1914년 종로 1정목6정목이 되었으며, 1946년 종로1가6가가 되었다.

조선시대 종루(鐘樓)가 있던 종로사거리를 중심으로 시전이 발달하여, 운종가라 불리면서 많은 사람이 모이는 광장 구실을 하였다. 1929년 9월에는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현대식 백화점인 화신상회(和信商會)가 지금의 종로 2가에 있었다. 지금도 광장시장 · 동대문종합시장 · 한약재시장 · 귀금속도매시장 · 의료기상 등이 그 상권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조선 전기 불교 교종 수찰로 도성 중앙에 경영된 원각사(圓覺寺)가 있었으며, 시전을 관장하던 관아인 경시서(평시서)가 있었다. 또 여진사신의 숙소인 북평관과 4부학당의 하나인 동부학당 등이 있었다. 광화문우체국 · 동대문경찰서 등의 공공기관과 교보문고 · 종로서적 · 영풍문고 등의 대형 서점이 분포되어 있다.

종로는 길이 2.8㎞, 너비 40m의 서울 도심 간선도로로 조선시대부터 궁궐에서 동대문에 이르는 가장 넓은 대로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현재 일반국도 제6호에 해당한다. 왕복 8차선으로 세종로 사거리에서부터 1∼6가로 구분하며, 도로를 중심으로 상가가 밀집한 서울의 대표적인 상업지구이다. 1974년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어 지나고 있다. 주요 통과지역은 종로구 청진동 · 공평동 · 서린동 · 인사동 · 관철동 · 낙원동 · 돈의동 · 관수동 · 장사동 · 봉익동 · 훈정동 · 예지동 · 인의동 · 효제동이다. 새문안길 · 왕산로와 동서로 이어지고, 세종로 · 창경궁로 · 대학로와 교차되며, 지하철 3·4·5호선이 교차되어 지나간다.

  1. 공평동(公平洞)

구의 중앙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견지동, 동쪽은 인사동, 남쪽은 서린동 · 관철동, 서쪽으로는 청진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견지방(堅志坊)에 있던 의금부에서 재판을 공평하게 처리한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중부 견지방에 속했으며, 1914년 괴동 · 전동 · 금부후동 · 발리동 · 이문동이 통합되어 공평동이 되었다. 1936년 공평정이 되었으며, 1946년 공평동이 되었다.

조선시대 어물전 · 미전 · 발리전 등 시전이 있었으며, 시전을 관장하던 관아인 경시서가 위치하기도 하였다. 현재의 제일은행 본점 뒤편에 1908년에 준공된 한성재판소(평리원)가 있었다. 이곳은 조선시대 의금부가 있던 곳으로 일제 때 종로경찰서가 자리하였고, 1953년에 신신백화점이 건립되었다. 그리고 우정국로 건너편에 한국인이 최초로 세운 화신백화점이 있었다. 금융기관으로는 한미은행㈜의 본점이 있다.

  1. 관훈동(寬勳洞)

구의 중앙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안국동 · 송현동, 동쪽은 경운동, 남쪽은 인사동, 서쪽은 견지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옛 지명인 관인방과 훈동을 합성한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중부 관인방(寬仁坊) 지역이었으며, 1914년 대사동과 청석동의 일부와 훈동을 통합하여 관훈동이 되었다. 1936년 관훈정이 되었다가, 1946년 관훈동이 되었다.

조선시대 충훈부(忠勳府)가 있었고, 이이(李珥)가 살던 곳이다. 고미술 · 골동품상가 · 화랑이 밀집되어 있으며, 1988년부터 해마다 ‘관훈 · 인사동 전통문화의 마을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1. 견지동(堅志洞)

구의 중앙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송현동, 동쪽은 관훈동, 남쪽은 공평동, 서쪽은 수송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조선시대 견평방에 있는 의금부에서 재판할 때 뜻을 굳게 가지고 처리한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중부 견지방(堅志坊)과 관인방(寬仁坊)에 속하였으며, 1914년 전동(典洞), 금부후동(禁府後洞), 동정동(銅井洞), 빙고동(氷庫洞), 도화동(圖畵洞), 청석동, 대사동의 일부를 통합하여 등이 견지동이 되었다. 1936년 견지정이 되었으며, 1946년 견지동이 되었다. 조선시대 도화서 · 전의감이 있었으며, 1972년 12월에 개관한 체신기념관이 있다.

  1. 와룡동(臥龍洞)

구의 중앙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명륜동3가, 동쪽은 연건동, 남쪽은 권농동 · 훈정동 · 원남동 · 돈의동, 서쪽은 원서동 · 운니동 · 익선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임금이 사는 창덕궁이 있으므로, 나라의 상서(祥瑞)인 와룡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중부 정선방(貞善坊)에 속하였고, 1914년 마동(麻洞), 누동(樓洞), 이동(泥洞), 승문동(承文洞), 수문동(水門洞)의 일부가 통합되어 와룡동이 되었다. 1936년 와룡정이 되었다가, 1946년 와룡동이 되었다. 국립서울과학관과 서울특별시선거관리위원회가 있다.

  1. 권농동(勸農洞)

구의 중앙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와룡동(창덕궁), 동쪽은 훈정동(종묘), 남쪽은 묘동, 서쪽은 와룡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조선시대 채소 재배를 권장하는 관아인 권농서가 있던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중부 정선방(貞善坊)에 속하였으며. 1914년 마동(麻洞), 승문동(承文洞), 농포동(農圃洞), 수문동(水門洞)의 일부를 통합하여 권농동이 되었다. 1936년 권농정이 되었다가, 1943년 구제 실시로 종로구에 속하였고, 1946년 권농동이 되었다.

조선시대 외교문서를 관장하던 승문원이 있었으며, 지금은 동의 북쪽을 지나는 율곡로가 창덕궁과 종묘를 나누고 있다. 경희대학교부설 한방병원이 있다.

  1. 운니동(雲泥洞)

구의 중앙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가회동, 동쪽은 와룡동, 남쪽은 경운동 · 익선동, 서쪽으로는 경운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옛 지명인 운현과 이동을 합성한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중부 정선방(貞善坊)에 속하였으며, 1914년 이동 일부가 운니동이 되었다. 1936년 운니정이 되었다가, 1946년 운니동이 되었다.

조선시대 서운관(관상감), 금위영, 통례원 등의 관아가 있었으며 운현궁은 고종의 잠저로 흥선대원군의 정청이 되기도 하였다. 파나마 · 과테말라 · 도미니카 · 베네수엘라 · 엘살바도르 · 온두라스 등 여러 나라의 대사관이 있으며, 운현초등학교와 덕성여대평생교육원이 있다. 삼환기업㈜, 신성무역㈜ 등의 본사가 있다.

  1. 익선동(益善洞)

구의 중앙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운니동, 동쪽은 와룡동, 남쪽은 돈의동, 서쪽은 경운동 · 낙원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옛 지명인 익동과 정선방을 합성하여 유래되었다는 설과 누동궁의 익랑이 있어 익랑골이라 한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조선시대 한성부 중부 정선방(貞善坊)에 속했으며, 1914년 돈령동(敦寧洞), 한동(漢洞), 누동(樓洞), 익동(益洞), 궁동(宮洞), 이동의 일부를 통합하여 익선동이 되었다. 1936년 익선정이 되었다가, 1946년 익선동이 되었다.

조선시대 종친부에 들어갈 수 없는 종친과 외척의 일을 관장하던 돈령부와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의 사당인 누동궁(樓洞宮)이 있었다.

  1. 경운동(慶雲洞)

구의 중앙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안국동 · 재동, 동쪽은 운니동 · 익선동, 남쪽은 낙원동, 서쪽은 관훈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옛 지명인 경행방과 운현을 합성한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중부 경행방(慶幸坊) 지역이었으며, 1914년 교동(校洞)과 석정동(石井洞)을 통합하여 경운동이 되었다. 1936년 경운정이 되었다가, 1946년 경운동이 되었다.

종로경찰서와 우리나라에서 근대초등교육기관으로 가장 역사가 긴 교동초등학교가 있다. 중종 때 유학자이자 정치가인 조광조, 교동대감이라 불리던 김좌근, 휘문의숙을 세운 민영휘 등이 살았다.

  1. 관철동(貫鐵洞)

구의 남쪽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종로 2가, 동쪽은 관수동, 남쪽은 중구 삼각동 · 수하동, 서쪽은 서린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옛 지명인 관자동과 철물교를 합성한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중부 장통방(長通坊)에 속하였으며, 1914년 동곡(東谷), 장교동(長橋洞), 입동(笠洞), 관자동(貫子洞), 혜전후동(鞋廛後洞), 청포후동(靑布後洞), 정자동의 일부가 통합되어 관철동이 되었다. 1936년 관철정이 되었다가, 1946년 관철동이 되었다.

조선시대 시전의 중심지로 오늘날 비단상점이 그 명맥을 잇고 있으며, 보신각이 위치하여 운종가의 면모를 계승하고 있다. 한국산업은행이 있는 삼일빌딩 부근에는 개화사상가 유대치(劉大致, 유홍기)가 살았다. 영화관으로 코아아트홀1·2·3관이 있다.

  1. 낙원동(樂園洞)

구의 중앙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경운동, 동쪽은 돈의동, 남쪽은 종로2·3가, 서쪽은 인사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옛 지명에 원동이 있었고, 낙원지(樂園地)라고 할 만한 탑골공원이 있는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중부 정선방(貞善坊), 경행방(慶幸坊), 관인방(寬仁坊)에 속해 있었으며, 1914년 어의동(於義洞), 한동(漢洞), 원동(園洞), 탑동(塔洞), 주동(紬洞), 교동(校洞)의 일부가 통합되어 낙원동이 되었다. 1936년 낙원정이 되었다가, 1946년 낙원동이 되었다.

인조의 잠저인 어의궁(於義宮), 희빈장씨의 사당인 대빈궁(大嬪宮)이 있었으며, 한의사 지석영(池錫永)이 살았다. 종로세무서가 있으며, 영화관으로 허리우드와 파고다2·3·4관이 있고, 낙원상가에는 전국 최대 규모의 악기종합상가가 조성되어 있다.

  1. 묘동(廟洞)

구의 중앙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익선동 · 권농동, 동쪽은 봉익동, 남쪽은 종로3가, 서쪽은 돈의동(敦義洞)과 접해 있다. 동명은 종묘가 있는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중부 정선방(貞善坊)에 속하였으며, 1914년 묘동(廟洞), 마동(麻洞), 누동(樓洞)을 통합하여 수은동(授恩洞)이 되었다. 1936년 수은정이 되었다가, 1946년 묘동이 되었다.

조선시대 좌포도청이 있었으며, 그 앞 물줄기에 파자교(把子橋)가 있었다. 1907년에 건립된 극장 단성사가 있는데, 최근 새로운 모습으로 개조되었다. 동의 가운데로 돈화문로가 남북으로 지나며, 지하철 5호선의 종로3가역이 있는 사거리에서는 국악한마당 축제가 펼쳐진다.

  1. 훈정동(薰井洞)

구의 중앙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와룡동, 동쪽은 원남동 · 인의동, 남쪽은 종로3·4가, 서쪽은 봉익동 · 권농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더운 우물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는데, 이는 종묘 앞 시민공원에 있는 어수우물 · 어정 · 한우물로 불린 우물을 말한다. 조선시대 한성부 중부 정선방(貞善坊)과 동부 연화방(蓮化坊)에 속하였으며, 1914년 후정동(後井洞), 순라동(巡邏洞), 묘전동, 태정동(太井洞) 등이 통합되어 훈정동이 되었다. 1936년 훈정정이 되었다가, 1946년 훈정동이 되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종묘 밖에는 순라청이 있어 순찰을 행하였다. 종묘 앞에는 시민광장이 조성되어 노인층의 쉼터가 되고 있으며, 국악한마당 등 축제가 펼쳐지기도 하고, 민주화 과정에서 많은 시위 집회의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1. 봉익동(鳳翼洞)

구의 중앙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권농동, 동쪽은 훈정동, 남쪽은 종로3가, 서쪽은 묘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창덕궁 돈화문 앞에 있는 왕을 뜻하며 상서(祥瑞)인 봉황의 날개에서 유래되었다. 또 조선시대 환관들이 많이 거주하여 환관을 봉황의 날개로 견준데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조선시대 한성부 중부 정선방(貞善坊)에 속하였으며, 1914년 묘동(廟洞), 대정동(大井洞), 마동(麻洞)의 일부가 통합되어 봉익동이 되었다. 1936년 봉익정이 되었으며, 1946년 봉익동이 되었다. 피마골을 중심으로 귀금속상가가 밀집되어 있다.

  1. 돈의동(敦義洞)

구의 중심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익선동, 동쪽은 묘동, 남쪽은 종로3가, 서쪽은 낙원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옛 지명인 돈령동(敦寧洞)과 어의동(於義洞)의 머리글자를 합성한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중부 정선방(貞善坊)과 경행방(慶幸坊)에 속했으며, 1914년 누동(樓洞), 어의동, 한동, 장대장동(長大將洞), 주동(紬洞)의 일부를 통합하여 돈의동이 되었다. 1936년 돈의정이 되었다가 1946년 돈의동이 되었다.

정조 때 영의정을 역임한 채제공(蔡濟恭)이 살았으며, 시전거리에 명주전이 있었다.

  1. 장사동(長沙洞)

구의 남쪽 중앙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종로3가, 동쪽은 예지동, 남쪽은 중구 입정동, 서쪽으로는 관수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청계천의 모래흙이 긴 뱀 모양을 이루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중부 장통방(長通坊)에 속하였으며, 1914년 중부동(中部洞), 판정동(板井洞), 상판동(上板橋), 하판동, 모곡동(帽谷洞)의 일부를 통합하여 장사동이 되었다. 1936년 장사정이 되었다가, 1946년 장사동이 되었다.

조선시대 오부 가운데 하나인 중부의 관아가 수송동으로 옮기기 전까지 위치해 있었으며, 동남쪽으로 청계천이 흘러 신교(新橋), 하랑교(河浪橋), 두껍다리, 영풍교(永豊橋, 孝經橋) 등의 다리가 있었다. 그리고 종로와 청계천 사이에는 벙거지를 파는 시전을 비롯하여 많은 시전이 분포되어 있었으며, 그 명맥을 이은 듯 대형 상가인 세운상가가 있다. 센츄럴관광호텔이 있다.

  1. 관수동(觀水洞)

구의 남쪽 중앙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종로3가, 동쪽은 장사동, 남쪽은 중구 수표동 · 입정동, 서쪽은 관철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청계천의 흐르는 물을 관망한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중부 장통방(長通坊)에 속하였으며, 1914년 입동(笠洞), 비파동, 모곡동(帽谷洞), 상판동(上板洞) 등이 통합되어 관수동이 되었다. 1936년 관수정이 되었다가, 1946년 관수동이 되었다.

조선시대 청계천의 준천과 관리를 맡은 관아인 준천사가 있었으며, 청계천에는 수표교와 수표가 설치되어 있었다. 인근은 갓 · 비파 등을 파는 시전거리로 조성되어 있었다. 일제 때 중국인이 많이 거주하였으며, 현재는 국일관프라자를 비롯하여 공구상가 등이 있고, 유흥업소가 많이 있다. 영화관으로는 서울시네마타운1·2·3관과 씨네프라자가 있다.

  1. 인의동(仁義洞)

구의 동쪽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원남동, 동쪽은 연지동, 남쪽은 종로4가, 서쪽은 훈정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유학의 오상(五常)에 해당하는 인과 의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동부 연화방(蓮化坊)에 속하였으며, 1914년 등자동(登子洞), 연지동, 후정동(後井洞), 신기동(新基洞), 비석동(碑石洞), 가정동(嘉井洞) 등이 통합되어 인의동이 되었다. 1936년 인의정이 되었다가, 1946년 인의동이 되었다.

배오개(이현)에는 광해군의 잠저였던 이현궁이 있었으며, 조선 후기 5군영의 하나인 어영청이 자리하였다. 혜화경찰서와 서울지방경찰청형사기동대가 있다. 귀금속상가와 인의공원이 있다.

  1. 예지동(禮智洞)

구의 남쪽 중앙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종로4가, 동쪽은 종로5가, 남쪽으로는 중구 주교동, 서쪽은 장사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유학의 오상(五常)에 해당하는 예와 지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동부 연화방(蓮化坊)에 속하였으며, 1914년 중학동(中學洞), 산간동(山間洞), 상천변동, 옥방동(玉房洞), 칠방동(漆房洞), 석수방동(石手房洞), 효교(孝橋), 하피마동(下避馬洞), 이현(梨峴)의 일부를 통합하여 예지동이 되었다. 1936년 예지정이 되었다가, 1946년 예지동이 되었다.

조선시대 후기 옥공예 · 칠공예 · 석공 등의 공방이 발달했던 곳으로, 지금도 시계 · 귀금속 도매상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청계천에는 효경교(孝經橋)가 있었다. 서울에서 최초로 형성된 근대시장인 광장시장이 있어 조선 후기 이현시전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1. 원남동(苑南洞)

구의 동쪽에 있는 동으로 동명은 창경원의 남쪽에 있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함춘원 남쪽으로도 볼 수 있다. 조선시대 한성부 동부 연화방(蓮化坊)에 속하였으며, 1914년 승문동(承文洞), 신민동(新民洞), 감정동(甘井洞), 호동(壺洞), 상사동(相思洞), 순라동(巡邏洞), 마전정동(麻田井洞), 함춘동(含春洞), 연지동을 통합하여 원남동이 되었다. 1936년 원남정이 되었으며, 1946년 원남동이 되었다.

조선 중기 이항복이 살았다. 일제강점기 때 종로4가에서 창경궁까지 이어지는 전차로가 있었다. 창경궁로와 율곡로가 원남동로터리에서 교차하는 주거 밀집지역이다.

  1. 효제동(孝悌洞)

구의 동쪽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이화동 · 연건동, 동쪽은 충신동 · 종로6가, 남쪽으로는 종로5가, 서쪽은 연지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유교의 덕목인 효제에서 유래되었는데, 동생 인평대군과 우의가 돈독한 효종의 잠저(潛邸)가 있어 유래되었다고 하기도 한다. 조선시대 한성부 동부 창선방(彰善坊) · 건덕방(建德坊) · 연화방(蓮花坊)에 속하였으며, 1914년 연지동, 상북동(尙北洞), 신교동(新橋洞), 내교동(內橋洞), 괴천동(槐泉洞)을 통합하여 효제동이 되었다. 1936년 효제정이 되었다가, 1946년 효제동이 되었다.

조선시대 효종의 잠저인 어의궁(於義宮)이 있었으며, 지금 그 자리에는 어의공립보통학교 후신인 효제초등학교가 있다. 중부교육지원청이 있다.

  1. 연지동(蓮池洞)

구의 동쪽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연건동, 동쪽은 효제동, 남쪽은 종로5가, 서쪽은 원남동 · 인의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큰 연못이 있었던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동부 창선방(彰善坊), 건덕방(建德坊), 연화방(蓮花坊)에 속하였으며, 1914년 연지동, 냉정동(冷井洞)을 합하여 연지동이 되었다. 1936년 연지정이 되었다가, 1946년 연지동이 되었다.

명(明)나라가 멸망한 후 망명한 사람들이 살던 명인촌(明人村)이 있었으며, 이들을 효종이 특별히 대우하였다고 한다. 잠실로 이전한 옛 정신여자고등학교 자리에는 보호수 회화나무와 은행나무가 있는데, 이곳은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산실이었다. 1894년에 설립된 연동교회를 비롯하여 한국기독교연합회관 ·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관 · 여전도회관 · 연강홀이 있으며, 보령제약과 삼양사 본사가 있다. 많은 빌딩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연지공원이 있다.

  1. 충신동(忠信洞)

구의 동쪽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이화동, 동쪽은 창신동, 남쪽은 종로6가, 서쪽은 효제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유교의 덕목인 충과 신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동부 건덕방(建德坊)에 속하였으며, 1914년 저교동(杵橋洞), 신교동(新橋洞), 경기동(經基洞), 장원동(長垣洞)의 일부를 통합하여 충신동이 되었다. 1936년 충신정이 되었다가, 1946년 충신동이 되었다.

율곡로가 낙산기슭을 따라 동의 중앙을 지나는데, 한편으로 대학천이 복개되어 대학천길이 되어 효제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이 물줄기에는 신석교(신교), 방아다리(충효교)가 있었다. 신석교는 원래 토교였으며, 조선 후기 지도에 나타난다. 그리고 창신동과 경계를 이루는 낙산 능선에는 서울성곽이 축조되어 있다.

  1. 이화동(梨花洞)

구의 동쪽에 있는 동이다. 낙산(駱山) 서쪽 기슭에 있으며, 동쪽은 창신동, 서쪽으로 연지동, 남쪽은 충신동, 북쪽의 동숭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조선 전기 김일손이 살던 이화정(梨花亭)이라는 정자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동부 숭신방(崇信坊)에 속하였으며, 1914년 이화동이 되었다. 1936년 이화정이 되었다가, 1943년 구제 실시로 종로구에 편입되었고, 1946년 이화동이 되었다. 이화동은 행정동과 이름이 같으며 법정동인 이화동 · 연건동 · 동숭동을 관할하고 있다.

이화정터는 이승만대통령의 사저인 이화장(梨花莊)이 되었는데, 지금은 대한민국 초대 내각을 구상했던 조각당(組閣堂)과 기념관 및 부속건물이 있으며 입구에 들어가면 이승만 대통령 동상이 서 있다. 이화장 입구 부근에는 인평대군 집인 석양루가 있었는데, 조선 후기에 왕실에서 사용하는 관곽(棺槨)을 제조 · 수리하던 장생전으로 사용되었다. 창신동과 경계가 되는 낙산은 한양도성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명산으로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암반에 송림이 우거져 있던 곳이었으며, 산세가 낙타의 외봉과 같아 붙여진 이름으로 낙타산으로 부르기도 한다. 한국전쟁 후 판잣집의 밀집지역으로 시민아파트가 건립되어 있었는데, 근래 낙산 지역 재개발로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그리고 창신동과 경계를 이루는 낙산 능선에는 서울성곽이 축조되어 있다. 서울대학교 사범대부속여자중학교가 있다.

  1. 연건동(蓮建洞)

구의 동쪽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명륜동 4가, 동쪽은 동숭동, 남쪽은 효제동 · 연지동 · 원남동, 서쪽은 와룡동(창경궁)과 접해 있다. 동명은 옛 지명인 연화방(蓮花坊)과 건덕방(建德坊)의 머리글자를 합한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동부 연화방(蓮花坊)과 건덕방(建德坊)에 속하였으며, 1914년 함춘동(含春洞), 신교동(新橋洞), 과동(果洞), 남이탑동(南爾塔洞), 반송정동(盤松井洞), 장동(墻洞), 독각현(獨脚峴)의 일부를 통합하여 연건동이 되었다. 1936년 연건정이 되었다가, 1946년 연건동이 되었다.

이석형(李石亨) · 이정구 등 동촌이씨가 계일정을 짓고 일가를 이루고 살았으며, 태종의 외손인 남이(南怡) 장군도 이곳에서 살았다. 대학천(쌍계)를 복개한 대학로는 문화의 거리로 조성되어, 젊은이들의 광장으로 각종 축제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한국국제협력단, 산업디자인포장개발원 등이 있다. 그리고 대학천에는 의과대학 앞에 응란교(凝鸞橋), 연건동과 이화동 사이에 장경교(長慶橋)가 있었다.

  1. 동숭동(東崇洞)

구의 동쪽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혜화동, 동쪽은 창신동과 성북구 삼선동1가, 남쪽은 이화동, 서쪽은 연건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옛 지명인 숭교방(崇敎坊) 동쪽에 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동부 숭신방(崇信坊)에 속하였으며, 1914년 쌍계동(雙溪洞), 하백동(下栢洞), 신대동(新垈洞), 상백동의 일부를 통합하여 동숭동이 되었다. 1936년 동숭정이 되었다가, 1946년 동숭동이 되었다.

낙산 서쪽 기슭에 있어 조선시대 쌍계동이라 하여 도성 내 5대 명승의 하나였으며, 남상문 · 신광한 등 많은 왕실 · 외척 · 문인들이 살았다. 옛 서울대학교가 위치하였으며, 관악산 기슭으로 이전한 뒤에 남은 본관은 현재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입주해 있다. 그리고 학교부지 일대는 마로니에공원(동숭공원)으로 조성되었으며, 일부 건물은 한국방송대학교로 사용되고 있다. 대학로 일대는 한국방송대학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초등학교, 국제교육진흥원,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등이 있고, 문예회관 · 코메디아트홀 · 파랑새소극장 · 동숭아트센터 · 학전블루 · 마로니에극장 등 문화예술 시설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1. 혜화동(惠化洞)

구의 북동쪽에 있는 동이다. 북쪽은 성북구 성북동, 동쪽은 성북구 동소문동 · 성북동, 남쪽은 동숭동, 서쪽으로 명륜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서울성곽 4소문의 하나인 혜화문(惠化門)이 있는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동부 숭신방(崇信坊)에 속하였으며, 1914년에 송동 · 상토교 · 하토교 · 상백동을 합하여 혜화동이 되었다. 1936년 혜화정이 되었다가, 1943년 종로구에 편입되었고, 1946년에 혜화동이 되었다. 혜화동은 행정동과 이름이 같으며, 법정동인 혜화동과 명륜동1·2·4가를 관할하고 있다.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경신중 · 고등학교, 혜화여자고등학교, 동성중 · 고등학교가 있으며, 보성중 · 고등학교가 방이동으로 이전한 뒤에 서울과학고등학교와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이 들어섰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명동성당 · 약현성당에 이어 세 번째의 본당으로 건립된 혜화동성당이 있다.

  1. 명륜동(明倫洞)

구의 북쪽에 있는 동이다. 북쪽은 성북구 성북동, 동쪽은 혜화동, 서쪽은 와룡동, 남쪽은 연건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조선시대 인륜을 밝히는 교육기관인 성균관(成均館)이 있고, 그 맥을 이어 성균관대학교의 전신인 명륜학원(明倫學院)이 있었던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동부 숭교방(崇敎坊)에 속하였으며, 1914년 숭일동 · 숭이동 · 숭삼동 · 숭사동이 되었다. 1936년 명륜정1·2·3·4정목이 되었다가, 1946년 명륜동1·2·3·4가가 되었다. 법정동인 명륜동1~4가 가운데 명륜동3가와 와룡동 1번지는 행정동 명륜3가동에서 행정을 담당하고 있으며, 명륜동1·2·4가는 혜화동에서 관할하고 있다.

명륜동3가는 대부분 성균관대학교와 성균관이 차지하고 있으며, 대학 서쪽에 주택가가 형성되어 있다. 성균관대학교 정문 왼쪽의 비각 안에는 1712년(영조 18)에 건립된 탕평비(蕩平碑)가 있고, 그 밖에 김종국가가 있다. 명륜동1가에는 송시열(宋時烈)이 살던 집터가 있으며, 그가 쓴 ‘증주벽립’(曾朱壁立) 암각 글자가 있다. 지하철 4호선 혜화역 서쪽에 있는 명륜동 4가는 대부분 주택가이고, 명륜동 2가와 경계가 되는 개천이 복개된 도로 양편에는 시장이 형성되어 있는데, 문화의 거리 이면도로가 되어 먹거리마당이 되고 있다. 그리고 우석병원이 있던 곳은 아남아파트단지로 변하였다. 노무현대통령이 당선되기 전에 살던 곳이다.

  1. 창신동(昌信洞)

구의 동쪽에 있는 동이다. 북쪽은 성북구 삼선동2가, 동쪽은 숭인동, 서쪽은 혜화동 · 이화동 · 충신동 · 종로6가, 남쪽은 중구 흥인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옛 지명인 인창방(仁昌坊)과 숭신방(崇信坊)의 가운데 글자를 합성한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동부 인창방과 숭신방에 속하였으며, 1914년 창신동이 되었다. 1936년 창신정이 되었다가, 1943년 동대문구에 편입되었고, 1946년 창신동이 되었으며, 1975년 종로구 관할이 되었다.

남쪽 청계천변은 무허가 판잣집이 난립한 지역이었으나, 1969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대부분 철거되고 지금은 동대문 상권과 더불어 번화한 상가지역으로 발전하였으며, 2005년 청계천이 다시 복원되면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동문시장 · 청계상가 · 동대문신발도매상가와 삼우텍스프라자 등이 있다.

195번지 일대에는 한말 개화파였던 박영효(朴泳孝)가 살던 집(일제 때 귀족회관)과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가 일시 거주했던 상춘원(常春園)이 있었다. 창신초등학교 자리는 1902년(광무 6)에 창건된 대한제국 황실의 보리사(菩提寺)로 전국의 사원을 총괄하던 원흥사(元興寺)가 있었다. 이스트웨스턴호텔 자리는 뚝섬 · 광나루를 운행하던 기동차의 시발역사가 있었다. 낙산 동쪽 기슭에 영풍정 · 좌룡정 등 활터인 사정이 있었고, 동의 서쪽 경계를 이루는 낙산 능선에는 서울성곽이 축조되어 있다. 낙산 정상에서 동망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아래 원각사 입구에는 지봉 이수광이 『지봉유설』을 집필한 비우당 유적이 있다.

  1. 숭인동(崇仁洞)

구의 동쪽 끝에 있는 동이다. 북쪽은 성북구 보문동, 동쪽으로 동대문구 신설동, 서쪽은 창신동, 남쪽은 중구 황학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옛 지명인 숭신방(崇信坊)과 인창방(仁昌坊)의 머리글자를 합한 데서 비롯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동부 숭신방과 인창방에 속하였으며, 1914년 경성부 숭인동이 되었다. 1936년 숭인정이 되었다가, 1943년 동대문구에 편입되었고, 1946년 숭인동이 되었으며, 1975년 종로구 관할이 되었다.

남쪽 청계천변은 무허가 판잣집이 난립했으나, 1969년 복개공사 후 상가지역으로 바뀌었으며, 2005년 청계천 복원으로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신설동종합시장 · 경동상가 등이 있다.

1913년에 북묘 · 서묘를 이전해 와 합사하였으며 1978년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현재 동묘 담장 밖에는 수많은 물품을 좌판을 벌려놓고 파는 풍물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새절승방이라 부르는 청룡사(靑龍寺)가 있으며, 경내에는 영조가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를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정업원구기비(淨業院舊基碑)가 있다. 그리고 숭인공원에는 체육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팔각정과 동망봉산신각이 있다. 숭신초등학교 자리는 예전에 우시장이 있었고, 인근에 도축장도 있었는데 1959년 성동구 마장동으로 이전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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