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계는 개항 이후 대한제국기를 중심으로 유행한 사행성 도박의 한 형태이다. 전통적인 계와는 무관하게 출현했다. 그 사행성으로 인해 폐단이 속출하여 갑오개혁기에 혁파되었으나, 대한제국기 이후 재유행하였다. 시행 주체는 지방 군수나 만인계 회사, 토호나 재력가 또는 외국인 등이었고, 유사한 형태로 자빡계, 산통계(算筒契) 등이 있었다. 국가에서 엄금함에도 불구하고 해이한 국가 기강과 부패한 사회 구조로 인해 확산을 막기 어려웠으며, 개항 후 자본주의적 요소의 이식과 그에 따른 급속한 도시화 진행으로 나타난 새로운 사회 현상이었다.
만인계는 계원의 익명성, 일회성, 일확천금이라는 ‘투기’를 목적으로 한 도박이자 복권의 한 형태였다. ‘계(契)’라는 명칭에도 불구하고 향촌 사회의 공동체 유지와 상호 부조(相互扶助)를 목적으로 지속성과 지역성, 그리고 내부 구성의 균질성을 바탕으로 존재한 전통적인 계와는 전혀 무관하다.
정확한 등장 시기는 분명치 않으나 개항 이후로 추정되며, 많은 사람들을 패가망신시키고 나라의 풍습과 기강을 어지럽게 한다는 지적에 따라 1894년 갑오개혁 당시에 혁파되었다. 그러나 대한제국 시기에 다시 성행하기 시작하였고, 그에 따라 당국의 단속 대상이 되기에 이르렀다.
대한제국기에 유행한 만인계는 지방의 군수, 서울의 만희사(萬喜社) · 채회국(彩會局) · 신의사(信義社)나 인천의 명신회(明信會) 등과 같은 만인계 회사, 그리고 토호나 재력가인 개인 또는 외국인 등이 주체가 되어 설계 및 시행하였다. 이들 가운데는 만인계 회사처럼 궁내부(宮內府) 등에 일정한 세금 납부를 조건으로 합법성을 획득하거나, 또는 용천항(龍川港)의 신상회사(紳商會社)와 같이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던 개항장의 도로 수리비 등과 같은 공공 사업비 조달을 조건으로 감리서(監理署)의 인가를 받아 실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중앙 정부에서 만인계를 사행성 도박으로 금지하고 단속하는 상황에서 이런 회사들이 공공성과 합법성을 지닌 근대적 복권 회사로 발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울러 이러한 금지와 단속에도 불구하고 중앙 정부의 명령이 이를 집행할 말단 관리들에 의해 지켜지지 않을 정도로 국가 기강이 해이해졌고, 당시 부패한 사회 구조로 말미암아 그 확산을 막기는 어려웠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만인계는 상대적으로 퇴조한 반면 약간의 변형된 형태인 ‘자빡계’와 ‘산통계’는 계속해서 살아남아 당국의 주된 단속 대상이 되었다. 아울러 청국에서 들어온 다소 이질적인 도박의 형태인 ‘삼십육계(三十六契)’ 또한 신문지상에 자주 오르내리며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한편 일제 통감부와 조선총독부는 식민 통치에 필요한 자료를 획득할 목적으로 한국의 계에 관한 자료 수집 및 조사를 하면서 한말 만인계류를 전통적 계에 포함시켜 조사를 하고, 이들에 대해 기능적 측면을 중심으로 한 기계적 분류를 적용하였다. 그 결과 이들은 금융적 측면인 수익성에 주목하여 ‘금융을 목적으로 하는 계’로 분류되었고 이러한 내용은 이후에 별다른 비판 없이 통용되었다. 이는 기본적으로 한국의 계가 갖는 특수성이나 역사성을 무시한 조치였으며, 결과적으로 만인계가 전통적 계에 속한다는 잘못된 인식이 생겨나게 된 주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만인계의 운영은 계주가 등급에 따른 당첨금에 차이를 둔 당첨자 수와 추첨일 등을 미리 정해 두고 계표라는 이름의 복권을 일정 기간 판매한 뒤 정해진 추첨일에 구매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추첨하고 추첨금을 지불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추첨은 계표의 번호를 쓴 제비[籤]나 알[球]을 넣은 출통(出桶, 出筒)이라고 불리는 통을 흔들어 당첨자를 뽑는 방식이었다. 계원의 수와 상금 액수의 규모가 축소된 ‘자빡계’라는 것도 있었는데, 이는 납백계(納白契), 잡백계(雜百契), 작백계(作百契), 작파계(作罷契) 등으로 표기되었다. 산통계는 만인계와 추첨 방식은 같으나 1회 추첨 이후 해산되는 만인계와는 달리 계원 전원이 당첨될 때까지 유지된다는 점이 달랐다. 이상의 만인계, 자빡계, 산통계를 만인계로 통칭하기도 한다.
반면 삼십육계의 경우 국내에 들어온 청국인들이 불법적으로 행한 도박으로서, 방식의 측면에서 이들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이것은 설계자인 동원(胴元)이 당첨된 삼십육계의 그림인 당계를 정하여 비밀리에 봉해 둔 뒤, 각기 계에 상당하는 십자점을 기록한 판단 용지를 발행하여 이것을 중개인인 통수를 통해 판매하였다. 이것을 산 사람이 이 종이를 보고 판단하여 판돈을 걸면 밀봉했던 당계를 개봉하여 그 계를 적중한 사람에게는 판돈의 30배를 주고 통수는 당첨자로부터 약간의 수수료를 받았다. 이는 대단히 투기성이 큰 도박으로, 그만큼 피해도 커서 당국의 집중적인 단속 대상이 되었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쳐 1970년대까지도 없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경우에 따라서는 상기 만인계와 유사한 도박들과 이 삼십육계까지 한데 묶어 ‘만인계류’로 지칭하기도 한다.
당시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불안정한 상황으로 인한 조선 민중의 궁핍한 삶과 무규범적인 상황이 한말 만인계류가 전국 각지에서 성행한 배경이 되었다. 즉, 고단한 삶을 일확천금으로 보상받으려는 민중들의 심리와 중앙 정부에서 엄금과 단속을 명해도 말단 기관에서 잘 이행되지 않으며 오히려 인허가를 매개로 뇌물이 난무하는 상황이 어우러진 것으로, 그 결과 민중의 패가망신이 속출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황제권 강화를 목적으로 한 대한제국의 근대화 정책 시행에도 불구하고 아래로부터 국가 기강이 급속히 무너지는 한말(韓末)의 상황을 잘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사행성 도박이라는 부정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그 이면에는 개항 후 서울과 개항장 등지를 중심으로 자본주의적 요소가 이식되고 이에 따라 급속한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나타나는 새로운 사회 현상의 한 단면이라는 측면 또한 존재하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