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장정은 1880년대 조선의 외교 업무를 담당한 부서인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조직 구성과 관할 업무를 명시하는 내용으로 구성된 문서이다. 1882년 창설 시의 내용을 규정한 원장정과 1887년 조직 개편시의 내용을 반영한 속장정(續章程)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장정은 청의 총리아문(總理衙門)을 모델로 하여 4사(司) 1학(學)으로 구성된 조직의 관할 업무와 구성원의 세부 내용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속장정은 조직 개편의 결과 일본의 외무성(外務省) 모델에 보다 가까워진 6사 체제를 설명하고 있다.
1880년 개화 정책이 시작되며 그 추진 기구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 창설되었다. 흥선대원군 때 설치한 삼군부(三軍府)를 없애고 그것을 대체하기 위해 설치된 통리기무아문은 국정 전반을 관리하는 성격을 지닌 기구였다. 그러나 1882년 임오군란 이후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하며 통리기무아문은 사라지고 삼군부가 다시 설치되었다. 이후 대원군은 청국에 납치되어 물러나게 되었고, 그 후 7월 25일에 기무처(機務處)가 설치되어 소관 업무를 임시로 대행하다가 11월 17일에 다시 통리아문(統理衙門)의 설치 지시가 내려졌다.
고종이 그 설치 지시에서 ‘외무(外務)’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면서 이 기구가 대외 관계 업무에 전문화된 아문(衙門)임이 명시되었으며, 다음날에 내무(內務)를 위한 기구로 통리내무아문(統理內務衙門)의 설치 지시가 별도로 내려졌다. 이후 12월 4일에 통리아문과 통리내무아문은 각각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과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으로 개칭되었고, 22일에는 기존의 기무처와 삼군부를 모두 통리군국사무아문에 통폐합하였다. 이로써 외무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내무는 통리군국사무아문의 양립 체계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따라 새로 설립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관제와 관할 업무를 새로 정하여 알린 것이 바로 이 장정의 내용이다. 또한 이 기구는 1887년 4월 27일에 한 차례 조직 개편이 이루어졌는데, 그 결과 변화된 조직의 구성과 업무의 내용이 부록인 속장정에 기재되어 있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장정』(『통서장정(統署章程)』 또는 『장정』으로도 부름)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청구기호: 奎15323·15324·20515·20571·21783). 그 내용상 본문인 (원)장정과 부록인 속장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앞 부분에 나오는 (원)장정은 1882년 아문이 처음 창설될 때의 조직과 업무에 대해 규정해 놓은 내용이다. 서문에서는 아문의 창설 취지를 설명하고 있으며, 뒤이어 총 22개 조목에 걸쳐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조직 구성과 직원 현황, 그리고 관할 업무에 대해 나열하고 있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은 장교사(掌交司) · 정각사(征榷司) · 부교사(富敎司) · 우정사(郵程司)와 동문학(同文學)의 4사(司) 1학(學) 체제로 구성되어 있다.
항목별로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제1~5조: 4사 1학의 관할 업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장교사(제1조)는 각국과 체결한 조약의 비준, 조문의 해석과 실행 및 담판과 더불어 외교 사절의 파견 등을 관장하도록 하여 대외 관계를 전담하는 외무 부서의 핵심으로 규정되었다. 정각사(제2조)는 해관(海關)과 변관(邊關)을 통한 관세 징수와 관련된 각종 업무를 맡도록 하였는데, 그 내용으로는 세칙(稅則)의 결정과 관세 징수, 화물의 출입과 각 항구의 등대일지[燈誌] 등에 대한 종합 관리 및 통상 장려를 위한 상인의 초빙 등이 제시되고 있다. 부교사(제3조)는 이원(利源)을 개척하기 위한 화폐 주조 · 개광(開鑛) · 제조(製造) · 잠상(蠶桑) · 목축(畜牧) 등의 업무를, 우정사(제4조)는 전보(電報) · 역전(驛傳) · 철로 · 수륙 통행로 등의 운도(運道)와 관련된 제반 사무를 취급하도록 규정되었다. 마지막으로 동문학(제5조)은 외국어와 정치 · 경제의 학습 등을 중심으로 하여 인재 양성 관련 업무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② 제6~9조: 소속 관원의 명칭과 정원 등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 전체를 총괄하는 독판(督辦) 1명(제6조)과 각 사를 대표하는 책임자로 독판을 보좌하는 협판(協辦) 4명(제7조), 그리고 각 사에서 협판을 보좌하는 참의(參議) 4명(제8조) 및 각 사에 소속되어 문서의 기록과 작성 및 수취와 발송을 담당하는 주사(主事)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제9조).
③ 제10~14조: 5개 부처별 주사의 정원과 업무 현황을 설명하고 있다. 즉 장교사의 2명(제10조)과 정각사의 2명(제11조), 부교사의 3명(제12조), 그리고 우정사의 1명(제13조)에 대하여 각각 할당 업무의 상세 내용을 기술하고 있으며, 동문학의 경우 장교(掌敎) 1명이 업무를 총괄하고 그 밑에 주사를 두도록 규정하였다(제14조).
④ 제15~22조: 인신(印信)의 관리나 업무 관련 세부 사항 추가 논의 규정 등과 같이 관서의 운영 및 소관 사무의 처리와 관계된 각종 보조적 사항들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다음으로 1887년 조직 개편시 변화된 내용을 반영하여 4월 27일자로 공포된 속장정은 총 13개조로 구성되어 있다. 이때 이루어진 조직 개편은 기존의 4사 1학을 총무사(總務司) · 통상사(通商司) · 교섭사(交涉司) · 번역사(飜譯司) · 기록사(記錄司) · 회계사(會計司)의 6사 체제로 개편하는 것이 그 골자이다. 장정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제1~4조: 소속 관원의 명칭과 인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부서의 업무 전체를 총괄하는 독판 1명(제1조)과 각 사의 대표자인 협판(제2조) 및 그 아래의 보좌역인 참의(제3조), 그리고 각 사 소속으로 기록 업무 등을 관할하는 주사에 대해 언급하는데, 주사의 경우 인원이 24인으로 대폭 증가한 것이 눈에 띈다(제4조).
② 제5~10조: 소속 부서에 대한 상세 설명이 기재되어 있으며, 각 조항별로 부속 조항들이 다수 첨부되어 있다.
먼저 총무사는 조약의 개정과 담판, 각종 훈령서와 외교문서의 작성 및 외국 파견 사신(전권 위임) 관련 업무 등을 관장하도록 규정되었다(제5조 15항). 다음으로 통상사는 통상과 항해 조약, 외국인의 내지채판(內地採辦) 및 조선 상인의 대외 무역 등과 관련된 업무를 관할하도록 하였으며(제6조 12항), 교섭사는 외국 외교관의 국왕 접견과 연회, 외국 공사관과 영사관의 관지(館地) 및 조계(租界) 관련 사무, 그리고 각국 공사와 영사의 이력 관리 및 내국인 · 외국인에 대한 호조(護照) 발급 등과 관계된 직무를 처리하도록 규정하고 있다(제7조 16항). 번역사는 외국 공관과의 왕복 공문의 번역 및 외국 외교관들에 대한 통역을 관장하였으며(제8조 12항), 기록사의 경우 교섭 문건이나 조약, 국서 및 외교 왕복 서한, 그리고 아문 각 사(司)의 생산 문서 및 재외 공관의 보고서 등에 대한 기록 · 보존을 맡았다(제9조 15항). 마지막으로 회계사는 해관 · 변관의 관세 수입과 연계하여 아문의 지출 경비와 직원의 월급 등과 같은 회계 업무를 관장하도록 하였다(제10조 13항). ③제11~13조: 행사 주관이나 근무시일 및 세부 규정 마련 등과 관계된 각종 보조적 사항들을 열거하고 있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은 기존 통리기무아문을 보다 외교에 방점을 두어 개편한 것이지만, 창설시의 4사 1학 체제는 부교사와 우정사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외교적인 업무와는 다소 차이가 있는 부국강병, 곧 자강(自强)과 관련된 업무도 관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애초에 이 아문의 창설 자체에 청의 영향력이 일정부분 작용했으며, 그렇기에 외교 고문을 통하여 양무(洋務)를 관장하던 청의 모델이 그 편제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1887년의 개편을 통해 변화한 6사 체제는 자강 관련 대내적인 업무가 분리되고 보다 외교 분야에만 전문적으로 특화된 모습을 보여주며, 외교 관련 직무의 내용 또한 보다 세밀하게 규정되고 있다. 이것은 청의 총리아문보다는 일본의 외무성에 보다 가깝게 변화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바로 이전 해인 1886년에 개편된 일본 외무성의 체계를 보면, 총무국(總務局) · 통상국(通商局) · 취조국(取調局) · 번역국(飜譯局) · 기록국(記錄局) · 회계국(會計局)의 6국 체제로, '사'와 '국'이라는 부서명 및 '취조국'과 '통상국'의 명칭 정도 이외에는 동일한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당시 청의 내정간섭이 심화하는 상황에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 친청적 입장인 독판 김윤식(金允植)을 매개로 청의 영향을 크게 받는 조직으로 변모하자 고종과 민씨 척족 세력이 1885년에 통리군국사무아무을 계승하는 내무부(內務府)를 창설하고 외교 업무를 그 관할 사무로 명시함으로써 이에 대항하려 시도하는 상황과도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내무부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고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고유 영역인 외교 업무도 일정 부분 침범하게 되면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영향력이 약해지고 유명무실화된 결과로 조직이 축소된 것이다. 아울러 내정간섭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청국 모델을 버리고 일본 모델을 채택하고자 한 전략도 일정 부분 작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894년 갑오개혁의 결과 6월 28일에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은 폐지되고 외무아문(外務衙門)이 창설되는데, 외무아문은 그 산하에 총무국 · 교섭국 · 통상국 · 번역국 · 기록국 · 회계국을 두어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6사를 6국으로 그대로 계승하였으며, 다음 해 외부(外部)로 개편되었다.
본 장정은 1882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창설 시의 법규를 다룬 본문과 1887년의 조직 개편 결과 변화된 법규를 다룬 속장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통해 개항기 조선에서의 근대적 외교 부서의 탄생과 그 전문화의 과정, 곧 외교와 자강 업무를 관할하는 청국 모델에서 보다 외교 업무에 전문화된 일본 모델로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에는 청의 내정 간섭이 심화되는 정치적 상황과 그에 대한 조선의 고민과 대응이라는 요소도 간접적인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