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군부 ()

서울 삼군부 청헌당 정면
서울 삼군부 청헌당 정면
조선시대사
제도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설치되었던 최고 군령 기구.
이칭
이칭
무부(武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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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삼군부는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설치되었던 최고 군령 기구이다. 일종의 최고군사위원회와 같은 기구로 의정부와 동격이었다. 비변사를 기반으로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세도 가문을 견제하고 군비 강화 등 권력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설치하였다. 비변사가 관장하던 군사적인 업무와 궁성의 수호, 서울의 치안을 담당하였다. 국방과 군사력에 관계되는 주요 관직의 인사권, 군제 조정과 각종 경제적 권한도 장악하였다. 대원군의 하야와 함께 유명무실한 기구로 전락하였다가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면서 폐지되었다. 대원군과 운명을 같이한 기구이다.

정의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설치되었던 최고 군령 기구.
개설

흥선대원군 집정기인 1868년(고종 5) 3월에 복설되어 군사업무와 이에 필요한 재원을 총괄했던 최고 군령기구이다. 대원군이 병인양요 이후 본격화한 군비 강화와 그에 소요되는 재원을 모두 직접 장악하고 주도하기 위해 복설하였으며, 그의 실각과 함께 폐지되었다.

복설 배경과 경위

대원군이 집권 초기에 단행한 제반 정책은 전제군주 체제를 확고히 하려는 데 역점을 두고 있었다. 이러한 대원군의 정책 구상은 표면상 중앙정치기구의 개편을 통해 국초 선왕의 제도를 회복한다는 데 명분을 두고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비변사를 기반으로 60년간 정권을 독점해온 세도 가문을 견제하고 자신의 권력 기반을 구축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는 우선 1864년(고종 1) 2월에 비변사의 기능을 축소시켜, 군사업무는 비변사, 나머지 군국사무는 의정부에서 분담하게 하였다. 이때의 명분은 국초의 제도를 복원하는 데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 중수되는 의정부 맞은편에 삼군부가 자리 잡아야 했다. 그래서 1865년 5월에 당시 의정부 맞은편에 있던 예조의 자리가 삼군부의 자리라 하여 그 자리에 훈국(訓局)의 신영(新營)과 남영(南營) · 마병소(馬兵所) 및 오영(五營)의 주사소(晝仕所)를 합설해 삼군부라 칭하고, 예조는 한성부 자리로, 한성부는 훈국의 신영 자리로 이전하였다. 그러나 이때 군령권(軍令權) 또는 군사권(軍事權)을 갖는 최고 군사기구가 설치된 것은 아니었다.

삼군부의 복설은 병인양요가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병인양요로 서양의 무력 침공을 경험한 대원군은 종래의 안이하고 고식적인 군사정책을 지양하고 국가정책의 기본 방향을 외침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적 측면으로 전환하였다. 강화도에 진무영을 설치하여 한강 입구를 방어하는 주요 병영으로 육성하는 한편, 북방 러시아의 남하에 대비하여 화포군을 대대적으로 양성하고 무기와 전선을 제조하는 등 군사력 강화에 전력을 다하였다.

병인양요 이후, 군비 증강에 온 국력을 집중하게 되자 국사 중에 군사 분야의 비중이 급격하게 높아졌다. 게다가 이때는 경복궁 영건 사업이 마무리되고 국왕이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이어(移御)할 것이 결정됨으로써 대원군의 정치적 권위가 더욱 높아진 상황이었다. 이에 1868년(고종 5) 6월 삼군부를 복설하여 군사업무를 전담하는 독립 기구로 발족되었다.

조직

삼군부의 조직은 시임 의정(時任議政)과 원임 의정(原任議政)이 도제조(都提調), 병조판서와 좌우포도대장이 제조, 원임의정이 영사(領事), 현 · 전직 장신(將臣)이 판사(判事) 또는 지사(知事),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의 대장과 총융사가 유사당상(有司堂上)을 겸하도록 규정되었다. 각 군영의 대장은 대등한 유사당상의 직책을 띠고 있기 때문에 일종의 협의체라는 인상을 갖게 한다. 따라서 제도적으로는 삼군부가 마치 군영대장의 협의체인 것처럼 보이지만 대원군이 이들보다 상위에서 직접 지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기능

삼군부가 관장하던 임무는 1864년(고종 1) 2월 의정부와 비변사의 기능을 분담시키면서 비변사가 관장하기로 했던 사항들이었다. 즉 삼군부는 군사적인 업무와 함께 궁성의 수호, 서울의 치안을 담당하였다. 아울러 국방과 군사력에 관계되는 주요 관직의 인사권, 군제 조정, 포수 양성, 주교사 관할과 같은 각종 경제적 권한도 관장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대원군이 병인양요 이후 군비 강화와 그에 소요되는 재원을 모두 직접 장악하고 주도하기 위해 삼군부를 복설했음을 말해준다.

변천과 현황

삼군부는 대원군이 집권하는 동안에 군사최고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러나 1873년(고종 10) 11월 대원군이 하야하면서 삼군부는 유명무실한 기구로 전락하였다. 이후 정부가 1880년(고종 17) 12월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면서 새로운 건물이 필요하게 되자 그동안 거의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던 삼군부의 폐지를 공식 확인하고 그 건물에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였다. 이후 1882년(고종 19) 6월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대원군이 복귀하자 다시 부활되었지만 그가 실각하자 다시 기능을 상실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22일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이 설치되고 군사업무 등 모든 내정(內政)을 관장함에 따라 기무처(機務處)와 함께 통합됨으로써 5개월 만에 폐지되고 말았다.

의의와 평가

삼군부 복설이 갖는 가장 큰 의의는 그동안 군령(軍令)을 행사하는 데 독자성이 강했던 각 군영의 대장들을 삼군부의 유사당상으로 포괄함으로써 각 군영 간의 협조나 역할 분담을 적절히 수행할 수 있는 최고의 군령 기관을 만들었다는 데 있다. 삼군부의 설치는 비변사와 의정부에서 군사권을 포함한 모든 국정을 총괄하던 때와 같이 문무 양권(兩權)이 한 곳으로 집중되는 모순을 배제하면서 업무의 전문성을 제고시켰다는 측면에서, 또 외침의 위협에 직면하고 있던 당시의 시대상황의 측면에서 바람직한 제도의 시행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삼군부는 일종의 최고군사위원회와 같은 기구였으며, 직계상으로는 의정부와 동격이었다. 그러나 의정부의 시임의정이 도제조를 겸하고 병조판서와 포도대장이 제조를 겸하게 됨으로써 군사정책 수립이나 기타 업무 수행면에서 의정부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삼군부를 주도하는 유사당상인 4군영의 대장에 대한 인사권을 의정부가 통제할 수 있었기에 제도적으로도 여전히 의정부가 삼군부보다는 위에 있는 셈이다. 더구나 삼군부는 대원군이 자신의 분신이라고 여길 정도로 그의 입김이 강하였다. 따라서 삼군부를 기반으로 무장들이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고, 대원군의 실각과 함께 삼군부도 함께 폐지되는 운명에 처하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일성록(日省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대원군집권기 부국강병정책 연구』(연갑수, 서울대출판부, 2001)
「대원군집정기 삼군부 설치와 그 성격」(이욱, 『군사』 32, 1996)
「고종대의 삼군부 연구」(최병옥, 『군사』 19, 1989)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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