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청년회(大朝民國靑年會)
회장 여운형(呂運亨), 부회장 유경환(柳璟煥), 총무 임재호(任在鎬), 서무부장 김석황(金錫璜), 재무부장 민제호(閔濟鎬), 출판부장 주요한(朱耀翰), 교통부장 이송명(李松明), 토론부장 박헌양(朴憲陽), 운동부장 박천병(朴天秉) 등 150여명의 회원으로 조직되었으며, 그 가운데 96명은 상해 거주자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도 지부원을 파견하여 국내외를 내왕하며 군자금모금에 박차를 가하였다. 특히, 민족의 이름으로 공재(貢財)의 의무를 강조하면서 독립군자금 모금의 성원을 당부하여, 3·1운동 뒤 국민들의 성원으로 8∼9개월 동안에 많은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해체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32년까지 존속하였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