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광지(光之), 호는 첨재(忝齋), 산향재(山響齋), 박암(樸菴), 의산자(宜山子), 견암(蠒菴), 노죽(露竹), 표암(豹菴), 표옹(豹翁), 해산정(海山亭), 무한경루(無限景樓), 홍엽상서(紅葉尙書). 서울에서 강현(姜鋧)의 3남 6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생모는 광주이씨이다.
후손으로는 부인 진주유씨(晉州柳氏) 소생인 강인(姜亻寅), 강흔(姜俒), 강관(姜亻寬), 강빈(姜儐)과 나주나씨(羅州羅氏) 소생의 강신(姜信)이 있다. 강신과 그의 아들 강이오(姜彛五), 강흔의 손자 강진(姜晉)이 그림으로 이름이 있었다.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과 교육, 자형 임정(任珽)의 영향을 받았다. 처남 유경종(柳慶種), 친구 허필(許佖), 이수봉(李壽鳳)과 절친했다. 또한 이익(李瀷), 심사정(沈師正), 강희언(姜熙彦) 등 여러 사람들과 교유하였다. 그에게서 그림을 배운 제자로는 김홍도(金弘道)와 신위(申緯)가 주목된다.
8세에 시를 짓고 13, 14세에 쓴 글씨를 얻어다 병풍을 만든 사람이 있을 정도로 일찍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32세 때 가난으로 안산(安山)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처가인 진주유씨 집안으로부터 물질적 · 정신적 도움을 받으며 그의 예술 세계를 형성해 갔다. 그는 일찍부터 안산에 세거하고 있던 이현환(李玄煥), 이광한(李匡煥) 등 이익(李瀷)집안의 남인 지식인들과 교유하면서 시와 서화에 전념하였다.
61세가 되던 해 영조의 배려로 처음 벼슬길에 올랐다. 64세에 기로과(耆老科)에, 66세에는 문신 정시에 수석 합격하였다. 관직은 영릉 참봉(英陵參奉), 사포 별제(司圃別提), 병조 참의,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등을 두루 거쳤다.
69세에 정조(正祖) 어진 제작의 감독을 맡았다. 이 때 당시 화원 한종유(韓宗裕), 이명기(李命基)에게 초상을 그리게 하였다. 할아버지 강백년(姜柏年), 아버지 강현에 이어 71세 때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감으로써 이른바 삼세기영지가(三世耆英之家)의 영예를 얻었다.
1785년 중국 건륭제의 나이 75세, 즉위 50년을 축하하는 천수연에 참석하기 위해 파견된 사행단의 부사(副使)가 되어 북경을 다녀왔다. 76세 때 금강산 유람을 하였다. 이 때마다 기행문과 실경 사생을 남겼다. 그의 생애에 있어서 관직 생활과 예술 활동은 영 · 정조의 배려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더욱이 51세 때 영조가 신하들에게 그를 보호하여 그림을 잘 그린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이른 일을 계기로 강세황이 오랫동안 절필(絶筆)했던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시 · 서 · 화 삼절(三絶)로 일컬어졌으며, 남달리 높은 식견과 안목을 갖춘 사대부 화가로서 스스로 그림 제작과 화평(畵評) 활동을 통해 당시 화단에서 ‘예원의 총수’로서 중추적인 구실을 하였다. 특히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의 정착에 크게 기여하였다. 진경산수(眞景山水)의 발전, 풍속화 · 인물화의 유행, 새로운 서양 화법의 수용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은 1757년 당시 개성유수로 부임한 오수채(吳遂采)의 초청으로 개성을 여행하며 제작한 실경산수화이다. 이 그림의 독특한 구도, 서양식 원근법, 대담한 채색법 등은 그가 서양화법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평론가로서 중국과 조선의 수많은 서화가들의 작품에 대한 품평을 남겼다. 그는 사군자 부분에서도 선구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는 역대 서법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일생에 걸쳐 수많은 법첩과 필적을 통해 서예를 배웠다. 그의 글씨는 이왕(二王: 왕희지 · 왕헌지)을 근간으로 삼아 미불(米芾), 조맹부(趙孟頫)의 서법을 연마하여 해 · 행 · 초서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그의 서화가 개성적이고 진취적인 성향을 보이는 것은 서화의 정통성과 올바른 방법에 관한 관심에서 나온 것이다. 즉, 참신하고 독자적인 서화관에 의해 실천적으로 문제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일생 동안 진지하게 추구했던 서화의 세계는 궁극적으로 습기(習氣) · 속기(俗氣)가 없는 글씨와 문인화의 경지였다.
그림의 소재는 산수 · 화훼(花卉)를 주로 다루었다. 만년에는 묵죽(墨竹)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의 작품은 전 시기를 통해 진정한 문인화, 격조 높은 수묵화에 도달하기까지 발전적으로 전개되었다. 공간감의 확대, 담백한 필치, 먹빛의 변화와 맑은 채색 등으로 독자적인 화풍을 이룩하였다. 현존하는 작품은 상당수에 달하며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는 작품이 많아 체계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그의 작품으로는 「현정승집(玄亭勝集)」, 『첨재화보(忝齋畵譜)』, 「지상편도(池上篇圖)」, 「방동현재산수도(倣董玄宰山水圖)」, 「벽오청서도(碧梧淸署圖)」, 『표현연합첩(豹玄聯合帖)』, 『표암첩(豹菴帖)』,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 「약즙산수(藥汁山水)」, 「삼청도(三淸圖)」, 『풍악장유첩(楓岳壯遊帖)』, 「피금정도(披襟亭圖)」, 「난죽도(蘭竹圖)」, 「묵죽팔폭병풍(墨竹八幅屛風)」, 「사군자병풍(四君子屛風)」, 『임왕서첩(臨王書帖)』, 「동기창임전인명적발(董其昌臨前人名迹跋)」, 「제의병(祭儀屛)」 및 중국 사행시 제작한 『수역은파첩(壽域恩波帖)』, 『영대기관첩(瀛臺奇觀帖)』, 『사로삼기첩(槎路三奇帖)』 등 다수가 전한다. 54세 때 쓴 자서전 『정춘루첩(靜春樓帖)』에 「표옹자지(豹翁自誌)」와 함께 수록된 2폭의 자화상, 70세 「자화상」을 비롯하여 7, 8여 폭의 초상화를 남겼다.
묘소는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도하리에 있고, 시호는 헌정(憲靖)이다. 1979년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그의 문집인 『표암유고』를 영인․출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