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강세황이 직접 그린 자화상과 이명기(李命基)가 그린 초상화 2점이다. 이 중 이명기가 그린 강세황 초상(보물, 1975년 지정)은 국립중앙박물관 기탁품이다. 자화상은 검은색 오사모(烏紗帽)에 짙은 옥색 도포 차림을 한 좌안칠분면(左顔七分面)의 전신부좌상(全身趺坐像)이다. 이러한 특이한 차림새에 대한 해답은 화면 상부에 적힌 자필의 찬문에서 얻을 수 있다. 즉 오사모를 쓰고 야복(野服)을 입은 것은 곧 마음은 산림(山林)에 있으나 이름은 조적(朝籍)에 있음을 나타낸 것이라 한다.
얼굴 표현은 육리문(肉理文)에 따라 드러나지 않게 처리했다. 그리고 오목한 부위는 입체감을 살리기 위해 음영법을 사용하였다. 옷주름 처리에 있어서도 옥색 도포에 짙은 옥색 선을 긋고 거기에 덧붙여 같은 빛깔의 선임을 바탕의 빛보다는 짙게, 그러나 구륵선보다는 옅게 하여 선의 결을 따라 칠하였다.
사모관대(紗帽冠帶) 정장본(正裝本)은 최근 발굴된 「계추기사(癸秋記事)」를 통해 화원 이명기가 1783년 강세황의 기로소 입사를 기념하기 위해 정조의 명으로 그린 것으로 확인되었다. 앞에서 서술한 자화상과 안면의 전체 각도에서부터 시선 방향까지 얼굴 전체가 똑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다. 이 초상화는 명암법의 완연한 사용이 눈에 뜨인다. 옷주름 처리 역시 앉음새로 인해서 생긴, 흉배 밑과 양 무릎 사이의 그늘과 흉배 부위의 양팔과의 연접 부분은 어둡게 채색하였다. 이는 그림자에 대한 경험적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사모관대 정장본의 오른쪽 위 여백에는 “豹菴姜公 七十一歲眞(표암강공 칠십일세진)”이라는 제목과 조윤형(曹允亨)이 쓴 어제제문(御製祭文)이 적혀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툭 트인 흉금 고상한 운치, 소탈한 자취는 자연을 벗하네. 붓을 휘둘러 수만 장 글씨를 궁중의 병풍과 시전에 썼네. 경대부의 벼슬이 끊이지 않아 당나라 정건(鄭虔)의 삼절을 본받았네. 중국에 사신으로 가니 서루에서 앞 다투어 찾아오네. 인재를 얻기 어려운 생각에 거친 술이나 마 내리노라[疎襟雅韻 粗跡雲煙 揮毫萬紙 內屛宮牋 卿官不冷 三絶則虔 北槎華國 西樓踵先 才難之思 薄酹是宜].”
조선시대 전반기 초상화에는 거의 나와 있지 않던 손이 이 초상화에서는 얼굴 · 의복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구성 요소로서 비례의 어긋남이 없이 여실히 재현되어 있다. 이 점은 회화사적으로 볼 때 의미 있는 진전이라고 하겠다.
한편 「계추기사」를 통해 이 초상화의 제작과정, 재료구입비, 인건비 등을 자세히 알 수 있게 되었다. 기사에 의하면, 사모관대 정장본, 반신상을 포함한 초상화 3점의 채색정본을 완성하는데 10일, 장황(裝潢)에 3일이 소요되었고, 비용으로는 초상의 바탕인 생명주 구입비 10냥, 이명기에게 준 사례비 10냥, 족자 재료비와 공임 10냥 등 모두 50냥 내외가 소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