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황 ()

회화
개념
서화를 족자 · 병풍 · 두루마리 · 책 · 첩 등의 형태로 꾸미는 표지장식. 장황 · 장황.
이칭
이칭
장황(粧䌙), 장황(裝潢)
정의
서화를 족자 · 병풍 · 두루마리 · 책 · 첩 등의 형태로 꾸미는 표지장식. 장황 · 장황.
개설

장황(粧潢·粧䌙·裝潢)은 그림이나 글씨 등 서화에 옷을 입히는 것에 비유되기도 한다. 종이와 비단 같은 바탕재에 그려지고 표현되는 서화를 보다 오래도록 보존·보관·수장(收藏)하기 위하여 배접(褙接)하는 방법이 생겨났고, 서화의 내용이나 주제, 색감과 구성에 따라 외형과 주변을 어울리게 장식하여 완상물로서 형태를 갖추기 위해 족자·병풍·두루마리[卷]·첩·서적 등 다양한 형태로 꾸미게 되었다. 장황은 사용 재료·색·문양·크기·비율·장신구 등을 다르게 하여 꾸미는 것이 가능하며, 한국·중국·일본의 장황은 각 나라의 문화적 특성이나 미감에 따라 특색이 다르게 나타난다.

연원 및 변천

장황의 역사는 중국에서 시작되어 불교의 전래와 함께 한국과 일본으로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당대(唐代) 장언원(張彦遠)은 『역대명화기(歷代名畫記)』에서 중국 장황의 역사가 진대(晋代)부터 시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당육전(唐六典)』에는 “숭문관(崇文館)에 장황장(裝潢匠) 5인이 소속되어 있다.”라는 기록이 있어 당대에 장황 기술을 가진 장인이 활동하고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에는 명(明) 주가주(周嘉冑)의 『장황지(裝潢志)』, 문진형(文震亨)의 『장물지(裝物志)』, 청(靑) 주이학(周二學)의 『상연소심록(賞延素心錄)』과 같은 장황 관련 저술들이 남아 있다. 한국에서 서화의 장황이 처음 시작된 시기에 대하여 정확한 기록이나 현전 유물이 없어 확언하기 어렵지만, 중국에서는 3세기 이후, 일본에서는 6세기 정도에 장황된 작품과 기술이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었다고 보고 있으므로, 한국 장황 문화의 시작 시기는 3~4세기부터 6세기 사이로 추정할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 진평왕(眞平王) 43년(621)에 “당(唐)의 고조(高祖)가 사신 유문소를 신라에 보내어 책과 그림 병풍, 비단 300필을 전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중국으로부터 병풍이 유입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천무천왕(天武天皇) 주조 원년(朱鳥 元年, 686년)조에는 신라에서 일본의 천왕에게 보낸 선물의 품목 중 병풍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삼국시대에 이미 중국과의 문화적·종교적 교류를 통해 병풍 등의 장황물들이 유통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내용

장황은 넓은 의미로 서화를 지지해 주며, 장식하는 형태 및 기술 등을 총칭하여 일컫는 용어이다. 즉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병풍이나 족자, 두루마리, 책, 첩, 액 등으로 꾸며진 서화를 ‘장황’된 서화라고 할 수 있으며, 넓게는 그 제작 기술까지도 포함한다. 서지학계에서는 ‘책(冊)을 장정(裝訂), 제책(製冊)한다’는 뜻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장황의 뜻을 글자로 살펴보면, 단장할 ‘장(粧)’ ‘장(裝)’, 책 꾸밀 또는 끈으로 묶을 ‘황(䌙)’ 또는 염색할 ‘황(潢)’을 사용하기도 한다. 끈으로 묶는다는 것은 서책을 오침안정법 등으로 묶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염색할 황은 ‘황벽나무에서 추출해 낸 염료로 종이를 염색하고 이 종이를 서사(書寫) 재료로 사용하여 책을 제작한다’라고 풀이할 수 있다. 황색으로 염색한 두루마리 경권을 황권(潢卷)으로 칭하는 것도 이러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황색을 얻기 위한 염료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황벽나무에서 추출한 염액은 벌레나 균을 막는 방충 효과를 지니고 있음이 과학적으로도 입증되었고 조선시대 서책(書冊) 중에도 황벽으로 염색한 종이에 능화문을 찍은 예를 쉽게 볼 수 있다. 황(潢)자는 염색(染色) 관련 뜻 외에도 ‘바깥쪽에 테두리를 하고 안쪽에 꾸밈을 하는 것’, ‘둘레의 꾸밈’으로 풀이되기도 한다. 장황의 여러 형식 중 두루마리, 족자, 책의 형식은 그 역사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루마리 형식은 불교의 경권, 사경의 제작·유포와 깊은 관련이 있으며, 족자와 같이 세로로 벽 등에 걸 수 있는 형식의 시원은 티베트의 초기 불교 사원에서 야외용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중국에 불교가 전해지면서 함께 전래된 것으로 추측된다. 불교가 종교적 역할을 하는 과정에서 삼보(三寶)의 하나인 불경이나 불화를 제작하게 되었고, 불경과 불화는 불교의 전래와 함께 각 나라에 전파·유포되게 되는데, 그 전래 시기 역시 장황의 시작과 관련이 깊다. 제작 방법에서도 뒷면을 배접하여 본지를 보호하고 아래위에 봉과 축을 달아 이동 시 감기 편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축을 다는 두루마리는 오늘날에도 그대로 제작되고 있는 형태이다.

족자는 불구 중의 하나인 번(幡)에서 시원적 형태를 볼 수 있다. 세로로 길게 비단을 늘어뜨리는 깃발과 같은 형태로, 불전을 장엄하기 위하여 불전 내의 기둥이나 법회가 진행되는 뜰 가운데 세우거나 혹은 천개나 탑의 상륜부에 매달아 놓는 것이다. 번은 원래 인도에서 군기(軍旗)로 사용되던 것이 불교의 장엄구로까지 사용 범위가 확대되어 신앙적인 의식물로 자리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족자의 또 다른 시원적 형태는 중국 후난 성[湖南省] 창사 시[長沙市]의 초묘(楚墓)에서 출토된 백화(帛畵)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백화는 관을 장식하기 위한 것으로 회화적 묘사를 보여 주고 있는데, 상단부의 축과, 걸 수 있는 끈을 연결한 흔적을 볼 수 있다.

병풍도 두루마리, 족자와 함께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다. 병풍의 초기 형태는 중국 주나라의 천자가 높이 8척의 판에 자루가 없는 여러 개의 도끼를 도안식으로 그리거나 수놓아 뒷벽을 장식하였던 것에서 비롯된 부의(斧扆)로 보고 있다. 부의는 정치적 상징물로 사용된 것으로, 그 형태는 하나의 판과 다리로 구성된 통병풍 형태로 추측된다. 지금은 그림이나 글씨를 여러 개의 판에 붙여 연결한 연결 병풍이 일반적인 병풍 장황 형태이다.

참고문헌

『배첩장』(국립문화재연구소, 민속원, 2013)
『꾸밈과 갖춤의 예술 장황』(국립고궁박물관, 2008)
「장황 문화의 뜻과 길」(조흥윤, 『고문화』 33, 1988)
「장황: 한국에서의 동아시아 그림 처리법」(조흥윤, 『동방학지』 49,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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