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2년 간행한 『곡부공씨족보(曲阜孔氏族譜)』와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이 쓴 「고려문하시랑평장사고산공공묘비(高麗門下侍郞平章事孤山孔公墓碑)」에 따르면, 공은은 1380년(우왕 6)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문하시랑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던 것으로 전한다. 그의 형 공부(孔俯)가 1376년(우왕 2)에 급제하는 것으로 보아, 공은도 응시해서 합격하였다고 하면 이 시기가 맞을 것이다. 그러나 「전조과거사적(前朝科擧事蹟)」이나 「등과록전편(登科錄前篇)」에 수록된 염흥방(廉興邦)과 박형(朴形)을 좌주(座主)로 하는 우왕 6년의 과거 합격자 33명 가운데에서 공은의 이름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 합격 시기나 합격 여부는 의문이다.
평장사 벼슬을 역임한 것으로 전하고 있는데, 이것도 사실로 보기 어렵다. 평장사는 재상급 벼슬로서 우왕 6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을 시작하여 고속 승진하더라도 고려 말에 이 직급의 벼슬에 이르기는 어렵다. 그의 형 공부가 1391년(공양왕 3) 6월에 정4품의 예조총랑(禮曹摠郞)으로 재직하고 있는 것을 보면 공은의 벼슬은 이 직급보다 아래였을 가능성이 높다.
공은은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이었던 것으로 전한다. 그의 문집 『고산선생실기(孤山先生實紀)』에서 척불소(斥佛疏)를 올렸던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 때문에 예안(禮安) 의금도(依金島)에 유배되었다고 전한다. 고려 말 김초(金貂) 등이 척불소를 올렸다가 수감되는 등 처벌을 받은 사례를 감안하면 공은의 유배도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목은 이색은 유배 가는 그에게 「한풍시(寒風詩)」와 「청산백설도시(靑山白雪圖詩)」를 지어 주었다고 한다.
조선 건국 후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공은은 이에 응하지 않아 다시 유배를 갔다. 순천의 낙포로 이배(移配)되어 자신을 고산(孤山)이라 하고, 여기에서 생을 마쳤다. 『고산선생실기』에는 「순천적소시(順天謫所詩)」가 남겨져 있다.
공은의 문집인 『고산선생실기』에 순천 유배 때 지은 시 한 수가 전하고 있다. 척불 상소를 올렸다고 하였으나, 그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경현사(景賢祠)와 두문서원(杜門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