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 후기 감찰대부를 역임한 문신 · 개혁가.
이칭
이명
김두(金㺶)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주요 작품
신 원외를 중국에 보내며[送辛員外赴上國]
주요 관직
감찰대부|밀직제학
내용 요약

김규는 고려 후기 감찰대부(監察大夫)를 역임한 문신이자 개혁가이다. 충목왕대 서연(書筵)에서 시독관으로 활동하였고, 정치도감(整治都監)의 정치관(整治官)이 되어 개혁에 참여하였다. 공민왕 초에 경복흥(慶復興) 등과 함께 조일신(趙日新)을 탄핵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홍건적 2차 침입 때에는 절영책(岊嶺柵)을 수비하기도 하였다. 신돈이 실각하여 수원으로 유배된 후, 왕명에 따라 임박(林樸)과 함께 신돈을 처형하는 임무를 맡았다.

정의
고려 후기 감찰대부를 역임한 문신 · 개혁가.
가계 및 인적 사항

본관과 가계는 확인되지 않는다. 김규의 이름이 『고려사(高麗史)』의 관련 기사에서는 ‘김규(金㺩)’로 표기되었으나,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를 비롯해 『치평요람(治平要覽)』,, 『동국통감(東國通鑑)』, 『동사강목(東史綱目)』 등의 사서에서는 ‘김두(金㺶)’로 표기하고 있다.

김규의 이름자 ‘두(㺶)’에 대해서는 1744년(영조 7) 4월 9일 경연에서도 거론될 정도였다. 이날 경연에서 『동국통감』을 진강하다가 고려 충목왕대 기사를 읽는 중 김규의 이름자 ‘두(㺶)’에 이르러, 참찬관 이광보(李匡輔)는 이 글자가 『오거운서(五車韻書)』나 『자휘(字彙)』 등 사전에서 찾을 수 없는 글자로 옛사람이 글자를 만들어 이름자로 쓴 듯하다고 왕에게 대답하였다.

주요 활동

김규는 1344년(충목왕 즉위년) 6월 서연(書筵)에 참여하면서부터 정치 활동을 하였다. 이때 김규는 지평(持平)의 신분으로 서연에 참여하여 시독관(侍讀官)으로 활동하였다.

1347년(충목왕 3) 2월, 정치도감(整治都監)이 설치되어 개혁을 추진할 때, 김규는 정치관(整治官)으로 개혁에 참여하였다. 같은 달 18일부터 김규는 양광도 안렴사(楊廣道按廉使)로 파견되어 토지를 측량하는 업무를 감독하였다. 이때 김규는 이천현(利川縣)의 향리(鄕吏)가 당시 권력층이었던 정승 채하중(蔡河中)주1 윤계종(尹繼宗) 등에게 공전(公田)을 뇌물로 준 사실을 밝혀냈다. 그 처벌로 향리의 귀를 잘라 이를 교훈으로 삼기 위해 도내에 돌리게 하는 한편, 이 사실을 정치도감에 보고하였다. 같은 해 4월에는 정치도감에서 처벌당한 기황후의 친족 기주(奇柱)가 양광도로 도망하여 오자 이를 붙잡아 송치하는 등 개혁에 적극적이었다.

공민왕 즉위 후 김규는 언론기구인 감찰사(監察司)에서 활동하였다. 감찰 집의(執義)였던 김규는 1352년(공민왕 1) 윤3월 지평 곽충수(郭忠秀), 장령(掌令) 경복흥(慶復興) 등과 함께 당시 권세가 조일신(趙日新)을 탄핵하였다. 조일신이 원나라에서 왕을 시종한 공을 믿고 횡포를 부리며 교만 방자하게 굴었다는 것이 탄핵 사유였다. 그러나 이 탄핵은 조일신과 가까운 사이였던 감찰대부 이연종(李衍宗)의 저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조일신은 전법사(典法司) 감옥에 갇혔던 그의 가노(家奴)들도 파옥하여 석방시키고, 김규 등을 탄핵하게 하였다.

김규는 1352년 10월 2일자 인사에서 개성윤(開城尹)으로 임명되었다가, 같은 달 6일자 인사에서는 다시 언론직인 주2으로 전보되었으며, 1354년 5월에는 감찰사의 수장인 주3로 재직하면서 국왕에게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보고하였다.

1361년(공민왕 10) 11월에는 주4의 직에 있으면서 홍건적의 2차 침입에 대비하여 정사도(鄭思道)와 함께 절령책(岊嶺柵)을 수비하였다. 1371년 7월 9일 신돈(辛旽)이 실각하여 수원(水原)으로 유배되자, 왕명에 따라 찰방사(察訪使) 임박(林樸)과 함께 수원으로 가서 신돈을 주5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저술

『동문선(東文選)』에 김규가 지은 「신 원외를 중국에 보내며[送辛員外赴上國]」라는 오언고시(五言古詩)가 실려 있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동국통감(東國通鑑)』
『동문선(東文選)』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단행본

김광철, 『원간섭기 고려의 측근정치와 개혁정치』(경인문화사, 2018)
홍영의, 『고려말 정치사 연구』(혜안, 2005)

논문

이익주, 「고려 충목왕대의 정치도감 재론」(『진단학보』 134, 진단학회, 2020)
신은제, 「14세기 전반 원의 정국동향과 고려의 정치도감」(『한국중세사연구』 26, 한국중세사학회, 2009)
이강한, 「정치도감 운영의 제양상에 대한 재검토」(『역사와 현실』 67, 한국역사연구회, 2008)
이정란, 「정치도감 활동에서 드러난 가(家) 속의 개인과 그의 행동방식」(『한국사학보』 21, 고려사학회, 2005)
변은숙, 「고려 충목왕대 정치도감과 정치세력」(『명지사론』 14, 15, 명지대, 2004)
민현구, 「정치도감의 설치 경위」(『국민대학교논문집』 11-1, 국민대, 1978)
주석
주1

정동행중서성이문소(征東行中書省理問所)의 우두머리이며 정4품의 벼슬.

주2

고려 시대에, 밀직사에 속한 정삼품 벼슬. 우승선을 고친 것으로, 충선왕 원년(1309)에 우승지로 고쳤다가 2년(1310)에 다시 이것으로 고쳤다.    우리말샘

주3

고려 시대에 감찰사(監察司)에 둔 으뜸 벼슬. 정삼품으로, 공민왕 11년(1362)에 어사대부를 고친 것이며 충렬왕 34년(1308)에 대사헌으로 고쳤다.    우리말샘

주4

고려 시대에, 밀직사에 속한 정삼품 벼슬. 충렬왕 때 추밀원 직학사를 고친 것이다.    우리말샘

주5

죄를 물어 죽임.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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