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앞서 12년만에 귀국한 서재필(徐載弼)의 특별연속강의를 청강해오던 배재학당 학생들이 서재필의 권고로 협성회(協成會)를 조직하고, 학생생활·사회문제·민족문제를 가지고 토론회와 강연회를 자주 열며, 의식을 계발하고 여론을 조성하여 사회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었다.
이에 자극을 받은 경성학당(京城學堂)의 학원(學員)들과 교동사범학교(校洞師範學校)의 즙목회 회원들, 공동소학교(公洞小學校)의 개연회 회원들이 1898년 2월에 만든 조직으로 역시 토론회와 연설회를 자주 개최하였다.
현공렴(玄公廉)·이승균 등이 중심이 되어 서재필·윤치호(尹致昊) 등 민족의 선각자이며 독립협회의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강연회를 자주 개최하고 “문명 개화하려면 신을 지키는 것이 가(可)하다.”, “상업을 흥왕(興旺)하게 하려면 국중(國中)에 은행을 많이 설치함이 제일 긴요하다.”,“인민의 지식을 확충하게 하려면 경향(京鄕) 간에 학교를 광설(廣設)함이 가하다.”는 등 구체적인 사회문제를 가지고 토론회를 가져 근대의식 계발에 힘썼다.
독립협회의 강력한 자매단체로 관민공동회(官民共同會)를 비롯하여 독립협회의 모든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독립협회 강제해산 후 이 조직도 활동이 쇠퇴하고 조직이 소멸되었다. 광무협회는 독립협회의 자극을 받아 학생과 교직원들이 하나가 되어 조직하였던 임의단체로 독립협회의 후원과 지도 아래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한 조직이었다.→독립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