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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근대사단체

 1940년 중국 충칭[重慶]에서 창설되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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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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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중국 충칭[重慶]에서 창설되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
영역닫기영역열기연원 및 변천
약칭 광복군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군대를 창설한다는 원칙하에, 1919년 「대한민국육군임시군제(大韓民國陸軍臨時軍制)」를 제정하여, 군대의 편제와 조직에 관한 법규를 마련하였다.
이와 함께 임시정부는 1919년 말 상하이[上海]에 육군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자체적으로 군사 간부를 양성하는 한편, 만주 지역의 독립군을 관할하에 두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지역적 차이·재정적 어려움 등으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다.
그 뒤 윤봉길(尹奉吉) 의거를 계기로 중국 정부의 지원과 협조를 받게 되자, 김구(金九)는 1934년에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한인특별반(이칭)주 01)을 설치하여 군사간부를 양성하였다. 그리고 중국의 중앙육군군관학교에서도 우리나라 청년들을 입교시켜 군사 인재의 양성에 힘썼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군사위원회(軍事委員會)를 설치하고 광복군 창설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일본군의 점령 지역이 중국 대륙으로 확대되면서, 임시정부는 여러 곳으로 피난처를 옮겨다니는 상황에서 여의치 않았다.
비로소 1940년 9월 17일 중국의 임시 수도였던 충칭에 정착하면서 광복군 총사령부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광복군 선언문」을 발표하여 “광복군은 한·중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며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광복군 창설의 취지를 천명하였다.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成立典禮)는 충칭의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거행되었으며, 총사령에 지청천[池靑天, 본명: 지대형(池大亨)], 참모장에 이범석(李範奭), 총무 처장에 최용덕(崔用德), 참모 처장에 채원개(蔡元凱), 부관 처장에 황학수(黃學秀), 경리 처장 겸 정훈처장에 안훈(安勳, 본명 趙擎韓), 훈련 처장에 송호(宋虎, 본명 宋虎聲), 군무 처장에 유진동(劉振東) 등이 각각 임명되었다.
그리고 총사령부 예하에 4개 지대(支隊)를 편성하였다. 제1 지대장에 이준식(李俊植), 제2 지대장에 김학규(金學奎), 제3 지대장에 공진원(公震遠), 제5 지대장에 나월환(羅月煥)이 임명되었다. 그런데 나월환은 1942년 3월 시안(西安)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당시의 부하들에게 암살당하였다.
그리고 광복군은 병력 모집을 위한 기구로 5개의 징모분처(徵募分處)를 설치하여, 산서성(山西省)·수원성(綏遠省)·절강성(浙江省)·안휘성(安徽省) 등지로 대원들을 파견하였다. 이들은 일본군 점령 지역으로 들어가 그곳에 있는 한인 청년들을 대상으로 초모공작(招募工作)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광복군 창설 1년여 만에 3백 여명에 이르는 병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한편, 중국군사위원회에서는 1941년 11월 광복군에 「한국광복군행동9개준승(韓國光復軍行動9個準繩)」을 요구하였다. 중국측이 광복군 창설을 승인하는 조건으로 광복군의 활동을 규제하기 위한 조처였다.
① 광복군은 중국군 참모 총장의 명령과 지휘를 받아야 하며, 임시정부는 단지 명의상으로만 통수권을 갖는다(제1·2항). ② 광복군은 한국이나 한국 변경에 근접한 지역에서만 활동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되, 반드시 중국군과 연합해서 행동하여야 하며, 이를 위해 광복군의 중국내 군사 훈련은 해당 지역의 중국군 사령관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제3·9항).
③ 중일전쟁 종결 이전에는 설혹 광복군이 한국 내로 진격하여 들어간다 하더라도 별도의 협정이 체결되기 전까지는 중국군사위원회의 명령과 지휘를 받아야 한다(제8항). ④ 중일전쟁이 끝난 뒤 광복군이 한국 내에 들어가지 못하고, 중국 안에 있을 경우 광복군의 운영 문제는 중국군사위원회의 정책에 의해 처리한다(제9항) 등이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면서 미·일간에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12월 10일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를 발표하였다.
이러한 정세 변화에 따라 1942년 4월 20일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조선의용대를 광복군으로 합편(合編)할 것을 결의하였다. 1942년 5월김원봉(金元鳳)이 주도하던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의 광복군 편입이 결정되었다. 충칭에 있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제1지대로 편제되면서, 기존의 4개 지대였던 광복군은 2개 지대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편은 중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에서 진행한 것이었고 박효삼(朴孝三)·이익성(利益成)·이지강(李志剛)·문정일(文正一) 등은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1942년 7월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광복군은 창설 초기부터 병력을 모집하기 위한 초모 활동(招募活動)에 주력하였다. 당시 일본군 점령 지역인 화북 지방에는 20만에 달하는 한인들이 이주해 있었다. 이들을 대상으로 초모 활동을 전개하여 병력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한국청년훈련반(韓國靑年訓練班)·한국광복군훈련반(韓國光復軍訓練班)을 설치하여 모집해 온 한인 청년들에게 일정한 기간 동안 군사 훈련을 받게한 후, 광복군으로 편입시켰다.
이로써 광복군은 점차 대원들이 증가되어 갔으며, 만주 지역에는 2백만 명에 달하는 국내 동포들이 거주하고 있어 이들의 일부를 소집할 경우 대규모 군사 조직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갖고 있었다.
1945년 6월광복군은 안휘성 부양(阜陽)에서 초모 활동을 전개하던 징모 제6분처가 제3지대로 편제되면서, 모두 3개 지대를 갖추게 되었다.
제1지대는 지대장 김원봉, 총무 조장 이집중(李集中), 정훈 조장 김인철(金仁哲), 제1구대장 김준(金俊), 제2구대장 이소민(李蘇民), 제3구대장 박효삼(朴孝三) 등으로 구성되었다.
제2지대는 지대장 이범석을 비롯하여 총무 조장 김용의(金容儀), 정훈 조장 송면수(宋冕秀), 제1구대장 왕형(王衡 본명 安椿生), 제2구대장 노태준(盧泰俊), 제3구대장 노복선(盧福善) 등이 주요 간부를 맡았다. 제3지대는 지대장 김학규(金學奎), 부지대장 이복원(李復源), 정치지도원 엄홍섭(嚴弘燮), 구대장 박영준(朴英俊) 등의 간부로 구성되어 있었다.
광복군은 중국 정부의 원조에 크게 의존하는 형편이었는데, 광복군을 유지하는데도 부족한 실정이었다. 중국 측 원조는 1941년 12월 6만원에서, 1944년 1백만 원으로 증액되었지만, 당시 원화의 인플레이션으로 사실상 무의미한 증액이었다.
중국이 재정 원조를 하는 대가로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광복군행동9개준승을 통해 광복군의 활동을 규제하자, 임시의정원에서는 9개준승을 폐기하자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러한 문제로 임시정부와 중국군사위원회 사이에 오랜 협상이 전개되었다. 그 결과 1945년 4월 4일 양국 사이의 새로운 군사 협정인 원조한국광복군판법(援助韓國光復軍辦法)이 체결되었고, 5월 1일부터 시행한다고 하였다. 협정은 광복군의 통수권은 임시정부에 있으며, 재정 원조는 차관(借款)으로 한다는 등의 주요 내용을 담고 있다.
한편, 광복군은 한반도에 지하군을 조직하여 파괴 공작을 진행시킨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태평양 방면에서의 한국인 포로 재훈련과 파견사령부설치, 비행대 편성 등에 관한 작전 계획도 수립해 놓고 있었다. 한편, 광복군은 중국에 파견되어 있던 미국전략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 OSS)과 협약을 맺고 특무공작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1944년 ‘조선인학도육군지원병제도’와 ‘징병제도’가 실시되면서, 4,385명의 한국 청년이 강제로 일본군에 편입되어 남양(南洋)과 중국 전선에 배치되기 시작되었고, 이들 중 일부가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으로 넘어왔다.
그 중에서도 안휘성 푸양[阜陽]에 있던 광복군 징모 제6분처에는 일본군을 탈출한 학병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이들 중 50명의 탈출 학병들은 임시정부가 있는 충칭으로 보내졌다. 이들은 1945년 1월 말 가슴에 태극기를 붙이고 애국가를 부르며 충칭에 도착하였다.
이를 계기로 광복군과 미국 OSS사이에 특수 훈련 문제가 협의되었고, OSS에서는 싸전트(Clyde, B.Sargent) 대위와 윔쓰(Clarence, N.Weems) 대위를 각각 파견하여 광복군 제2지대와 제3지대를 중심으로 특수 공작 훈련을 실시하였다. 그 뒤 1945년 8월 4일 3개월 과정의 훈련을 마친 제1기생들이 배출되었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미국의 OSS 책임자와 한·미간의 공동 작전을 협의하고, 이들을 국내에 침투시킨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내용은 시안과 푸양에서 OSS 훈련을 받은 광복군에게 각종 비밀 무기를 주어, 산뚱(山東)에서 미국 잠수함을 태워 본국으로 들여보내, 이들로 하여금 국내의 요소를 파괴하거나 혹은 점령하게 한 후에 미국 비행기로 무기를 운반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국내진공작전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실행에 옮기기 직전에 취소되어 계획이 무산되고 말았다. 김구는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이다”라고 일본의 항복을 개탄하고 있다.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창설한 다음 해인 1941년 11월에 대한민국 건국강령(大韓民國建國綱領)을 발표하여 “자력(自力)으로 이민족의 전제를 전복한다”라는 자주 독립 노선을 내외에 천명하고 조국 광복 실천의 3단계를 제시하였다. 1기 대적혈전기(對敵血戰期), 2기 국토의 일부를 회복하여 임시정부가 국내로 이전한 시기, 3기 국토를 완전 탈환하여 복국(復國)을 완성하는 시기가 그것이다.
강령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광복군의 국내진공작전이 실현되어야만 했던 것인데, 실현 직전에 일본이 항복하고 말았기 때문에 전후(前後)의 한국 독립 문제에 대하여 임시정부의 발언권이 없어지고 만 것이다.
일본이 항복한 이후 광복군은 중국 지역에서 일본군으로 끌려나왔던 한국 청년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면서 확군(擴軍) 작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 당국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광복군에 대해서도 무장 해제를 요구하였다.
때문에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 할 수밖에 없었고, 광복군도 무장을 해제한 상태로 귀국할 수 밖에 없었으며, 1946년 6월 해체되었다. 귀국한 광복군의 일부는 대한민국 국군에 참여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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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01
한인훈련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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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 (1995년)
박성수|박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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