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 당시부터 우리나라에 대해 적극적으로 차관공여(借款供與)를 제기하여 두 차례에 걸쳐 각 30만 원과 3백만 원의 차관을 성립시켰다. 이러한 일본의 차관 공세는 1904년 제1차 한일협약 이후 더욱 노골화되었다.
이때 일본이 우리나라에 차관 공세를 펴는 데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는 한국의 재정을 일본 재정에 완전히 예속시키는 것이고, 둘째는 차관으로 식민지 건설을 위한 정지 작업(整地作業)을 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에 의하여 제1차 한일협약 이후 우리나라에 재정 고문으로 부임한 메카타(目賀田種太郎)는 1906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1,150만 원의 차관을 도입하였다.
제1차 차관은 1905년 1월 ‘폐정리자금채’라는 명목으로 해관세(海關稅)를 담보로 한 3백만 원이었다. 제2차 차관은 1905년 6월 우리 정부의 부채 정리와 재정 융통에 필요한 자금 명목으로 한국의 국고금을 담보로 2백만 원을 들여왔다.
제3차 차관은 1905년 12월 우리나라의 토착 자본을 일본 자금에 예속시킬 목적으로 금융자금채 150만원을 들여왔다. 제4차 차관은 1906년 3월 기업자금채의 명목으로 5백만 원을 들여왔다.
이러한 일본측의 차관 공세는 우리 정부와 민간의 경제적 독립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당시 우리나라의 토착 자본은 일본 차관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운동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1907년 2월 중순대구의 광문사(廣文社) 사장 김광제(金光濟)와 부사장 서상돈(徐相敦)은 단연(斷煙)을 통하여 국채를 갚아 나가자는 국채보상운동을 제창하였다.
당시의 광문사는 지식인과 민족 자산가로 구성되어, 주로 실학자들의 저술을 편찬하고 신학문을 도입하여 민족의 자강 의식을 고취하고 있던 출판사였다.
또, 서상돈은 일찍이 독립협회 회원과 만민공동회 간부로서 자주독립 운동에 참여해 온 인사였다. 김광제ㆍ서상돈은 1907년 2월 21일자 『대한매일신보』에 “국채 1천 3백만 원은 바로 우리 대한제국의 존망에 직결되는 것으로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인데, 국고로는 해결할 도리가 없으므로 2천만 인민들이 3개월 동안 흡연을 폐지하고 그 대금으로 국고를 갚아 국가의 위기를 구하자”고 발기 취지를 밝혔다.
취지문을 발표한 뒤 대동광문회(大同廣文會 : 대구 광문사)는 민회소(民會所), 즉 단연회(斷煙會)를 설립하여 직접 모금 운동에 나섰다. 대동광문회의 국채보상운동 발기가 『대한매일신보』ㆍ『제국신문』ㆍ『만세보』ㆍ『황성신문』 등에 보도되자 각계각층의 광범한 호응이 일어났다.
서울에서는 2월 22일김성희(金成喜) 등이 국채보상기성회(國債報償期成會)를 설립하고 취지서를 발표하였다. 기성회는 회칙까지 제정하여 본격적인 운동의 채비를 갖추었다. 또, 수전소(收錢所)는 서점ㆍ약국ㆍ대한매일신보사ㆍ잡지사 등으로 지정하였다.
그 뒤 전국에서 ‘국채보상’의 이름을 붙인 20여 개에 달하는 국채보상운동단체가 창립되었다.
이들 단체의 운동은 국채 보상을 위한 계몽적 활동과 직접 모금 운동을 하는 실천적 활동으로 크게 두 가지 양상으로 나눌 수 있다.
운동에는 문자 그대로 각계각층이 참여하였다. 고종도 단연의 뜻을 밝혔고, 이에 따라 고급 관료들도 한때 소극적이나마 모금 운동에 참여하였다. 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민족 자본가와 지식인층이었다.
상인들은 일본 차관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당사자들이었기 때문에 인천ㆍ부산ㆍ원산ㆍ평양 등지에서 상업회의소 등을 통하여 적극적으로 활동에 참여하였다.
지식인들은 각종 단체ㆍ학회ㆍ학교ㆍ언론기관 등을 중심으로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운동에는 신지식인뿐만 아니라 유림(儒林)과 전ㆍ현직 하급관리들도 각 지방에서 상민층과 함께 적극 참여하였다.
또, 이 운동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많은 부녀 층이 참여하여 각종 패물을 의연소(義捐所)에 보내 온 점이다. 그리고 노동자ㆍ인력거꾼ㆍ기생ㆍ백정 등 하층민들까지도 적극 참여하여 이 운동은 그야말로 범국민적 운동으로 전개되어 나갔다.
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것은 1907년 4월부터 12월까지였다. 특히, 6월∼8월에는 가장 많은 의연금이 모아졌다. 그러나 운동은 일제의 탄압과 운동주체역량의 부족으로 인하여 1908년에 들어서면서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운동을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꾸준히 추진해 간 중심체는 양기탁(梁起鐸)과 베델(Bethell, E.T.裵說)이 이끄는 대한매일신보사였다. 따라서, 이 운동은 사실 국권회복운동의 하나로서 전개되고 있는 셈이었고, 이에 일제는 갖은 방법을 다하여 방해, 탄압하려 들었다.
일제는 1907년 이후 베델을 국외로 추방하는 공작을 펴, 1908년 5월 3주(週)의 금고와 벌금형을 선고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7월통감부 당국은 “대한매일신보가 보관한 국채보상금을 베델ㆍ양기탁 두 사람이 마음대로 하여 3만원을 소비하였다.”고 주장하면서 양기탁을 구속해 버렸다. 이른바 일제는 ‘국채보상금소비사건(國債報償金消費事件)’을 조작한 것이다.
통감부의 공작에 따라 전 국채보상지원금 총합 소장이었던 윤웅렬(尹雄烈)은 “보상금 중 삼만 원을 영국인 베델이 사취하였으므로 그 반환을 요청한다.”는 반환청구서를 제출하였다. 그리고 일제는 이를 근거로 운동의 지도자들에 대한 불신감을 민중들에게 심어 주고자 하였다.
양기탁은 공판 결과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통감부의 공작으로 운동의 주체는 분열되어, 운동 자체가 암초에 부딪쳐 끝내는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국채보상운동은 처음부터 순수한 애국 충정에서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것으로서, 전국적인 통일된 지휘체계 하에서 진행된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일제의 방해ㆍ탄압 책동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끝내 좌절되었던 것이다. 운동이 비록 좌절로 끝나긴 하였으나 국권 회복을 위한 투쟁의 하나로서 그 역사적 의의는 큰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