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근은 개항기 「기산풍속도」·「텬로력뎡」 삽화 등의 작품을 그린 화가이다. 출생일과 사망일은 미상이다. 19세기 말 부산·원산 등의 개항장에서 풍속화를 그려 판매한 화가로 알려져 있다. 조선의 풍속을 알고자 하는 서양인의 요구에 부응하는 작품들을 제작하였다. 농사와 잠직하는 모습, 혼례 모습, 선비들이 기생과 노는 모습 등 전통적 풍속 장면과 형벌·제례·장례 같은 새로운 풍속 장면이 작품 소재로 채택되었다. 그의 작품은 한국은 물론 유럽 각국과 러시아·미국·캐나다·일본 등 전 세계 20여 곳의 박물관에 1500여 점이 남아 있다.
호는 기산(箕山). 김준근의 생애와 이력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가 19세기 말 부산 · 원산 등의 개항장에서 풍속화를 그려 주로 서양인들에게 판매하였다는 사실만이 알려져 있다. 그 풍속화가 한국은 물론 독일 · 프랑스 · 영국 · 덴마크 · 네덜란드 · 오스트리아 · 러시아 · 미국 · 캐나다 · 일본 등 전 세계 20여 곳의 박물관에 1500여 점이 남아 있고, 당시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의 각종 여행기에 삽화로 사용되면서, 조선의 풍속을 세계에 널리 알린 화가가 되었다. 또 김준근은 우리나라 최초로 번역된 서양 문학작품인 『텬로력뎡(天路歷程)』(1895)의 삽화가로도 활약하였다.
김준근의 행적은 그의 그림을 구입한 서양인들의 기록에서 일부 찾아볼 수 있다. 그의 그림은 1876년 일본의 강압에 의해 조선이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하고 부산(1876년), 원산(1879년), 인천(1880년)이 차례로 개항장으로 개방된 이후 나타나기 시작한다.
김준근의 풍속화 제작 활동이 처음으로 확인되는 그림은 독일 베를린 민족학박물관(Ethnographic Museum)의 소장품이다. 독일의 한국학 학자 융커(Heinrich F. J. Junker, 18891970)는 베를린 민족학박물관의 김준근 풍속화가 고종의 외교 고문 묄렌도르프(P. G. von Mölendorff, 18471901)가 고종에게 하사받아 소장하던 것이라 전한다. 묄렌도르프가 수준이 높지 않은 김준근의 그림을 국왕에게 하사받았는지는 정확히 확인할 길이 없지만 그가 조선에 거주한 1882~1885년에 김준근의 그림을 수집한 것으로 여겨진다.
미국 스미스소니언기록보관소(Smithsonian Institution Archives)와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교 인류고고학박물관(Museum of Archaeology and Anthropology)에 소장된 김준근의 풍속화는 메리 슈펠트(Mary Acromfie Shufeldt)가 1886년 초량에서 구입한 것이다. 메리 슈펠트는 조미수호통상조약(1882년)을 이끈 미국 해군 제독 슈펠트(Robert Wilson Shufeldt, 18211895)의 딸로, 이들은 고종의 초청으로 1886년 조선을 방문했을 때 김준근의 풍속화를 구입하였다. 이 사실은 1895년에 출판된 컬린(Stewart Culin, 18581929)의 저서 『한국의 놀이(Korean Games)』 서문에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김준근이 1886년 무렵 개항장의 하나인 초량[부산]에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김준근의 활동 사실은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Guimet National Museum of Asian Arts)의 김준근의 풍속화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국립기메동양박물관의 소장품은 프랑스의 민속학자 샤를 루이 바라(Charles Louis Varat, 18421893)의 수집품이다. 바라는 프랑스 문교부로부터 민속학 연구 임무를 띠고 파견된 탐험가이자 민속학자로, 그가 조선에 머물던 18881889년에 이 풍속화들을 구입하였을 것으로 여겨져 김준근의 활동 사실을 짐작케 한다.
독일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Musuem of Ethnology)에도 마이어(H. C. Eduard Meyer, 1841~1926)가 수집한 김준근의 풍속화가 있다. 제물포[인천] 세창양행의 경영자이자 주독일조선총영사이던 마이어는 1889년 함부르크 산업박람회에서, 그리고 1894년 겨울 함부르크 민속공예박물관에서 한국의 물품을 소개, 전시한 인물이다. 마이어와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의 거래가 시작된 것은 1894년부터였으므로, 함부르크 민속공예박물관에서 김준근의 그림이 전시된 이후 마이어의 기증으로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에 소장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에 기증된 김준근 풍속화는 1894년 이전에 구입된 것으로 보여 이 시기에도 김준근이 그림을 제작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84년에서 1885년까지 18개월 동안 조선에 거주한 칼스(W. R. Cales, 1848~1929)의 『조선풍물지(Life in Corea)』나 1895년에 간행된 게일의 『텬로력뎡』 등에는 김준근의 그림이 삽화로 들어가 있다. 이들은 삽화가 김준근의 이름을 명시하지 않았지만 그림의 양식을 통해 그의 그림임을 알 수 있으며, 더욱이 서문에 원산에서 제작했음을 기록하고 있어 김준근이 개항장 원산에서도 활동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 김준근의 그림 중에는 원산에서 제작했음을 밝힌 것이 많아 원산이 김준근의 주된 활동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제작 연대가 확인된 김준근의 작품들을 통해 그가 1880년대부터 1890년대까지 대략 10여 년 동안 원산, 초량 등 개항장에서 활발하게 그림을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제작 연대를 알 수 없는 나머지 그림들 역시 이 기간에 그려졌을 가능성이 크며, 1910년 이후인 일제강점기까지는 내려가지 않는다.
김준근 풍속화의 특징은 주제에서 잘 드러난다. 그의 풍속화에는 농사와 잠직하는 모습, 혼례 모습, 선비들이 기생과 노는 모습 등 18세기 풍속화에서도 보이는 전통적 주제의 그림이 다수 등장한다. 그와 함께 19세기 말의 시대성을 반영하는 새로운 주제의 그림들이 등장한다. 즉 수공으로 물건을 제작하고 그 물건을 파는 장면 등이 18세기 풍속화에서보다 종류나 수량 면에서 확대되고 형벌 · 제례 · 장례 장면 등 김준근 풍속화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 나타난다. 특히 형벌 · 제례 · 장례 장면은 김준근의 풍속화가 국내 소비를 위주로 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조선인이라면 이 장면들을 감상하거나 즐기기 위해 찾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주제는 민족지적 성격을 띠고 있어 당시 민족학이나 민속학에 흥미를 가진, 조선의 풍속을 알고자 하는 서양인에게 흥미를 주었고 그들의 구매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김준근 풍속화의 주제는 18, 19세기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대량으로 판매된 중국의 수출화[외소화(外銷畵)라고도 부름]와 유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