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풍칠월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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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경』 빈풍칠월편의 내용을 묘사한 그림. 빈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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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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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빈풍칠월도는 『시경』 빈풍 칠월편의 내용을 묘사한 그림이다. 『시경』 빈풍편은 주나라 성왕이 백성들의 어려움을 알게 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빈풍도는 빈풍편의 칠월·치효·동산 등 전편을 모두 그린 것이다. 이 중 농업 풍속을 월령 형식으로 읊은 칠월편 내용만 그린 것이 빈풍칠월도이다. 빈풍칠월도는 조선 시대에 칠월편을 8장면으로 구성·제작되었다. 국내에 전하는 빈풍칠월도는 송민고의 〈빈풍칠월도〉 등 총 4점이다. 이 그림은 통치자들에게 백성들의 고충을 생각하게 했다. 왕도정치라는 유교이념의 대표적인 시각적 표상으로 중요시되었다.

목차
정의
『시경』 빈풍칠월편의 내용을 묘사한 그림. 빈풍도.
개설

『시경』 「빈풍편」은 주나라 주공(周公)이 섭정을 그만두고 조카인 성왕(成王)을 등극시킨 뒤, 어리고 경험이 부족한 성왕에게 빈나라(주의 옛 이름) 백성들의 생업에 대한 어려움을 알게 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빈풍도는 『시경』 「빈풍편」의 전편, 즉 칠월(七月) · 치효(鴟鴞) · 동산(東山) · 파부(破斧) · 벌가(伐柯) · 구역(九罭) · 낭발(狼跋) 등 일곱 편을 모두 그린 것이다. 특히 백성들의 생업인 농업이나 잠업(蠶業)과 관련한 풍속을 월령 형식으로 읊은 칠월편의 내용만 그리는 경우가 많아 ‘빈풍칠월도(豳風七月圖)’라고도 불린다.

조선시대에는 칠월편을 8장면으로 구성한 빈풍칠월도가 주로 제작되었다. 조선왕실에서 빈풍도는 무일도와 함께 역대 통치자들에게 백성들의 노고와 고충을 생각하게 하는 교훈적 그림으로 기능하였으며 왕도정치라는 유교이념의 대표적인 시각적 표상으로 중요시되었다.

내용

중국에서 빈풍칠월도에 대한 기록은 당(唐)의 미술사가 장언원(張彦遠)의 『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에 처음 나타난다. 이 책에서 진 명제(晉明帝)의 작품 목록 중 ‘빈시칠월도(豳詩七月圖)’가 확인되나 그림은 전하지 않는다. 현전하는 작품으로는 남송(南宋) 고종(高宗) 때 활약한 화가 마화지(馬和之)의 「빈풍도」와 「빈풍칠월도」가 있다. 조선에서는 1402년(태종 2) 4월에 예조전서 김첨(金瞻)이 빈풍도를 바쳐 태종이 내구마(內廐馬)를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가장 이르다. 그러나 이 빈풍도가 어떠한 형식으로 제작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림 형식의 빈풍도는 1424년(세종 6) 세종이 예문관 대제학 변계량(卞季良)에게 주공의 빈풍 시와 무일(無逸) 서(書)의 뜻을 담아 우리나라 백성들의 어려운 생활을 담은 그림을 월령 형식으로 제작하라고 지시하였다는 내용에서 확인된다. 또 9년 뒤인 1433년(세종 15)에 다시 경연에서 『시경』 「빈풍편」을 모방하여 우리나라 풍속을 바탕으로 한 조선식 빈풍칠월도를 제작하라고 집현전에 지시를 내렸다.

이 기사들을 통해 조선 초기에 이미 중국식 빈풍도가 우리나라 백성들의 생활을 담은 그림으로 변환되어 제작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의 빈풍도가 현재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아 어떠한 내용이 묘사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본국의 납세, 부과금, 부역, 농업, 잠업의 일을 채집하여 그 실상을 그리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조선 농민들의 생활이 다채롭게 묘사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세종은 1438년(세종 20)에 장영실(蔣英實)로 하여금 천문시계인 옥루(玉漏)를 설치할 흠경각을 세우게 하였는데, 이 때 흠경각의 사방이 빈풍칠월도에 의거한 사계절의 경치로 꾸며졌다고 한다. 즉 빈풍도에 의거하여 인물 · 조수(鳥獸) · 초목 등 여러 가지 형용을 나무로 깎아 만들고, 절후에 맞추어 벌려 놓았는데 빈풍칠월 한 편의 일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종은 경연에서 빈풍칠월도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이를 내용으로 하는 내농작과 나례를 시행하였다. 내농작은 정월 대보름날 궁궐에서 볏짚으로 곡식 이삭을 만들어 나무 위에 걸어 놓고 풍년을 기원하는 풍속이었는데, 빈풍칠월편에 실려 있는 인물의 형상을 모방하여 밭 갈고 씨 뿌리는 형상을 만들었고 빈풍칠월도 병풍을 보고 놀이로 만들어 나례의식이 끝나고 잡희를 공연하도록 지시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빈풍칠월도는 권농책의 일환으로 제작되어 백성들의 생업에 대한 어려움을 알게 한다는 감계적 기능 외에도 하늘을 본받고 때에 순응한다는 천명의식을 표현하였기 때문에 궁중의 중요한 시각적 매체로 정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전기의 빈풍도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도 ‘농가사시도’, ‘농가십이월도’, ‘경직도’ 등의 형태로 조선 백성들이 농사짓고 베 짜는 일상생활이 지속적으로 묘사되었다. 그리고 규장각 차비대령화원의 녹취재 화제 중 빈풍칠월편을 전거로 한 화제가 정조순조대에 걸쳐서 8회, 헌종에서 고종까지 5회 출제되었다.

이 중 특히 ‘엽피남무 전준지희(饁彼南畝 田畯至喜)’, 즉 ‘저 남향밭 비탈로 밥을 날라오면 권농관은 이를 보고 기뻐한다’는 화제는 5회로 가장 많이 출제되었다. 또 팔월기확(八月其穫), 시월납화가(十月納禾稼), 제피공당 칭피시굉(躋彼公堂 稱彼兕觥) 등의 화제가 반복적으로 출제되었고 1817년(순조 17)에는 칠월편이라는 제목으로도 출제되었다. 이렇게 「빈풍편」은 조선 말기까지 왕들이 화원들로 하여금 그에 대한 묘사를 연마하도록 했던 중요 화제이다.

국내에 전하는 빈풍칠월도는 전(傳) 송민고(宋民古)의 「빈풍칠월도」, 전 정홍래(鄭弘來)의 「빈풍칠월도」, 작자 미상의 「빈풍칠월도」, 이방운(李昉運)의 『빈풍도첩』 등 총 4점이다. 이방운의 작품을 제외한 나머지 세 작품은 모두 비단에 비슷한 규격으로 제작되었다. 송민고의 전칭작과 작자 미상의 작품은 석록과 석청을 사용한 진채로 채색되었으며 전자의 경우 산봉우리의 외각선 안에 금분으로 그린 금니 기법이 사용된 것으로 보아 궁중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참고문헌

『왕과 국가의 회화』(박정혜 외, 돌베개, 2011)
『한국의 풍속화』(정병모, 한길아트, 1998)
「조선 후반기 세시풍속도 연구」(김현지, 『역사민속학』 43, 한국역사민속학회, 2013)
「조선시대 왕실 감계화 연구」(김영욱,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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