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주(光州). 아버지는 노의(盧義)이다.
생원으로 1450년(문종 즉위년) 추장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477년(성종 8) 사예가 되고, 1482년 사성·대사성 등을 역임하면서 성균관에서 인재양성에 전념하였다. 이듬해에는 70살의 나이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1484년에도 승정원에 사직을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488년 첨지중추부사로 봉직하였다. 성리학에 정통하여 주위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정신적인 지조도 있어 후진양성에 공을 세웠다. 왼쪽 다리병으로 걷기에 불편을 느껴 평생 고생을 하였으나, 죽은 뒤에는 왕이 인재양성에 힘쓴 공을 높이 치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