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팔달동유적은 대구광역시 북구 팔달동 일대에 있는 청동기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를 아우르는 복합유적이다. 금호강과 팔계천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언덕 비탈면에 조성된 대규모 유적이다. 청동기시대 주거지, 원삼국시대 나무널무덤 · 널무덤 · 덧널무덤 · 독무덤, 삼국시대 덧널무덤 · 돌덧널무덤과 조선시대 유구도 일부 포함하여 다양한 성격의 유구가 확인된다. 출토 유물로는 초기 철기시대에서 원삼국시대로 이행하는 과정을 보여 주는 토기류와 금속류가 수습되었다. 대구·경북 지역의 삼한시대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표지 유적이라는 의의가 있다.
대구팔달동유적(大邱八達洞遺蹟)은 대구분지의 북단을 동서 방향으로 가로지르는 금호강과 금호강의 북쪽에 형성된 칠곡의 너른 들을 적시던 팔계천이 합류하는 지점인 언덕 비탈면에 조성된 대규모 유적이다. 금호강에서는 약 200m 정도 떨어져 있다.
팔달동 주변 지역에는 같은 시기의 여러 유적이 있는데, 남쪽으로 약 4㎞ 떨어진 곳에는 대구평리동유적이 있고, 동쪽으로 4㎞ 떨어진 지점에는 대구산격동유적이 있으며, 북쪽으로 5㎞ 정도 떨어진 곳에는 청동기시대 주거지를 비롯하여 각종 생활 유구가 확인된 ‘칠곡3지구 생활유적’이 조사된 바 있다.
대구팔달동유적은 지점을 달리하며 여러 번에 걸쳐 발굴 조사되었다. 행정구역상으로 대구광역시 북구 팔달동 8, 9-1, 16-1, 노곡동 107번지 일대를 1992년 경북대학교박물관에서 먼저 조사하였고, 1996년 팔달동 145번지 일대의 넓은 아파트 건설 부지를 영남문화재연구원에서 전면 발굴 조사하였다.
유적이 처음 알려진 것은 1980년 무렵이다. 당시 예비군 훈련에서 참호를 파다가 유물이 발견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를 당시 경북대학교의 윤용진 교수가 학술지에 소개하면서 학계가 주목하는 유적이 되었다. 이후 대구시와 경북대학교 박물관에 의한 지표조사와 수습조사가 이루어지고 이후 1992년에 경북대학교 박물관이 처음으로 공식 발굴 조사를 실시한 것이다.
이듬해 1993년에도 간단한 추가 조사가 있었다. 발굴 조사에서는 고조선-삼한시대(초기 철기시대-원삼국시대)의 널무덤 17기와 삼국시대 횡구식(橫口式) 돌방무덤 1기, 그리고 소형의 수혈식(竪穴式) 돌덧널무덤 3기 등이 발견되었다. 유물로는 토기류 52점, 흙으로 만든 가락고동 1점, 쇠로 만든 화살촉 72점. 쇠칼 1점, 쇠도끼 24점, 쇠집게 4점, 쇠손칼 4점, 쇠로 만든 따비 1점, 수정 절자옥(切子玉) 18점, 수정 곡옥(曲玉) 3점, 마노옥(瑪瑙玉) 12점, 유리옥 108점으로 총 317점이 출토되었다. 삼한 단계의 널무덤은 주로 서쪽 비탈면에 밀집하여 분포하였다. 널무덤은 그 구조상 덧널무덤과 나무널무덤으로 구분되었다.
이후 대구팔달동유적이 대대적으로 발굴 조사된 것은 1996년이었다. 당시 대규모 아파트 단지 건설공사에 앞서 영남문화재연구원이 1996년 8월 16일부터 1997년 5월 31일까지 약 29,441m² 범위에 포함된 유구를 전면 발굴 조사하였다. 발굴 조사에서는 기존에 알려진 것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시대의 유구가 상당수 발견되었다.
발굴 조사 내용을 시대별로 살펴보면, 청동기시대의 주거지가 19동, 원삼국시대의 나무널무덤과 널무덤이 102기, 덧널무덤이 1기, 독무덤이 139기이고, 삼국시대의 덧널무덤이 22기, 돌덧널무덤이 32기이다. 이밖에 조선시대의 무덤 146기와 기타 유구 8기 등 모두 469기가 조사되었다.
청동기시대 주거지는 평면 형태가 모두 직사각형인 것으로 크기에 따라 소형과 중형, 대형과 초대형의 것이 있었다. 가장 큰 주거지가 언덕의 윗면에 배치되고 그 주변으로 비교적 넓은 공터, 즉 광장이 마련되었다. 대형급 이상의 주거지에는 둘 이상의 화덕자리가 설치된 흔암리식에 가까운 형식이었다. 주거지의 평면 크기를 늘려 나간 보수의 흔적도 발견되었다. 이 시기의 마을을 둘러싼 도랑인 환호(環壕)도 발견되었다. 대부분의 주거지가 환호의 내부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바깥에 배치된 것도 있다.
청동기시대에는 취락으로 활용되었지만, 삼한시대가 되면 무덤이 집중되는 공간으로 탈바꿈하였다. 특히 팔달동 언덕의 능선 가장 높은 꼭대기 부분과 서쪽 비탈면 일대에는 삼한시대의 나무널무덤과 널무덤이 집중한다. 이 무덤들은 분포에서 거의 중복되는 사례가 없다. 당시 봉분이 있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무덤이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청동 유물 등이 많이 부장(副葬)된 무덤은 더 넓은 주변 공간을 확보하는 경향이 있다. 무덤의 장축 방향은 주로 동서 방향이며 등고선 방향과 직각을 이루며 교차하거나 엇비슷하게 설치된다. 대구팔달동유적의 삼한시대 나무널무덤은 무덤구덩이를 파고 바닥에 목관(판재식 목관이나 통나무관)을 안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목관과 무덤구덩이 사이의 공간은 흙으로 채우고 유물을 부장한 다음, 무덤구덩이 윗면에 나무로 뚜껑을 하고 봉토를 조성하는 순서로 무덤의 축조가 이루어진다. 나무 뚜껑 위에는 굵은 돌을 쌓으면서 봉토를 조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삼한시대의 독널도 139기나 발굴 조사되었다. 이들 독무덤은 나무널무덤과 같은 공간에 섞여서 조성되었는데, 무덤구덩이를 서로 파괴하는 경우가 없어 무덤의 존재가 지표에서 드러나는 형태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 독무덤은 대부분 유아나 아동을 묻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물론 몸체가 긴 토기를 사용한 독무덤의 경우는 성인이 묻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토기 하나만을 사용한 경우도 있지만, 입을 마주 붙인 2옹식과 3개를 연결한 3옹식도 확인되었다. 나무널무덤보다 시기가 늦은 덧널무덤도 22기나 발견되었다. 대개 외널식 덧널무덤으로 딸린덧널이 마련된 사례는 없었다.
삼한시대 널무덤과 나무널무덤에서는 다수의 회도(灰陶) 즉, 와질토기(瓦質土器)의 부류가 출토되었고 민무늬토기들도 함께 출토되었다. 와질토기는 주머니모양항아리와 쇠뿔모양손잡이항아리, 옹형토기(甕形土器) 등의 기종이 대표적이다. 민무늬토기의 부류는 두형토기(豆形土器)와 덧띠토기가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다. 독무덤으로 사용된 토기 역시 대체로 와질토기 부류인데, 대형 옹형토기들도 가마에서 구워진 와질토기였다.
나무널무덤에서는 다수의 청동기류가 출토되었다. 종류로는 구리칼, 구리창 등 무기류가 주로 출토되었으며, 장식을 갖춘 칼집과 칼자루끝장식 등이 확인된다. 여기에 환형동기, 관상형동기 등 소형 청동기류도 포함된다. 구리칼은 무덤에 매장되어 있는 사람의 허리춤에서 발견되는 사례도 있지만, 목관 바닥의 요갱에서 출토되기도 하였다. 구리창은 요갱에서도 발견되었지만, 무덤구덩이 벽에 박힌 채로 출토된 사례도 있었다.
철기류의 부장도 많다. 괭이로 사용한 철부에는 서기전 2세기대 후반으로 편년되는 주조 제품이 있으며 단조제도 있다. 쇠집게와 쇠칼은 물론 이 지역의 독특한 철제 농구인 따비류의 부장도 주목된다.
대구팔달동유적은 대구 · 경북 지역의 삼한시대 묘제의 특징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는 유적이다. 삼한시대의 전반에 해당하는 나무널무덤과 독무덤의 특징과 변천을 살피는 데 중요한 유구가 다수 확보되었다는 점과 덧널무덤 단계로 이어지는 변천상을 한 유적에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진한 사회의 금속기 문화의 특징과 계보를 살피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간 유적의 변천 과정, 단계의 설정, 구체적인 편년안의 구축, 출토 유물 연구가 다양한 형태로 진행되었다. 아울러 단계별 집단 구성원의 위계와 지역 간 차이와 공통점을 변별해 낼 수 있는 표지 유적이라는 점에서도 각별하다. 영남 지역의 회도 문화인 와질토기의 기술 계보와 성립 시기를 가늠할 수 있는 풍부한 자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가 있는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