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경상남도 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일반적으로 ‘운돌’ 혹은 ‘명석(鳴石)’이라 부른다.
언제부터 이 돌이 신앙의 대상이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고, 다만 전설상으로는 고려 때의 일로 되어 있으나, 그 이전부터 성기 상징물로 숭배되어온 것으로 보인다. 유래는 고려 공민왕 때 여진의 침입(일설에는 고려 고종 18년 몽고의 침입)에 대비하여 진주성을 수축할 때의 일이라고 한다.
부역에 동원되었던 승려가 급히 걸어오는 자웅석과 만나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다. 돌은 진주성 부역으로 고생하는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려고 스스로 성돌이 되려 간다고 하였다. 승려가 이미 성을 다 쌓았다고 말해주자 돌이 크게 울며 전신에 눈물을 흘리고 그 자리에 서버려 운돌이라 이름하게 되었다 한다.
승려가 감복하여 아홉 번 절을 하여서 그 위 골짜기 이름을 구비골[九拜谷]이라 하고, 중국 명사 두사충(杜思忠)도 이 소식을 듣고 감동하여 시 〈자웅석찬 雌雄石讚〉을 지었다고 한다. 구비전설에는 시대가 조선조 임진왜란 때로 되어 있고, 자웅석이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성돌이 되고자 한 목적이 나라를 수호하기 위한 것으로 변이전승되고 있다.
지금도 국가대사에 이 운돌이 눈물을 흘려 예고한다고 한다. 형태는, 숫돌은 높이 87cm, 밑 둘레 214 cm의 자연석으로 위가 귀두(龜頭)같이 되어 남자 성기 모양이고, 암돌은 높이 77cm, 밑 둘레 147cm의 자연석으로 족두리를 쓴 여자 모습과 같다.
원래 숫돌은 현 위치에서 북동쪽으로 300m 지점의 논두렁에서 있었고, 암돌은 북쪽으로 500m 거리의 하천 변에 누워 있던 것을 1970년 음력 3월 3일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 세우고, 1973년명석각(鳴石閣)을 준공하여 보존하고 있다. 매년 삼짇날에 명석각보존회가 주관하고 면장이 초헌관이 되어 호국충석을 기리고 풍농을 기원하는 유교식 제의를 지내고 면민의 축제를 벌인다.
이 자웅석은 본래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성기숭배의 대상물이었는데, 민중구제의 운돌설화가 형성되고, 조선조에는 호국안민의 주제가 부각되어 시대가 변하여도 계속 지역주민의 경배대상으로 되어오고 있다. 1988년 경상남도 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