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6월 1일 중국 길림성 화룡현 지신진 명동촌 동거우에서 태어나 1994년 1월 18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본관은 남평(南平), 호는 늦봄이다. 목사인 아버지 문재린(18961985)과 어머니 김신묵(18951990)의 3남 2녀 중 장남이다. 문익환의 아내는 박용길(19192011, 신학자, 종교인)이다. 동생은 문동환(19212019) 목사이다. 아내 박용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공연예술가 문호근, 영화배우 문성근, 문영금, 문의근 4남매이다.
3·1운동을 전후하여 기독교 사상과 민족주의 사상이 팽배했던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인 북간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25년 기독교 학교이자 민족 교육의 산실인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여 윤동주, 송몽규 등과 교류하며 민족 의식을 고취시켰다. 1931년 3월 명동소학교를 졸업 한 뒤 주1으로 이주하며 1932년 은진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은진중학교는 캐나다 선교회 소속의 그리어슨(구례선, Dr.Robert Grierson, 1868~1965) 선교사가 설립하였다. 은진중학교는 신앙을 바탕으로 일제의 회유와 사회주의자들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민족의 독립을 제1로 삼는 비타협 민족주의자의 길을 고수하였으며 졸업생들은 상해와 중경, 서안 등지의 임시정부와 광복군 진영을 찾아 독립군이 된 사례가 많았다.
문익환은 은진중학교에 대하여 “은진학교의 기독교 민족 교육은 철저한 것이었다. 작문 교사 이기창 선생은 ‘조선독립’으로 결론이 나지 않으면 점수를 주지 않았다. 은진중학은 국경일과 주2에 태극기를 내어 걸고, 애국가를 부를 수 있는 치외법권 지대로서 명동학교가 폐교된 후 북간도 민족독립 운동의 본산을 이루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이후 주3를 거부하다 평양경시청으로 끌려간 후 평양의 숭실중학에서 중퇴했다. 북간도로 돌아온 후 용정에 있는 광명학원의 중학부 5년에 편입해서 졸업하였다.
1938년 일본의 동경신학교로 유학을 갔으나 주4 거부로 퇴교되어 만주의 봉천신학교로 전학하였다. 1946년 8월 김천의 배영중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일하다가 1947년 조선신학교에서 장공 김재준 목사의 지도를 받고 졸업하였다. 같은 해 구미교회, 을지교회의 전도사로 일하며 목사 주5를 받았다. 1949년 미국 프린스톤신학교에 유학하여 신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하였다.
1955년 그의 나이 38세에 한국기독교장로회 한빛교회에서 주6를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68년 신구교 공동 번역 책임 위원으로 8년간 일하며 성경 구약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 시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또한 한국신학대학과 연세대학교에서 구약을 강의하기도 했다.
1976년 명동 「3·1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면서 민주화 투쟁에 나섰으며, 1980년 내란 예비 음모죄로 다시 복역하였다. 출옥 후 민주 · 통일 국민 회의 의장(1984년)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의장(1985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상임 고문(1989년), 범민련 남측본부결성준비위원회 위원장(1991년), 제4차범민족대회 대회장(1993)을 역임하면서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매진하다가 1994년 1월 18일 급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문익환의 삶의 과정을 볼 때, 그의 민족 의식과 신앙의 합류는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현장 교회를 떠나지 않고 꾸준히 목회를 지속했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목사 안수를 받기 이전부터 만주의 만보산한인교회와 신경한인교회, 구미교회, 을지교회 등에서 전도사로 일했고, 한빛교회와 갈릴리교회에서 목사로 일하는 등 개신교 성직자로서, 현장 목회자로서의 삶을 놓치지 않았다.
또한 구약 학자로서 16년 동안 대학의 교단에서 후학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특히 구약 주7의 번역에 공헌하였고, 그 과정에서 시인으로 등단하여 7권의 시집과 많은 수필집, 산문집 등을 출판하였다. 그는 절친한 친구였던 장준하의 주8 이후 「3·1민주구국선언」에 근거를 두고 유신 독재에 반대하는 투쟁에 앞장섰다.
그의 활동은 1978년 유신헌법비판성명서 발표, 1980년 YWCA 위장결혼 사건, 1986년의 인천 5·3사건과 서울대학교 연설사건으로 이어졌으며, 그 뒤 통일운동에 매진하여 재야 통일 관련 단체의 구심점이 되었다. 특히 1989년에는 주9을 어기고 방북하여 김일성을 면담하고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공동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들로 인해 여섯 차례 투옥되어 10여 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1992년에는 노벨 주10 후보에 오르기도 했으며, 같은 해 제3회 4월혁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는 시집에 『새삼스런 하루』(1973), 『꿈을 비는 마음』(1978), 『난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요』(1984), 『두 하늘 한 하늘』(1989), 『옥중일기』(1991) 등이 있고, 수필집에 『새 것, 아름다운 것』(1984)이 있으며, 『꿈이 오는 새벽』(1984), 『통일을 비는 마음』(1989), 『히브리 민중사』(1990), 『가슴으로 만난 평양』(1990)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