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늦봄. 만주 북간도 출생. 목사인 아버지 문재린과 어머니 김신묵의 3남 2녀 중 장남이다. 3·1운동을 전후하여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이었던 북간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만주의 한인들이 세운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를 거쳐 평양의 숭실중학교, 북간도의 용정광명학교를 다녔다.
일본의 동경신학교로 유학을 갔으나 학병 거부로 퇴교되어 만주의 봉천신학교로 전학하였고 그 뒤 한인교회 전도사로 일하였다. 1947년에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미국 프린스톤신학교에 유학, 신학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하여 한국신학대학과 연세대학교에서 구약을 강의하기 시작하였다.
개신교와 천주교가 공동으로 번역한 성서의 구약 번역책임자로 8년 동안 일하였다. 1976년 명동 「3·1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면서 민주화투쟁에 나섰으며, 1980년 내란예비음모죄로 다시 복역하였다.
출옥 후 민주·통일국민회의 의장(1984년)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의장(1985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상임고문(1989년), 범민련 남측본부결성준비위원회 위원장(1991년), 제4차범민족대회 대회장(1993)을 역임하면서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매진하다가 1월 18일 급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문익환의 삶의 과정을 볼 때, 무엇보다 성직자(목사)와 신학자로서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목사 안수를 받기 이전부터 만주의 만보산한인교회와 신경한인교회, 구미교회, 을지교회 등에서 전도사로 일했고, 한빛교회와 갈릴리교회에서 목사로 일하는 등 개신교 성직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또한 구약학자로서 16년 동안 대학의 교단에서 후학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특히 구약 성서의 번역에 공헌하였고, 그 과정에서 시인으로 등단하여 7권의 시집과 많은 수필집, 산문집 등을 출판하였다. 그는 절친한 친구였던 장준하의 횡사 이후 「3·1민주구국선언」을 기초하면서부터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투쟁에 앞장섰다.
그의 활동은 1978년 유신헌법비판성명서 발표, 1980년 YWCA 위장결혼사건, 1986년의 인천 5·3사건과 서울대학교 연설 사건으로 이어졌으며, 그 뒤 통일운동에 매진하여 재야 통일관련 단체의 구심점이 되었다. 특히 1989년에는 실정법을 어기고 방북하여 김일성을 면담하고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공동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들로 인해 여섯 차례 투옥되어 10여 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1992년에는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으며, 같은 해 제3회 4월혁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는 시집에 『새삼스런 하루』(1973), 『꿈을 비는 마음』(1978), 『난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요』(1984), 『한 하늘 두 하늘』(1989), 『옥중일기』(1991) 등이 있고, 수필집에 『새 것, 아름다운 것』(1984)이 있으며, 『꿈이 오는 새벽』(1984), 『통일을 비는 마음』(1989), 『히브리 민중사』(1990), 『가슴으로 만난 평양』(1990)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