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덕은 일제강점기 덕화여숙 숙장, 인덕학원 이사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이다. 1897년(고종 34)에 출생하여 1980년 사망했다. 박임덕, 은봉, 영하인덕(永河仁德)이라고도 한다. 1919년 만세시위 선동죄로 투옥되었다. 1921년 배화학당의 교사로 근무하며 여성계몽운동을 전개했다. 1939년 '황도주의'를 표방한 녹기 연맹에 가입했다. 1941년 녹기연맹 부설기관인 청화여숙을 본 따 덕화여숙을 설립했다. 1941년 11월, 『삼천리』에 친일 관련 글을 게재했다. 1962년 인덕학원을 설립한 후 인덕실업고등학교, 인덕예술공과전문학교(현 인덕대학)를 설립했다.
1896년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출생했다. 진남포 삼숭학교 졸업 후 서울의 이화학당에 입학, 1912년 중학부, 1916년 대학부를 제3회로 졸업했다. 졸업과 함께 모교인 이화학당 교사로 근무하면서 영어 · 기하 · 체육 · 음악 등을 가르쳤다.
1919년 3 · 1운동 당시 학생들의 만세시위운동 선동죄로 동료교사 신준려(申俊勵)와 함께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4개월간 투옥되었고, 이때 제자였던 유관순의 순국을 목격했다. 석방 이후 교사 생활을 하면서 대한독립애국부인회 등에 참여했으나 12월에 다시 투옥되었다. 출옥 이후 1920년 7월 김운호와 결혼했고, 1921년부터 배화학당의 교사로 근무하면서, 신문 · 잡지 · 강연 등을 통해 여권신장과 여성계몽운동을 전개했다. 1923년에는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 회장을 맡아 금주 · 금주운동을 벌였다.
배화학당의 음악교사 루비 리(Rubie Lee)의 도움으로 도미(渡美), 1927년 조지아주(Georgia州)의 웨슬리안 대학(Wesleyan College)에 입학해 이듬해 사회학 학사로 졸업했다. 연이어 뉴욕의 콜럼비아 대학(Columbia University) 사범대학(Teacher's College)에 입학했다. 1928년 2월 뉴욕에서 근화회(槿花會)가 설립될 때 김마리아(金瑪利亞) · 황애시덕(黃愛施德) 등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당시 미국에 있던 조선인유학생들의 단체인 북미유학생총회(北美留學生總會 : The Korean Student Federation of North America)에 참여해 1930년 종교부장을 맡았다.
콜럼비아 대학교 재학 당시 국제기독교청년회 초청으로 미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 등 여러 국가들의 대학에서 순회강연회의 연사로 활동했다. 1930년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고 졸업한 이후 미국의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에 가담, 미국 전역에서 강연회을 개최했다. 1931년 10월 귀국 이후 곧바로 이혼함으로써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1932년 황애시덕 · 김활란(金活蘭) 등과 함께 조선직업부인협회를 통해 여성들을 위한 경제학 강연활동을 벌였다.
1933년에는 감리교 농촌부녀지도자수양소에서 활동하는 등 농촌계몽운동을 벌였고, 1935년에는 『농촌교역지침(農村敎役指針)』을 발간했다. 1935년 11월부터 1937년 9월까지 미국 시찰을 다녀왔다. 1939년 '황도주의(皇道主義)'를 표방한 녹기연맹(綠旗聯盟)에 가입했고, 경성기독교여자청년회(YWCA)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1941년 녹기연맹의 부설기관인 청화여숙(淸和女塾)을 모델 삼아 '결혼 직전의 고녀(高女) 출신 여성들을 대상으로 '교양있는 주부'를 양성'할 목적으로 덕화여숙(德和女塾)을 설립했다. 이 덕화여숙은 1943년 3월 녹기연맹으로 경영이 이관되었고 1945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폐쇄되었다.
1941년 『삼천리(三千里)』 사장 김동환(金東煥) 중심으로 결성된 임전대책협의회에 참여해 그해 9월 임전대책협력회의 시국강연에 참석, '성전(聖戰)에 임하여 여성들의 전쟁협력이 승전의 길'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했고, 이는 「임전(臨戰) 애국자의 대사자후! 승전의 길은 여기 있다」(『삼천리』 1941.11)라는 제목으로 잡지에 게재되었다.
이후 같은해 10월 임전대책협력회가 윤치호(尹致昊)가 중심이 된 흥아보국단(興亞報國團)과 통합하여 전시체제기 최대의 민간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이 결성될 때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평의원 · 부인대 지도위원을 맡았다. 이외에도 다수의 전쟁 선전 관련 행사에 참여했고 다수의 친일 관련 글들을 남겼다.
해방 이후 1945년 10월 독립촉성중앙회, 1946년 6월 독립촉성애국부인회에 가담했으며, 같은해 10월 제1회 국제부인대회에 한국대표로 미국을 방문했다. 1946년 12월에도 미국으로 건너가 1950년대 중반까지 미국 각지에서 한국의 실정을 강연했으며, 1954년 자전적 영문 소설 『9월 원숭이(September Monkey)』(New York, Haper &Brothers, 1954)를 출판했다. 이외에도 『호랑이 시(The Hour of the Tiger)』(1965), 『The Cock Still Crows』(1977), 『The Wisdom of the Dragon)』(1970) 등의 저서를 출판했다.
1962년 학교법인 인덕학원을 설립, 이사장을 맡았고 이듬해 인덕실업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이사장과 교장서리를 겸했다. 1972년 인덕예술공과전문학교(현 인덕대학)를 설립했다. 1980년 4월 3일 사망했다.
박인덕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 · 13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7: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7∼53)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