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희용은 일제강점기 청년운동 및 신간회운동에 참여한 사회주의운동가, 독립운동가로 해방 후 성균관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다. 경상북도 고 령출신. 게이오(慶應)대학을 졸업했다. 일본 사상단체인 신인회, 효민회, 코스모구락부, 십월회, 북성회 등에 가입해서 활동했다. 『전진(前進)』의 편집 발행인이었다. 1927년 신간회 고령지회 지회장에 선임되었다. 1945년 9월 한국민주당 결성에 참여했고. 1947년 잡지 [재건]의 주간이 되었다. 1960년 4월혁명 시 재경교수단 구국선언과 4․25교수 데모를 주도했다.
변희용(卞熙瑢)은 1894년(고종 31) 경상북도 고령군 임천면에서 태어났다. 호는 일파(一波)이고, 부인은 신민당 고문 등을 역임한 정치인 박순천(朴順天)이다. 1917년 일본 게이오대학〔慶應大學〕 이재과(理財科)에 입학하여 1921년 봄에 졸업하였다.
조선유학생학우회에 참여하여 간부로 활동하였다. 1919년 도쿄 유학생들의 2 · 8독립선언에 참여하였고, 후속 운동을 전개하다가 일제 경찰에 일시 구금되었다. 같은 해 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외교부 차장인 여운형(呂運亨)이 도쿄를 방문하였을 때 환영회에 참여하였다.
1920년 7월 와세다대학〔早稲田大学〕 학생 다카츠 마시미치〔高津正道〕가 효민회(曉民會)를 결성하자 가입하였다. 11월 사회주의 사상단체인 코스모구락부가 결성되자 이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21년 김약수(金若水) 등과 함께 『대중시보(大衆時報)』 창간에 참여하였다. 가을 ‘대중시보사 그룹’이 해체되자,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여 재일본 조직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 3월에는 무산자의 행진과 신사회 건설을 내세운 『전진(前進)』 창간을 주도하여 편집 발행인이 되었다. 「마르크스주의의 학술적 연구」 등 마르크스주의 선전과 관련된 글을 다수 기고하였다. 박형병(朴衡秉), 이정윤(李廷允) 등과 ‘전진사 그룹’을 형성하였다. 박형병 등과 사상단체 시월회(十月會) 결성을 주도하였고, 1923년 1월 시월회와 적우회(赤友會)가 통합하여 북성회(北星會)가 결성되자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1924년 3월 귀국하여 『 시대일보』 학예부장이 되었으며, 『 조선지광(朝鮮之光)』 편집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4월 조선청년총동맹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5월 조선공산당창립대표회준비위원회(13인회)에 참가하였다.
1925년 10월 재일본 사상단체 일월회(一月會)의 편집부 위원이 되어 기관지 『사상운동(思想運動)』 간행에 참여하였다. 1926년 1월 『 조선일보』에 "합동을 통하여 통일전선으로"라는 논설을 게재하였다. 1927년 9월 신간회(新幹會) 고령지회 설립을 주도하고 지회장에 선임되었다. 1929년 8월에는 재무부장 겸 회계로 물러났지만, 상무위원 직은 계속하였다. 1930년 11월 신간회 김병로(金炳魯) 중앙집행위원장 체제가 구축될 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2년 2월 『 동아일보』 고령지국 기자 겸 고문에 선임되었고, 1930년대 후반부터는 경상남도 진양군 일대에서 광산을 경영하였다.
8 · 15광복 직후 1945년 9월 한국민주당 결성에 참여하였고, 12월 한국민주당 주도 세력의 정계 개편 운동 과정에서 결성된 ‘애국금헌성회(愛國金獻誠會)’의 선전부원으로 활동하였다. 1947년 잡지 『재건』의 주간이 되어 소련 및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논설을 게재하였다. 1947년 성균관대학교 교수가 되어 법정대학장을 지냈다. 1960년 4 · 19혁명 당시 재경교수단 구국선언과 4 · 25 교수 시위를 주도하였다. 같은 해 5월 성균관대학교 총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