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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기군(別技軍)

근대사제도

 1881년(고종 18)에 설치된 신식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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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기군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1881년(고종 18)에 설치된 신식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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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이래 제국주의 세력의 침투는 이전보다 심해졌다. 조선 정부는 이에 대비하기 위해 부국강병책을 모색하면서 신문명과 근대적인 기술을 받아들이는 개화정치를 지향하였다.
이러한 계획의 일환으로 일본에는 수신사(修信使), 청나라에는 영선사를 파견하여 문물제도의 시찰과 근대적 기술학을 배워오도록 하였다. 또 신문화 수입의 태세를 갖추기 위해, 청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강병책의 일환인 군사기예(軍事技藝)에 대한 문제는 교사를 초빙하여 신식 군사연습을 실시하도록 계획하였다. 일본은 조선 정부의 이와 같은 계획을 사전에 탐지하고 각종 소총을 기증하였다. 동시에 1881년 4월 군무사경리당상(軍務司經理堂上) 민겸호(閔謙鎬)와 예조판서 홍우창(洪祐昌)에게 군사 훈련을 위한 교사 문제를 돕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를 통해 이른바 「천호리모도레이조종사련융서(薦掘本禮造從事鍊戎書)」라는 것을 보냈다. 호리모도는 일본 육군병학교(陸軍兵學校) 출신으로 소위로 임명되었으며, 병사 훈련에 능력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민겸호는 이러한 일본의 요청을 4월 23일 고종에게 보고하였다. 고종은 일본 측의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그리고 병사의 선발과 조련을 책임질 장령(將領)을 선발하되, 문(文)·음(蔭)·무(武)를 가리지 말고 선발하라고 하였다.
이에 군무사에서는 별군관(別軍官) 윤웅렬(尹雄烈)을 중심으로 오군문(五軍門)으로부터 신체가 강건한 지원자 80여 명을 특별히 선발하여 무위영(武衛營)에 소속시켰다. 이를 별기대(別技隊) 또는 별기군이라 했다. 또 일본인 교관에 의해 훈련된다 하여 왜별기(倭別技)라고도 하였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신식 군대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변천
별기군의 총책임자인 교련소당상에는 외척 가운데 소장 거물인 민영익(閔泳翊)을 임명하였다. 정령관(正領官)에 한성근(韓聖根), 좌부령관(左副領官)에 윤웅렬, 우부령관에 김노완(金魯完), 참령관에 우범선(禹範善)을 임명하였다. 군사 훈련에 대한 직접적 책임은 호리모도가 담당하게 하였다. 통역은 어학생 다케다[武田甚太郎]가 맡았고, 때로 일본공사관 순사들도 동원하여 보조로 삼았다.
별기군의 훈련은 그 해 5월 9일부터 서대문 밖 모화관(慕華館)을 가교장(假敎場)으로 하여 실시하다가, 뒤에는 하도감(下都監) 자리를 옮겨 본격화하였다. 별기군은 급료와 피복 등 모든 대우에서 구식 군대보다 아주 좋은 편이었다. 구식 군대의 시기 대상이 되었을 만큼 별기군에 대한 정부의 관심은 상당했다.
호리모도는 훈련을 시작한 지 두 달 만인 7월에 성과가 대단하다고 자랑하면서 병학교 설립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8월에는 고종이 춘당대(春塘臺)에 나가 별기군 교련을 감열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별기군은 1882년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구식 군대의 습격을 받아 하도감의 교련장에서 희생자가 났다. 이때 교관 호리모도 이하 일본인들이 살해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의의와 평가
임오군란을 계기로 군사제도가 다시 옛 군영체제로 바뀌면서 별기군은 모두 오군문의 본대로 되돌아갔다. 시대적 분위기 미숙으로 새로운 군사 개혁이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별기군은 정부의 개혁의지와는 달리 단명에 그치고 만 것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6년)
차문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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