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비의 규모는 높이 162㎝, 폭 69㎝, 두께 18㎝이며, 정면 1칸, 측면 1칸의 겹처마 맛배지붕의 비각 안에 위치하고 있다.
김준신은 상주목(尙州牧) 화령현(化寧縣) 판곡리(板谷里) 출신으로, 본관은 청도(淸道)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상주목사 김해(金澥)의 산하 군관의 한 사람으로 4월 20일을 전후해 칠곡(漆谷)의 석전(石田)과 대구(大丘)의 금호전(琴湖戰)에 솔령장(率領將)이 되어 참전하였다. 그러나 아군이 겁을 먹고 달아나는 바람에 전과를 거두지 못한 채 상주목사ㆍ함창현감 등과 상주에 귀환하였다.
4월 25일 상주읍이 왜적에 의해 함락될 때 북천(北川) 증연(甑淵)에서 이일(李鎰)의 종사관(從事官)인 윤섬(尹暹)ㆍ이경류(李慶流)ㆍ박호(朴箎)와 상주판관인 권길(權吉), 상주호장(尙州戶長) 박걸(朴傑) 등과 함께 순절하였다.
그러나 그의 행적은 『선조실록』과 『선무원종공신녹권(宣武原從功臣錄券)』에는 누락되었다. 그러다가 정조 대에 상주 사림(士林)의 건의로 충의단을 세워 당시 순절 장사(將士)들을 봉향할 때 김준신의 충절을 높이 평가해 윤섬ㆍ이경류ㆍ박호 3신과 함께 배향되었다.
‘의사(義士)’라는 칭호는 뒷날 정조의 특명으로 부쳐졌으며, 그 때 설립한 충의단에 봉향하였다. 1819년(순조 19)에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로 추증하고 정려하였다.
1850년(철종 1)에 건립된 청도김씨삼세제단비(淸道金氏三世祭壇碑)는 홍직필(洪直弼) 찬(撰), 이경재(李景在)ㆍ윤정현(尹定鉉)의 서(書)로서 입향조(入鄕祖)인 김구정(金九鼎, 고려 黃澗縣監)과 현손(玄孫)인 김흡(金洽, 김준신 의사의 父, 修義副尉)에 대해 간략하게 기록한 뒤, 김준신 의사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우고 순절한 경위와 삼세제단비의 건립과정을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