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변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서학교수, 경성통판, 예조정랑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자경(子慶)
용계(龍溪)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05년(선조 38)
사망 연도
1656년(효종 7)
본관
달성(達城)
주요 관직
서학교수|경성통판|예조정랑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후기에, 서학교수, 경성통판, 예조정랑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자경(子慶), 호는 용계(龍溪). 서응기(徐應基)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서함(徐涵)이고, 아버지는 서사건(徐思建)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30년(인조 8) 사마시에 합격하고 1633년(인조 11)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서학교수가 되었다. 그 뒤 청나라에 대한 척화(斥和)를 주장하여 경성통판(京城通判)에 승진하였다. 1652년(효종 3) 예조정랑으로 있으면서, 귀인(貴人) 조씨(趙氏)의 옥사에 관계되어 유배된 그녀의 아들 이징(李澂)과 이숙(李潚)을 용서하고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아들을 유배에서 풀 것을 주장하였다.

1656년 천안군수로 재직하던 중, 승지 유도삼(柳道三)이 왕의 동생 인평대군(麟坪大君)에게 실수로 신하라고 자칭하였던 사실을 빌미로 인평대군의 처남 오정일(吳挺一)을 비롯하여 허적(許積)·원두표(元斗杓)·한전(韓戩)·윤세교(尹世喬) 등이 모역한다고 고발하였으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고 심문을 받던 중 장살(杖殺)되었다. 뒤에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어 예조참의를 추증받고, 대구의 옥계서원(玉溪書院)에 향사되었다. 저서로는 『용계집(龍溪集)』이 있다.

참고문헌

『효종실록(孝宗實錄)』
『대구읍지(大邱邑誌)』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국조방목(國朝榜目)』
『자저(自著)』
『용계집(龍溪集)』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