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1506년(연산군 12) 중종반정 이후 폐위된 왕비 신씨(愼氏)의 복위를 위하여 세 사람이 관인(官印)을 걸고 상소를 올리기로 결의한 곳이다.
이곳에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비각(碑閣)이 있는데, 비각 안에는 높이 157㎝, 폭 80㎝, 두께 23㎝의 삼인대비(三印臺碑)가 세워져 있다.
이 비는 1744년(영조 20) 4월에 세운 것이다. 도암(陶庵) 이재(李縡)가 비문을 짓고, 정암(貞庵) 민우수(閔遇洙)가 비문의 글씨를 썼으며, 지수재(知守齋) 유척기(兪拓基)가 전서(篆書)를 썼다. 연산군의 학정이 극에 이르자 박원종(朴元宗) · 성희안(成希顔) 등이 주동이 되어 연산군을 폐출하고 성종의 둘째 왕자이던 진성대군을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한 중종반정이 있었다.
이 때 반정공신(反正功臣)들은 중종의 비 신씨를 왕비에서 폐위시킬 것을 강요하였다. 이에 중종은 신씨를 폐출하고 장경왕후(章敬王后)를 맞이하였으나, 1515년(중종 10)에 왕비는 별세하였다.
이에 당시 담양부사 박상(朴祥), 순창군수 김정(金淨), 무안현감 유옥(柳沃) 등 세 사람이 비밀리에 이곳 강천사 계곡에 모여 폐위된 신씨를 왕비로 복위시키자는 상소를 올리기로 결의하였다.
이때 이들이 소나무 가지에 관인을 걸어 놓고 맹세한 곳이 여기라 하여 삼인대라 부르게 되었으며 삼인대비를 세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