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승지지는 조선시대에 사회의 난리를 피하여 몸을 보전할 수 있고 거주 환경이 좋은 곳으로 지목된 10여 곳의 피난처를 말한다. 십승지·승지라고도 한다. 승지는 원래 자연 경관과 거주 환경이 뛰어난 장소를 말하는데, 조선 중·후기 사회 혼란과 경제 피폐가 심해지면서 개인의 안위를 보전하며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피난지라는 의미로 사용됐다. 자연환경이 좋고, 외침이나 정치적인 침해가 없으며, 자족적인 경제생활이 충족되는 곳이 입지조건이다. 이 관념은 조선 중·후기에 민간계층에 깊숙이 전파되어 거주지의 선택, 인구이동, 그리고 공간인식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한국인의 전통적 이상향의 하나이다. 『정감록(鄭鑑錄)』에 근거한 역사적 용어이며, 십승지라고도 한다. 십승지지에 관한 기록은 『정감록』 중에 감결(鑑訣), 징비록(懲毖錄), 유산록(遊山錄), 운기귀책(運奇龜策), 삼한산림비기(三韓山林秘記), 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 도선비결(道詵秘訣), 토정가장결(土亭家藏訣) 등에 나타난다. 대체적으로 공통된 장소는 영월의 정동(正東)쪽 상류, 풍기의 금계촌(金鷄村), 가야산의 만수동(萬壽洞), 부안 호암(壺巖) 아래, 보은 속리산 아래의 증항(甑項) 근처, 남원 운봉 지리산 아래의 동점촌(銅店村), 안동의 화곡(華谷, 현 봉화읍), 단양의 영춘, 무주의 무풍 북동쪽 등이다.
십승지지는 조선 후기의 이상향에 관한 민간인들의 사회적 담론이었다. 십승지 관념은 조선 중․후기에 민간계층에 깊숙이 전파되어 거주지의 선택 및 인구이동, 그리고 공간인식에 큰 영향력을 주었다. 십승지지는 조선후기의 정치․사회적 혼란과 민간인들의 경제적 피폐라는 역사적 배경에서 생겨났다. 십승지의 입지조건은 자연환경이 좋고, 외침이나 정치적인 침해가 없으며, 자족적인 경제생활이 충족되는 곳이었다.
사람은 이상적인 장소를 희구하며 살고자 한다. 이상향에 대한 관념은 동서양이 다르고 시대에 따라 달랐으며 문화속성에 따라 차이가 난다. 불교의 극락과 정토, 기독교의 천국과 에덴동산, 도교의 무릉도원, 삼신산, 청학동 등은 사후 아니면 관념적인 이상 세계를 일컫는 말이고, 현실의 이상향을 표현한 말로서도 길지(吉地), 낙토(樂土), 복지(福地), 명당(明堂), 가거지(可居地) 등의 용어들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승지(勝地)라는 말이다. 승지라는 말은 사전적 의미로 자연 경관과 거주 환경이 뛰어난 장소를 말하지만, 역사적으로 조선 중․후기의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피폐로 말미암아, 개인의 안위를 보전하며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피난지를 뜻하였다. 『정감록』에서는 그 여남은 장소를 십승지지라고 표현하였다.
십승지지는 『정감록』이라는 도참서의 키워드로 등장한 이래, 조선시대 민간인들의 지리인식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 당시 민간인들은 정감록의 십승지지를 믿고 십승지를 찾아 나섰으며, 실제 거주지를 그곳으로 옮긴 경우가 있었고, 풍기의 경우처럼 지금까지 그 후손이 살고 있는 사례도 있다. 외침으로 인한 전란과 정치적 환란의 굴곡에서 살림살이가 피폐하였던 민간인들은 정감록을 믿고 피난, 보신(保身)의 삶을 일구어 나갔던 것이다.
십승지의 위치에 관해 『정감록』의 「감결」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몸을 보전할 땅이 열 있으니, 풍기 금계촌, 안동 화곡, 개령 용궁, 가야, 단춘, 공주 정산 마곡 진천, 목천, 봉화, 운봉 두류산, 태백으로 길이 살 수 있는 땅이다.” 이어서 열 곳 승지의 구체적인 지리적 위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첫째는 풍기 차암 금계촌으로 소백산 두 물골 사이에 있다. 둘째는 화산 소령 고기로 청양현에 있는데, 봉화 동쪽 마을로 넘어 들어갔다. 셋째는 보은 속리산 증항 근처로, 난리를 만나 몸을 숨기면 만에 하나도 다치지 않을 것이다.
넷째는 운봉 행촌이다. 다섯째는 예천 금당실로 이 땅에는 난의 해가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에 임금의 수레가 닥치면 그렇지 않다. 여섯째는 공주 계룡산으로 유구 마곡의 두 물골의 둘레가 2백리나 되므로 난을 피할 수 있다. 일곱째는 영월 정동쪽 상류로 난을 피해 종적을 감출만 하다. 여덟째는 무주 무봉산 동쪽 동방 상동으로 피난 못할 곳이 없다. 아홉째는 부안 호암 아래가 가장 기이하다. 열째는 가야산 만수동으로 그 둘레가 200리나 되어 영원히 몸을 보전할 수 있다. 정선현 상원산 계룡봉 역시 난을 피할 만하다.”
십승지지는 『정감록』의 문헌에 따라 위치와 장소가 조금씩 달리 나타나며 추가되기도 하였다. 「남격암 산수 십승 보길지지」에는 감결에서 말한 열 곳 외에도 여러 장소가 더해졌다. 그 지역은 모두 태백산과 소백산의 남쪽으로서, 풍기와 영주, 서쪽으로 단양과 영춘, 동쪽으로 봉화와 안동이 보신처라고 하였고, 내포의 비인과 남포, 금오산, 덕유산, 두류산, 조계산, 가야산, 조령, 변산, 월출산, 내장산, 계룡산, 수산, 보미산, 오대산, 상원산, 팔령산, 유량산, 온산 등도 해당 장소로 들었다. 한편 『정감록』의 「서계이선생가장결」에는 “황간 영동 사이에는 가히 만 가호가 살아나고 청주 남쪽과 문의 북쪽 역시 모습을 숨길 수 있다.”고 다시 몇 군데가 추가되었다.
십승지는 전란이 미치지 않아서 몸을 보전할 수 있는 입지 조건을 갖추어야 했다. 오늘날에도 『정감록』에서 지점된 십승지가 모두 지리적으로 내륙의 산간 오지에 위치하며, 한양이나 고을로 이어지는 큰길에 인접하지 않은 것도 그러한 까닭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서계이선생가장결」에 “황간 영동 사이에는 만 가호가 살아나고 청주 남쪽과 문의 북쪽 역시 모습을 숨길 수 있다. 이런 세상을 맞아 남편은 밭을 갈고 아내는 베를 짜되 벼슬자리에 오르지 말고 농사짓는데 부지런히 힘씀으로써 스스로 살 길을 버리지 않도록 하라.”는 말의 표현으로 보아서도, 조선시대에 십승지라는 이상향의 담론이 형성된 사회적 배경은 조선 후기에 내외의 전란 및 정치적 혼란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아시아의 이상향은 무릉도원(중국)과 청학동(한국)이라는 아이콘이 대변하듯이 자연경관이 심미적으로 뛰어나고 주거환경이 풍요로운 곳이라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했다. 십승지 이상향 역시 모두 산과 하천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의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다. 승지의 장소성을 이루는 기본적 요소는 취락을 이루어 농경할 수 있는 지리적 조건으로서, 토지의 규모, 토양의 비옥도 및 생산성, 수자원 이용의 충족성, 온화한 기후 조건이 갖춰진 곳이었다. 십승지는 산이 높고 계곡이 깊어 수원(水源)이 충분하며, 오랫동안 농경을 통한 자급자족이 가능한 경제적 환경조건도 요구되었다. 풍수적인 명당길지도 요청되는 조건 중의 하나였다. 풍수는 십승지 입지경관의 규정 및 공간적인 이데올로기로 영향을 미쳤으며, 이러한 사실은 십승지가 대체로 풍수가 좋은 배산임수의 자연 입지조건을 지니고 있는 데서 짐작할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십승지 관념은 청학동 이상향 관념과도 결합하였다. 『정감록』에서 십승지로 지점된 위치에서 지리산 청학동은 원래 포함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와 근대에 이르러 청학동과 십승지의 장소이미지가 상호 결합하여 ‘십승지 청학동’이라는 장소성을 이루게 되었다. “세상에서 이르기를 지리산 중에는 청학동이 있는데 십승지의 하나라고 한다.”(『頭流山遊錄』)거나, “청학동은 세상 사람들이 신선의 고향이니 십승지지니 하여 널리 전하던 바이라”(『개벽』 제34호, 1923년 4월 1일)는 표현이 당시의 사회적 인식을 잘 말해준다.
십승지지 중에서 풍기 금계촌은 문헌에 첫 번째로 등장하여 정감록 비결을 믿는 민간인들의 거주지 정착과 인구 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풍기에서도 소백산 아래의 금계동, 욱금동, 삼가동은 풍기 승지의 대표적인 장소로 꼽혔다. 1959년 기준의 조사연구에 의하면, 풍기로 전입한 주민들의 이주동기 중에 8%가 정감록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주한 주민들은 대부분이 평안도와 황해도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풍기읍 중심지에서 정착하여 인삼과 과수를 재배하거나 소백산 기슭에서 밭농사를 하며 은둔하는 부류들이 있었다. 풍기에는 근래까지만 해도 후손들이 살았는데, 그 중 풍기의 십승지를 필사한 그림지도를 소장하고 있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지리산지의 십승지는 운봉 두류산(「감결」), 혹은 운봉 행촌(「감결」 십승지지), 혹은 운봉 두류산 아래 동점촌 100리 안(「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운봉에 있다는 지리산 십승지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유교 지식인들과 지리산 주변에 거주하는 지역민들 사이에도 관심을 끌었던 것 같다.
“운봉 두류산 아래에 동점촌이 있는데, 100리 내에 영구히 거주할 만하지만 그 곳을 모른다. 근래에 운봉 사람 곽재영이 비로소 찾았는데 말하기를 읍에서 거리는 25리이고, 지리산 반야봉 괘협처(掛峽處)이며, 석벽의 높이가 몇 길이나 되는데 동점(銅店)이라는 두 글자를 새겨놓았다고 한다. 글자의 획이 어지러이 소멸되어 분간하기 어려운데 예전에 구리를 제련하던 곳이다. 그렇기에 근방에 돌을 파내고 구리광을 캐는 흔적이 많다. 동점촌은 그 가운데에 있는데 평탄하지만 가운데에 앉아 있으면 사방이 보이지 않고 주위가 제법 넓다. 30, 40호가 거주할 만한 농경지이다.”
십승지지 중에 백두대간의 덕유산과 대덕산 지역으로 거론된 내용은 「감결」 외에도 「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가 있다. 여기서, “무주 무풍 북쪽 동굴 옆의 음지이니 덕유산은 난리를 피하지 못할 곳이 없다”고 구체적인 장소를 기록하면서도 덕유산 전체를 난리를 피하여 몸을 보전하는 승지로서 공간적 영역이 확대되어 표현되어 있다. 정감록의 「감결」이나 「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에서 말한 무풍은 현재의 전북특별자치도 무주군 무풍면의 영역이다. 백두대간의 덕유산과 삼도봉 자락에 둘러싸인 무풍은 조선시대의 도로 교통 조건에서 큰 길과 떨어져 있어 지리적 오지에 위치하고 있으나 큰 하천을 끼고 있고 산으로 둘러싸인 넓은 분지 지형을 갖추고 있다. 실학자 이중환도 『택리지』에서 말하기를, “ 남사고(南師古)는 무풍을 복지(福地)라 하였다. 골 바깥쪽은 온 산에 밭이 기름져서 넉넉하게 사는 마을이 많으니, 이 점은 속리산 이북의 산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고 하였다.
이상적인 주거지의 위치와 모습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사회적으로 재구성된다. 십승지지는 조선 후기 민간인의 이상향 담론이었다. 그들은 십승지로 지목된 곳을 찾아 삶터를 개척하고, 미래의 희망을 꿈꾸며 생활을 일구었다. 오늘날 자본주의적 가치의 지배로 생태환경의 위기와 거주의 진정성이 위협받는 사회 현실에서, 승지의 문화전통과 생활사의 의미를 돌이켜볼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