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

남하열차 / 6.25
남하열차 / 6.25
국방
사건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위 38°선 전역에 걸쳐 북한군이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한반도 전쟁.
이칭
이칭
6·25, 육이오, 6·25전쟁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위 38°선 전역에 걸쳐 북한군이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한반도 전쟁이다. 광복 후 한반도에는 냉전체제 속에서 남북에 별개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북한이 통일을 명분으로 전면적인 남침을 개시했다. 유엔의 결의에 따른 국제사회의 개입으로 역전되던 전황은 다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교착상태에 머물다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이루어지면서 전쟁이 중지되었다. 한민족 전체에 큰 손실을 끼쳤고 이후 남북분단이 더욱 고착화하여 아직도 휴전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정의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위 38°선 전역에 걸쳐 북한군이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한반도 전쟁.
한국전쟁의 배경

전후의 전개

1943년 12월의 카이로선언에서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였고 이는 다시 1945년 7월의 포츠담선언에서 재확인되었다. 다만, 독립은 ‘적당한 시기에’ 이룩한다는 조건부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은 항복하였고, 그 통치지역이었던 한반도는 군사적인 편의에 따라 38선을 경계로 남북한은 미 · 소 양군에 의하여 분할, 점령되었다. 분할된 상태로 미 · 영 · 소 3국 외상은 그 해 12월에 모스크바에서 회동하고 한반도에 5년 간 신탁통치를 실시할 것을 합의하였다. 이에 대하여 한국민은 맹렬히 반탁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좌파세력이 소련의 지령을 받고 찬탁으로 돌아섬으로써 정치적인 혼란이 일어났다. 한국문제가 반탁운동으로 난국에 직면하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946년과 1947년 두 차례에 걸쳐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아무런 해결책도 강구하지 못한 채 결렬되었다.

1947년 9월에 미국은 소련의 반대를 뿌리치고 한국 문제를 일방적으로 유엔에 제기하였다. 이로써, 38선을 경계로 한 남북한은 미국과 소련의 대립 속에서 이데올로기의 갈등마저 겪으면서 국제 무대에 노출되었다. 1947년 11월에 열린 유엔총회에서는 유엔 임시한국위원단을 구성하고 그 위원단의 감시 아래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북한을 점령하고 있는 소련군사령관은 1948년 초에 활동을 개시한 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하였다. 이에 유엔소총회에서는 선거의 감시가 가능한 지역의 총선거를 결의하여 그 해 5월에는 남한만의 선거가 행해졌고, 8월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 해 12월의 제3차 유엔총회에서는 한국을 총선거가 실시된 합법정부로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북한에서는 김일성(金日成)을 중심으로 하여 ‘최고인민회의’ 선거를 실시하여 9월에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함에 따라 소련을 비롯한 공산 여러 나라가 이를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한반도에서는 남북한이 각각 별개의 정권을 수립하여 분단을 공식화하였다. 정부 수립을 마친 북한은 곧이어 미소 양군의 철수를 요구하였고, 이에 부응하여 지정학적으로 유리한 소련은 그 해 10월부터 철병을 개시하였다. 남한에서는 공산세력의 준동에 대응하여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을 요청한 바 있고, 이에 따라 미군의 주둔은 잠시 연기되긴 하였으나, 1949년 6월에 미국은 약 500명에 달하는 군사고문단만을 남긴 채 남한에서 철병을 완료하였다.

남북한의 군사력 증강

미국과 소련이 그어 놓은 잠정적인 군사분계선이었던 38선은 이제 남북한이 각각 별개의 정부를 수립함으로써 국경 아닌 국경선이 되어버렸다. 그러한 분단 과정에서 우선 북한은 소련에 의한 계획적인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여 1948년 10월에 소련군이 철수할 때까지 이미 완전 무장한 4개 보병사단과 소련제 T-34 중형전차로 장비한 제105 기갑대대를 편성하였다. 1949년 3월 17일에는 소련과 북한 간에 조소군사비밀협정이 체결되고, 또 3월 18일에는 중공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중국 공산군에 있던 조선군 2만 5000명이 북한에 인도되었다. 이로써 10개 북한군 사단 13만 명이 38선에 배치되었고, 10만 명의 예비군까지 후방에 조직되었다.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게 된 김일성은 이어 국내외 정세의 변화에 고무되어 무력통일을 구상하게 되었다. 국외의 요인으로는 ① 1949년 10월 중국 대륙이 공산화되었고, ② 1949년 6월에 주한미군이 철수를 완료하였으며, ③ 1950년 1월 미국의 극동방어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시킨다는 애치슨(Acheson, D. G.)미국무장관의 성명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④ 1949년 말경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 남한의 무력침공 계획에 대한 스탈린(Stalin, I. V.)의 승인을 받아냈다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또 국내의 요인으로는 ① 남조선노동당의 실질적 붕괴에 따라 남한 내부에서 ‘인민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해졌고, ② 김일성은 ‘민족해방을 위한 투사로서의 경쟁’에서 박헌영(朴憲永)을 압도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 그리고 ③ 남한이 아직도 정치 · 경제적으로 혼란상태에 있었고, ④ 국군의 병력 · 장비가 열세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김일성은 1950년 4월 초 조선노동당 중앙정치위원회에서 무력통일안을 확정시키는 한편, 이러한 침략계획을 은폐하기 위하여 북한 공산당은 남북통일 최고입법회의의 서울 개최, 남북 국회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등, 평화공세를 펼쳤다.

한편, 남한에서는 1946년 1월에 미군정 산하 국방경비대와 해안경비대가 1948년 8월에 정부가 수립되면서 각각 육군 · 해군으로 국군으로 개편되었고, 1949년 4월에는 해병대, 그리고 10월에는 공군이 편성되어 병력은 약 10만에 이르렀다. 그러나 장비가 빈약하여 북한의 군사력에는 비할 수 없는 상태였다. 더구나 예비군도 없이 8개 사단 중 4개 사단은 38도선에서부터 먼 후방에 배치되어 공산게릴라 소탕에 여념이 없었다.

구분 한국군 북괴군
곡사포: 91문 자주포 및 각종 곡사포: 728문
대전차포: 140문 대전차포: 550문
지상화력 박격포: 960문 박격포: 2,318문
장갑차: 24대 장갑차: 54대
전차: 242대
해 군 전투함 및 소해정: 28척 어뢰정: 30척
수송선 및 기타: 43척 수송선 및 기타: ?
공군 연락기 및 연습기: 22대 전투기·폭격기 및 기타: 211대
〈표 1〉 남북한의 군사장비 보유수

유엔의 개입경위

이렇게 하여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공산군은 38선 전역에 걸쳐 전면 남침을 개시하였다. 전쟁발발 소식을 접한 미국은 25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긴급소집하여 북한의 무력공격은 평화를 파괴하는 ‘침략행위’라고 선언하고, 북한은 즉시 전투행위를 중지하고 그 군대를 38선으로 철군시킬 것을 요청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또한, 유엔 회원국들에게 한국에 원조를 제공할 것과 북한에 대해서는 어떤 원조도 중지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유엔의 요청은 북한에 의해 계속 묵살된 채 전쟁은 계속되었고, 6월 27일에 이르러 미국 대통령 트루만(Truman, H. S.)은 미국의 해군 · 공군으로 하여금 한국군을 지원하도록 명령하였다. 그 날 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 회원국들에게 북한의 무력공격을 격퇴하고 국제 평화와 한반도의 안전을 회복하기 위하여 필요한 원조를 한국에 제공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권고문을 채택함으로써 미국의 군사조치를 추후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곧 이어 6월 28일에는 동경(東京)에 있던 미 극동군 사령관인 맥아더(MacArthur, D. S.) 원수가 내한하여 전선을 시찰하고 미 국방성에 지상군 파견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미국의 군사조치는 다시 7월 7일에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반도의 유엔 군사활동을 위하여 미국에 최고지휘권을 위임하는 결의를 채택함으로써 미국의 맥아더가 유엔군 총사령관에 임명되고 유엔군의 파견이 결정되었다. 이로써, 한반도에서의 군사지휘권은 미국의 맥아더 원수에게 주어졌으며, 한국을 원조하기 위하여 육군 · 해군 · 공군 및 지상군을 파견한 16개 국의 군대는 유엔군사령관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이때 한국의 이승만(李承晩) 대통령도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인 맥아더에게 이양한다는 각서를 썼고, 이것이 이른바 대전각서로서 7월 14일에 수교되었다.

전쟁의 진전과 남한의 공산통치

전쟁의 양상

사전에 충분히 계획되고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북한군이 초전에 우세하였던 것은 당연하다. 전쟁을 일으킨 다음날인 6월 26일에 북한의 김일성은 이 전쟁을 가리켜 남한을 ‘해방’시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으로 하여금 조국통일을 성취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방송하였다. 정치가 불안정한 가운데 무방비상태에 있던 한국에 대한 북한의 기습공격은 6월 27일에는 이미 서울을 점령하기에 이르렀고, 7월 3일에는 한강을 넘어 파죽지세로 남진을 계속하였다. 한편,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24보병사단이 즉시 한국으로 이동하여 적의 진격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전세를 만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리하여 유엔군은 부산을 거점으로 한 낙동강 방어선을 확보하여 항쟁하면서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한편, 점령지역에서의 북한의 정책은 그들이 내세운 ‘해방’정책과는 정면으로 상반되는 것이었다.

남한의 동원

민족해방을 표방하였던 북한의 점령정책은 인민재판이라는 피비린내 나는 숙청을 통한 공포정치였다. 점령지역 내에서는 직업동맹 · 농민동맹 · 민주청년동맹과 여성동맹 등 여러 전위단체들이 조직되었고, 7월 14일의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정령에 의하여 9월 13일까지 점령지역의 시 · 군 · 면 · 이(동)까지도 전부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전쟁수행을 위한 동원정책을 취하였다. 그리하여 제공권을 쥐고 있던 유엔군의 폭격 속에서도 도로와 교량의 복구 수리 및 군수품과 식량을 수송하기 위하여 동원되었고, 특히 청년 · 소년을 의용군이라는 이름 아래 강제징집하여 부족한 병력을 충당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후일 정전협상과정의 포로 송환문제에서 북한으로 송환되는 것을 거부하는 반공포로의 문제를 낳아 협상의 진전을 어렵게 하였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북한군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기 위한 인천상륙작전 계획이 구상되기 시작한 것은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불과 얼마 되지 않은 7월 15일부터였다. 이 날짜로 유엔군총사령관인 맥아더는 합동참모본부에 인천상륙작전안을 상신하였으나, 이를 위한 군사력의 분산과 인천이 지형상 상륙작전을 하기에는 가장 부적합한 지역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했고, 오히려 부산 교두보에 증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맥아더는 인천의 간만의 차가 9m에 불과하지만 6시간은 상륙작전을 위하여 사용 가능하며, 북한군이 부산을 점령하기 위하여 그 지역에 집중적으로 병력을 집결하기 때문에 인천 방어가 소홀하고, 더구나 한국의 수도 서울을 빨리 탈환하는 것은 군인과 민간에게 주는 심리적 영향이 크다는 그의 주장을 굽히지 않아 드디어는 9월 8일에 대통령의 허가를 받는 데 성공하였다.

낙동강 전선에서 총반격을 시작한 것과 때를 같이하여 미 제1해병사단과 제7사단으로 이루어진 제10군단 및 5,000명에 달하는 한국해병대는 드디어 9월 15일 새벽에 인천 월미도에 기습상륙하고 그 다음날에는 인천을 함락시켰다. 미 해병대와 한국군은 서울 탈환을 목적으로 동진하였고, 미 제7사단은 남진하여 북상하는 유엔군과 오산에서 합류함으로써 북한군은 남북으로 단절되었고, 한반도의 중부 및 동부산악지대로 패주하였다.

인천에 상륙한 유엔군은 9월 26일에는 서울에 진입하였고, 완전히 회복한 뒤인 9월 29일에는 서울수복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수도 서울을 탈환한 유엔군은 동해안과 서해안을 따라 38선에 가깝게 계속 북상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계기로 전세는 완전히 뒤집혔으며, 이 기간 동안 공산군 포로는 1만 2500명에 달하였다. 서울 수복과 전세의 호전은 한국 정부로서는 숙원인 통일을 달성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이 문제는, 유엔군의 참전 목적과의 일치 여부로 논란거리였다.

국명 지상군 해군 공군
미국 보병사단 7 극동해군 극동공군
해병사단 1 미제7함대
연대전투단 2
병력 302,483명
보병여단 2 함정 17척
영국 해병특공대 1 (함공모함 1척포함)
병력 14,198명
오스트레일리아 보병대대 2 항공모함 1척 전투비행대대 1
병력 2,282명 구축함 2척 수송기편대 1
프리킷함 1척
네델란드 보병대대 1 구축함 1척
병력 819명
캐나다 보병여단 1 구축함 3척 수송기대대 1
병력 6,146명
뉴질랜드 포병대대 1 프리킷함 1척
병력 1,389명
보병대대 1 구축함 1척
프랑스 병력 1,119명
(1,185명)
필리핀 보병대대 1
병력 1,496명
터키 보병여단 1
병력 5,455명
보병대대 1 프리킷함 7척 수송기편대 1
타이 병력 1,294명 수송선 1척
(2,274명)
그리스 보병대대 1 수송기편대 1
병력 1,263명
남아프리카공화국 전투비행대대 1,255명
벨기에 보병대대 1
병력 900명
보병소대 1
룩셈부르크 병력 44명
(48)
콜롬비아 보병대대 1 프리킷함 1척
병력 1,068명
에티오피아 보병대대 1
병력 1,271명
〈표 2〉 유엔군 참전 규모
*주 : ( )안은 최대수준의 병력.

한국의 통일문제와 38선 돌파

1950년 7월 7일의 유엔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서 유엔군의 참전 목적은 ‘북한의 무력공격을 격퇴하고, 국제평화와 한반도에서의 안전보장을 회복’한다는 내용이 한국이 내세운 통일목표와 일치하는지의 여부는 다분히 미국의 해석에 의존하였다.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위하여 북진을 주장하는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의 궁극적인 목적을 통일에 두었음은 두말 할 것도 없고 맥아더 사령관도 이를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또한, 9월 1일에는 미국 트루만 대통령도 “한국인의 자유 · 독립과 통일할 권리가 있다.”고 발표함으로써 통일 문제를 긍정적으로 보았다. 미국 정부는 9월 11일에 소련과 중공이 개입할 위험이 없으면 38선 이북에서 군사작전을 전개할 수 있게 하는 합동참모본부의 지령을 맥아더에게 보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세가 호전됨에 따라 다시 9월 27일에는 38선 이북에서의 군사작전을 허가하였다. 다만, 강대국들간의 전면전쟁을 막기 위해서 지상군 및 공군이 소련이나 중국의 국경을 넘는 것을 엄히 금하였다.

그간 유엔군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은 북한의 김일성에게 무조건 항복을 권고하였으나 이는 무시된 채 중공군의 참전계획이 진행되었다. 그 해 8월 20일에 주언라이(周恩來)는 유엔 사무총장이었던 리(Lie,T.)에게 전보를 보내 “조선문제의 해결에 깊은 관심을 가진다.”고 하였으며, 9월 30일에는 다시 유엔군의 38선 돌파를 ‘방관할 수 없는 사태’라고 그 입장을 밝혔다. 또한, 10월 3일에는 북경주재 인도대사를 통하여 만약에 한국군만이 38선을 넘을 경우에는 중공의 파병은 없을 것이나 유엔군이 38선을 넘어서 북진하면 중공군이 파병될 것이라 하여, 이것을 미국에 전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언라이의 발언은 모두가 유엔의 새로운 결의를 막기 위한 압력성 위협으로만 받아들여 왔던 것이다. 한국군은 이미 10월 1일에 38선을 넘어 북상하고 있었고, 유엔에서는 유엔군의 북진에 대한 찬반양론이 펼쳐지고 있었다.

1950년 10월 7일에 유엔총회는 드디어 한반도의 통일과 부흥에 관하여 압도적 다수(찬성 47:반대 5:기권 7)로서 새로운 결의를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이 결의 속에서 유엔은 한국에 관한 원래의 목적이 통일 · 독립 · 민주한국을 수립하는 것임을 상기시키고, 한국전쟁 수행을 위해 6월 25일과 27일에 채택한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에 기초를 둔 유엔군의 행동 및 회원국들의 대한 원조의 중요성을 확인하고 다음과 같은 내용을 결의하였다.

① 한반도의 안정을 확보하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한다.

② 한국의 통일 · 독립 · 민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남북한 대표단체의 협력을 얻어 유엔주관 아래 선거를 실시한다.

③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유엔군의 행동은 한반도의 어느 부분에도 구애받지 않는다.

④ 유엔 한국위원회(1949.10.20. 설치)의 임무를 계승하기 위해 7개국으로 구성된 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회(UNCURK)를 설치, 운영한다.

이로써, 유엔군이 38선을 넘어서 진격하는 것은 허락되었고, 이 날짜로 유엔군의 북진도 본격화하였다. 다만, 정책적 배려로서 한국군 이외의 유엔군은 소련 및 중국 국경에서부터 240㎞(150마일) 밖에서만 그 행동이 허용되었다. 맥아더는 다시 북한에 항복을 권고하고 그들로 하여금 유엔에 협력하기를 권하였다. 그리고 이에 불응할 때에는 유엔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군사행동을 취할 것을 선언하였다. 그 동안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던 한국 제1군단은 10월 10일에는 원산을 점령하였고, 26일에는 미 제10군단이 상륙하여 한국군을 지원하였다.

한편, 서부전선을 담당하고 있던 미 제8군은 10월 20일에는 평양을 점령하기에 이르렀으나 동해안의 미 제10군단과의 작전상의 분리운영은 뒤에 많은 혼란을 일으킨 원인이 되었고, 이는 맥아더 장군이 분리운영을 고집한 결과였다.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계속 미 제8군과 제10군단의 통합운영을 제안하였으나 맥아더는 이를 받아 들이지 않았고, 10월 24일에는 합동참모본부의 허가도 받지 않은 채 미 제8군사령관인 워커(Walker, W. H.) 장군과 10군 단장인 알몬드(Almond, E. M.) 장군에게 “전속력으로 모든 전력을 동원하여 전진”할 것을 명하였다. 이는 한국군 이외의 유엔군에게도 무제한 북진을 허용하는 독단적 명령으로서 합동참모본부로부터 힐난을 받았다. 그러나 이는 군사적 필요에 따른 것이라고 반론하였고, 그 근거로서는 신임 미국방장관인 마샬(Marshall, G. C.)이 맥아더에게 38선을 넘어서 북상하는 것이 전술적으로나 전략적으로 지장이 없다는 통달을 제시하였다.

유엔군의 공식적인 북진과 북한영토의 점령은 이제 한국 정부가 내세우고 있는 통일정책이 구체화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른바 북한의 해방지구에 대하여 10월 1일에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사무총장에게 한국의 통일을 위한 4개 조건을 제시하였다. 즉, ① 남북한을 단일정부 밑에 통일할 것, ② 북한군은 즉각 무기를 버리고 항복할 것, ③ 유엔군은 즉각 평화가 확보될 때까지 한반도에 계속 주둔할 것, ④ 유엔은 한국에 재정원조를 제공할 것 등이었다.

이러한 문구에 대하여 유엔 한국문제중간위원회는 10월 13일에 북한지역을 한국 정부의 통치 아래 두지 않을 것을 명백히 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총선거가 행해질 때까지 유엔군사령관의 통치 아래 둘 것을 결의하였다. 또한, 맥아더사령관에게는 한국 정부의 권한을 38선 이남에 국한시킬 것과 북한에 새로운 민간행정기구를 설치하도록 명하였다. 이로 인하여 한국 정부가 추구하는 통일정책은 계속 유엔과 마찰을 빚기에 이르렀다. 우선 한국 정부는 그 통치권을 38선 이남에 국한시킨다는 유엔의 결의를 거부하고 오히려 한국 정부가 임명한 이북 5개 도지사가 군부대와 함께 북한 수복지구에 진입하도록 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10월 17일에는 유엔은 북한의 총선거를 관장하느니보다는 오직 감시하고 충고하고 원조할 것을 희망한다고 하였다. 다시 21일에는 유엔회원국들에게 유엔이나 어느 외국의 간섭 없이 한국 정부는 북한에 민정을 수립할 의향임을 명백히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유엔의 정책에 위배되는 것은 분명하였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한국 정부의 태도는 철회되어 북한에 진입한 5개 도지사는 모두 개인자격으로 들어간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10월 21일에는 평양과 원산에 각각 미 군정부가 창설되어 시정을 관할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10월 29일에 수복된 평양을 방문하여 북한의 해방과 통일 의지를 명백히 하고, 한국 정부는 북한대표의 협력을 얻어 그 통치권을 전체 한반도에 미치도록 할 것을 바라나 유엔이 한국의 권한을 38선 이남에 국한시키고 있는 상태임을 밝혔다. 또한, 30일의 기자회견에서는 유엔 한국중간위원회가 결의한 남북한 총선거에는 반대하고 한국 국회가 북한을 위하여 유보하고 있는 100석을 채우기 위한 북한만의 선거를 주장하였다. 이는 유엔군의 힘에 의존한 북한의 수복은 결코 한국 통일정책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는 것을 어렵게 한 것이다. 이로써 한국 정부의 통일정책은 1차적으로 유엔의 전쟁 목적 아래 방해를 받기에 이르렀으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잠재적인 위협세력이었던 중공군이 정식으로 개입되면서부터 전황은 다시 역전되었고 그 희망은 무산되기 시작하였다.

웨이크 회담과 중공군의 개입

웨이크회담

중공이 유엔군의 38선 진격에 대해 경고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었다. 1950년 10월 9일 북경방송에서는 유엔군의 38선 돌파를 허용한 10월 7일의 유엔결의는 위법이며, 미군의 북한 진입은 중국의 안전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고 중공은 이를 방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심지어는 유엔군의 군사활동을 침략전쟁이라 혹평하였다. 이러한 중공의 계속된 경고에 대하여 미국은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에 대하여 불안해하기는 하였으나 중국 본토의 통일을 이룩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았고, 또한 대만 문제를 안은 중공이 한국전쟁에 개입한다는 것은 현실성이 없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10월 15일 트루만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 간에 웨이크회담이 열렸다. 웨이크회담에서 맥아더 장군은 모든 면에서 낙관적이었다. 첫째 북한군의 군사적 저항은 그 해의 11월 23일 추수감사절까지는 끝이 나리라는 견해였다. 또한,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은 전혀 없으며, 중국의 동북부지방에 있는 30만 병력 가운데 압록강 연안에 배치되어 있는 것은 10만 내지 12만 5000명이고, 이 중에서 오직 5만 내지 6만 명만이 북한을 원조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더구나 중공은 공군력을 보유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개입할 때에는 최대의 손실을 볼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끝으로, 소련의 개입 가능성에 대해서도 맥아더는 부정적이었다.

이러한 맥아더의 낙관론에 만족한 트루만은 귀로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유엔군은 조만간 전 한반도의 평화를 회복하리라고 확신한다고 언명하였다. 그러한 낙관론에 반하여 중공군이 이른바 ‘의용군’이라는 명칭 아래 일시에 3개 사단 이상을 한국전쟁에 투입한 것은 웨이크회담 바로 다음날의 일이었으며, 미국이 이 사실이 확인한 것은 그로부터 열흘 뒤의 일이었다.

중공군의 참전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에 대한 미 국무성이나 중앙정보부의 우려는 유엔군의 군사작전에 제약을 가하였다. 1950년 10월 21일에 합동참모본부는 맥아더에 대하여 북한과 중국 동북부지방에 전력을 공급하고 있는 수력발전소나 함경북도의 공업도시인 나진에 대한 폭격을 금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는 모두가 중국 국경에 가까운 지역을 폭격함으로써 중공을 자극하는 것을 삼가하기 위한 전술적 배려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중공군의 개입을 막지 못한 것은 명백해졌다. 북한의 서북부지방에 진격중이던 한국군 제6사단이 압록강의 국경지역인 초산에 도착하였고, 동해안을 따라 진격한 한국군 수도사단은 청진까지 수복하고 나서 장진호와 부전호에 진격하였다. 10월 24일에 드디어 한국군 제6사단이 청천강 상류에 있는 운산에서 중공군으로 보이는 적군에 의하여 포위되었고, 이를 구원하기 위한 미 제1기병사단도 그 달 26일에 포위당해 고전하였다. 중공군의 참전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유엔군은 보급에 곤란을 겪었고, 미군은 청천강 남쪽까지의 후퇴를 명하였다.

그러나 한국군은 북진을 계속하여 11월 21일에는 압록강 연안인 혜산에 이르렀다. 유엔군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은 중공군의 개입을 우려하면서도 대담한 북진정책을 취하긴 하였으나 가능한 지역의 안전을 우선하도록 유념하였다. 그러나 압도적으로 우세한 공군력으로써 중공군을 견제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평양과 흥남을 연결하는 반도의 좁은 부분을 방어한다는 계획도 구상하기는 하였으나 압록강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데 우선하였다.

11월 4일에 맥아더 원수는 미합동참모본부에 대하여 중공군의 전면적 개입 가능성은 있으나 아직 충분한 증거는 없다고 하면서도 그 다음날인 5일에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 올린 특별보고에서 유엔군이 중공군과 교전하고 있다고 하였다. 뒤이어 6일에는 중공이 국제적인 불법행위를 저지르고 있다고 비난하는 특별성명을 발표하고, 미 공군사령관인 스트라이트마이어(StrateMeyer, G. E.) 장군에게 압록강에 가설되어 있는 다리를 B-29 90대로 폭파할 준비를 하도록 명하였다.

이러한 맥아더의 움직임에 대하여 미국 정부는 유엔 긴급 안전보장이사회를 미국이 요청하여 소집되어 있고, 또한 중국의 동북부지방에 대한 공격은 사전에 연합국과의 협의사항이라는 이유를 들어 공격 중지를 명하였다. 이러한 워싱턴의 명령에 대한 맥아더의 반발은 격렬하였다. 이에 따라 국경지대에 대한 공군활동의 금지가 오히려 해제되었고, 신의주에 있는 압록강 다리의 남쪽 부분 폭격이 허가되었다. 나아가 맥아더는 중국영토 내까지 계속 추적하게 해주기를 요구하였으나 유엔 내의 동맹국들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거부당했다.

중공의 참전은 11월 4일 ‘각 민족당파’의 모임에서 공식 발표되었고, 그 표어가 바로 '항미원조보가위국'이었다. 참전하는 중공군인들에게는 두 개의 주제에 선서하도록 시켰다. 즉, 첫째로는 ‘미제국주의의 죄악’에 대한 학습이었고, 또 하나는 중국 혁명에 ‘조선인’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여 6개 항목에 달하는 “조선 정부를 존중하고, 조선 인민을 애호한다.”는 원조(援朝)가 특히 강조되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일시 주춤하였던 연합군은 11월 24일에는 다시 압록강을 향해 본격적으로 진격을 재개하였다. 이 날 맥아더는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특별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합동참모본부는 압록강 연안의 진격은 한국군에게만 맡기고 나머지 유엔군은 국경까지는 이르지 말고 북동부지역은 청진에서 진격을 멈추도록 제안하였으나 맥아더는 이에 불복하였다.

유엔군의 진격이 다시 시작된 직후인 11월 25일과 26일에 중국군이 18개 사단에 이르는 막대한 병력으로 서부전선을 공격해 옴으로써 방어선은 붕괴되었다. 맥아더는 현지 사령관들과 작전회의 끝에 11월 28일에는 ‘완전히 새로운 전쟁’에 직면해 있다는 특별성명을 유엔에 보냈다. 즉, 20만 명이 넘는 중공군이 유엔군을 향해 배치된 사실이 명백해졌다는 것이다. 이는 그간 맥아더가 중공의 의도를 잘못 판단하고 있었다는 것을 처음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유엔군의 총공격은 오직 4일 만에 그쳤으며, 이른바 ‘12월 후퇴’가 이루어졌다.

미국의 ‘국가안전보장회의’는 맥아더에게 만주폭격권을 허가할 것인지 여부를 검토하였으나 이는 소련의 개입을 불러 일으켜 전쟁이 더 커질 위험 앞에서 유럽의 미 군사력에 위협이 되리라는 판단 아래 부정되었다. 또한, 맥아더가 제시한 대만의 국부군 5∼6만의 병력을 사용하기 위한 교섭권을 요청하였으나 이도 각하되었다. 중공군의 진격 앞에 유엔군은 후퇴를 거듭하고, 12월에는 평양이 다시 공산군의 수중에 들어 갔다.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은 원산 · 흥남선에서, 서부전선의 미 제8군의 후퇴는 30도선 근처에서 머물렀다. 이제 압록강 진격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안전하게 후퇴하느냐가 문제였고, 맥아더에 대한 비난은 높아졌다. 여러 가지 이유 가운데에서도 특히 합동참모본부의 권고를 무시하고 맥아더가 서부와 동부 전선에 두 개의 독립, 분리된 야전사령부를 운영하게 한 점이었다. 혹한과 고전 속에서 해공로를 통하여 흥남철수는 바다를 통해 12월 24일에 작전을 완료하였다.

중공군의 남진과 전황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역전이 되고 장기화할 조짐이 나타났다. 중공군의 원조에 힘입은 북한군은 12월 26일에는 다시 38선을 넘어 남진하였다. 맥아더는 미국에 지상 증원군을 요청하고 새로운 정치적 결정과 전략계획을 제시하였다. 패전의 와중에서 맥아더는 중공이 동조한다면 38선에 따라 휴전하는 것도 지지한다고 하면서도 중공에 대한 전면적 대응을 주장하였다. 즉, 미국의 해 · 공군으로 중국 해안을 봉쇄하고 만주 폭격, 그리고 대만에 있는 국부군을 한국전에 투입하는 한편, 중국의 남부지방에 상륙시켜 제2의 전선을 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면 전쟁의 위험을 경계하던 트루만 대통령은 이를 받아 들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한반도의 유엔군 철수안에 더욱 관심이 있었다.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을 놓고 대응책을 논하면서 11월 3일에는 필요하다면 한반도에서 원자폭탄 사용도 고려중이라는 강경한 태도를 표명했으며, 이에 대해 영국은 깊은 우려를 표명하였다. 드디어 12월 8일에 발표된 트루만 · 애틀리(Atlee,C.R.)의 성명은, 한반도에서 유엔의 목적을 평화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그 단계에서 미국의 한국에 대한 정책이 근본적으로 약화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2월 12일에 인도가 아시아 · 아프리카 13개국의 지지를 받아 유엔총회에 한국 휴전의 기초 조건을 조사하기 위한 3인위원회를 구성하자는 결의안을 제출하였을 때 미국이 이를 지지하고 나선 데에서 뚜렷이 그 의도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3인위원회는 당시 총회의장이었던 이란 대표 엔테삼(Entezam, N.) · 캐나다 대표인 피어슨(Pearson, L. B.), 그리고 인도 대표인 라우(Rau, B. N)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중공과 접촉하기 시작하였다. 정전을 위한 유엔3인위원회의 중공 정부 접촉이 실패하였고, 이 사실이 총회의 정치위원회에 보고되었다. 중공이 한국전의 정전에 거부하는 태도를 취하였던 것은 당시의 전황이 그들에게 유리하였기 때문이며, 그들은 계속 유엔군을 추격하여 남진하였다.

공산군은 1951년 1월 4일에는 다시 수도 서울을 점령하기에 이르렀고, 한국 정부와 많은 민간인은 다시 남하 피난길에 올랐으며, 이것이 이른바 1 · 4후퇴이다. 1950년 12월 16일에 트루만이 국가 긴급사태를 선언하였으나 전황에는 별로 영향을 주지 못하였고, 질서 있는 철퇴작전이 주안이었다. 맥아더는 계속 중공의 공업지대 폭격을 포함한 4개 항목에 달하는 전면 대응을 주장하였으나 본국 정부와의 긴장감만 높아졌을 뿐 그의 의견은 수락되지 않았다. 중공군의 개입 이래 공산군의 남진은 계속되었고 그들의 보급로도 늘었으나 유엔군의 공중 공격으로 저지되었다. 1951년 1월 25일부터 유엔군은 반격을 재개하며 전진을 계속하였다. 2월 10일에는 인천과 김포를 탈환하였고, 3월 14일에는 서울을 재탈환하였으며, 3월 24일에는 38선을 다시 돌파하였다.

맥아더의 해임

중공군의 개입 문제를 놓고 판단에 오류를 범하였던 맥아더는 계속 중국 동북부인 만주지방을 성역으로 놓아 두는 것에 반대하고 폭격을 주장함으로써 휴전을 모색하는 미국 정부의 입장을 어렵게 하였다. 한국전쟁의 휴전을 위한 1950년 12월 14일의 총회결의에 따른 3인위원회의 노력도 수포로 돌아가고, 1951년 1월 13일의 정치위원회가 정한 한국 휴전 5원칙도 중공에 의하여 거부당하자, 유엔총회는 2월 1일에 미국의 제의로 중공을 ‘침략자’로 규정하는 결의안을 찬성 44, 반대 7, 기권 9라는 압도적인 다수로 채택하였다. 다시 5월 18일에는 중공 및 북한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에 대한 군수물자나 무기의 금수를 의결하였다.

유엔군의 작전이 주효하면서 다시 38선을 돌파하고 제공권을 장악하여 유엔군이 유리한 조건으로 교섭할 수 있으리라고 전망하면서도, 트루만 행정부는 전세를 관망하는 우유부단함을 보였다. 한편, 미국 의회에서는 1950년 11월 이래 외교정책에 관하여 여러 개월에 걸쳐 토의를 진행하고 있었으며, 맥아더의 주장은 공화당 하원 원내총무인 마틴(Martin, J. W.)의 지지를 받는 상태여서 이는 미 행정부와 의회 간의 긴장관계로 나타났다.

미합동참모본부는 1951년 2월 21일에는 나진에 대한 폭격금지를 명하고, 3월 1일에는 다시 압록강 연안의 중국의 발전시설에 대한 폭격도 금함으로써 현지 사령관인 맥아더에게 제한전쟁을 강요하였다. 트루만도 이 38선에서 휴전할 생각을 굳혔으며, 38선을 약간 넘은 선에서 유리한 교섭을 시작하려 하였다. 이 점에서 맥아더의 승리만을 추구하는 군사전략은 협상을 추구하는 트루만의 외교전략과 갈등을 빚게 되었다.

전세가 유리하게 전개되는 상황에서 미 국무성은 국방성 및 합동참모본부와 협의하여 한반도 전쟁을 휴전하자는 내용을 담은 대통령 외교성명의 초안을 작성하여 3월 19일에 파병국들에게 동의를 구하는 한편, 그 다음날에는 맥아더에게도 그 취지를 전달하였다. 이에 대한 맥아더의 반응은 바로 3월 24일의 공산측에 대한 위협적인 성명에서 명백하여졌다. 즉, 유엔이 제한전쟁 목적을 버리고 중공 연안지역이나 내륙에까지 확대시킬 경우, 중공은 군사적 붕괴의 위험에 빠질 것이고, 유엔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모든 군사수단을 찾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분명히 본국 정부와 사전협의도 거치지 않았을 뿐더러 본국 정부에 대한 최후 통고와 같은 것으로서 워싱턴을 당혹케 했고 파병한 동맹국의 반향도 컸다. 미 국무성은 즉각 맥아더의 월권적 발언을 힐난하는 성명을 발하였고, 합동참모본부는 맥아더에 대하여 1950년 12월 6일에 지시한대로 군사 · 외교정책에 관한 발표는 반드시 사전에 국무성이나 국방성의 승인을 얻도록 명령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국전의 휴전을 제안하는 외교성명은 발표 시기를 놓쳐버렸고, 4월 5일에 마틴 의원은 맥아더가 그에게 보낸 서한을 하원에서 낭독해버림으로써 트루만 정부와 맥아더의 대립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결정적 파국에 들어갔다.

드디어 4월 11일 트루만은 이례적인 심야 기자회견을 통하여 맥아더의 해임을 발표하였고 그 후임에 릿지웨이(Ridgway, M. B.) 제8군사령관을 임명하였다. 웨이크회담 이후 지속되었던 군 통수권자인 트루만 대통령과 현지 사령관이며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영웅이었던 맥아더 장군의 갈등은 군에 대한 민간인 통제라는 강한 미국의 정치질서의 전통 속에서 맥아더 해임으로 다시 한번 확인된 것이다. 1951년 4월에 들어서면서부터 공산군의 춘계 공세는 70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동원한 공격이었고, 이에 대한 역공세가 되풀이되면서 전쟁은 더욱 격렬해졌다. 그러나 미국 정부가 제한전쟁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전반적 전황은 교착상태에 빠져 들었다.

휴전의 성립

판문점 회담

간헐적으로 논의되던 휴전문제는 쌍방의 필요에 따라 다시 구체화되었다. 이번에는 소련 유엔대표인 말리크(Malik, J.)가 6월 23일 총회연설에서 제기하였다. 유엔군 내의 동맹국들 사이에서는 제한전쟁으로 휴전 기운이 일고 있었던 한편, 공산측은 유엔군의 제공권 때문에 막심한 피해를 입어 승산이 없음을 인식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부담을 감내하기가 어려운 지경이었다. 이러한 쌍방의 분위기 속에서 말리크는 교전제국이 휴전을 위한 토의를 시작하자고 제의하였다. 1주일 후에 릿지웨이 유엔군사령관은 북한의 김일성과 중공군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에게 휴전회담을 제안하고 이를 공산측이 수락함으로써 7월 10일부터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열렸다.

회담은 처음에는 비교적 원활히 진행되어 7월 26일에는 의제에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이후 일차적인 어려움은 양군의 경계선의 책정문제였다. 이미 38도선을 넘어서 진출하고 있던 미국은 양군의 접촉선에 따라서 결정하자고 주장한 반면에, 공산측은 38도선의 원상회복을 고집함으로써 회담은 교착상태에 빠지고, 8월 22일에 공산측이 회담의 중단성명을 냄으로써 회담은 정지되었다. 회담이 중단되자 전투는 다시 격렬해지고 ‘단장의 능선’ 탈환 등 제한전쟁중에도 전과는 컸다. 약 2개월간의 회담정지 후 유엔군사령관 릿지웨이의 제안에 따라 10월 25일부터 휴전회담이 판문점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공산측은 접촉선을 군사경계선으로 하자는 유엔군측의 주장에 양보하고, 11월 27일에는 중립국 감시위원회 설치에도 동의하였다. 그러나 또 다른 어려움이 나타났는데 그것이 바로 포로 송환문제였다. 즉, 포로의 강제송환이냐 자유송환이냐에 대한 의견대립이었다.

유엔군측은 많은 북한군 포로가 전쟁중 강제징집된 뒤에 투항하였고, 또한 많은 한국군 포로가 공산군에 강제 편입된 사실과 중공군 포로 가운데 중공에 송환되기를 거부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들을 이유로 포로의 송환은 개개인의 의사에 따라 한국과 북한, 그리고 중공과 대만 등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송환을 주장하였다. 이에 반하여 공산측은 모든 포로는 당연히 원래 소속국으로 송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의견대립 때문에 포로교환문제소위원회는 1952년 2월 27일부터 2개월 가까이 중단되었다. 이 기간 동안 북한에는 유행병이 만연하였고, 북한은 이를 유엔측의 세균전이라고 비난하면서도 사실 조사를 위한 국제적십자 조사위원회의 입북을 거절하였다.

4월 9일에 포로교환문제위원회는 비밀 회의로 재개되었고, 여기에서 공산측은 포로 전원을 귀환 후에 처벌하지 않겠으며, 각각 면접을 통해 자유의사를 확인한다는 데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유엔측이 귀국 희망자가 약 8만 3000명(북한에 7만 6600, 중공에 6,400)이라고 통고하자, 공산측이 다시 강제송환을 주장하면서 소위원회는 결렬되었다. 4월 28일과 5월 2일에 쌍방에서 다른 문제와 일괄타결을 놓고 의견을 교환했으나, 포로문제 때문에 회담은 결렬된 채 한국의 휴전문제는 이제 국제사회의 정치선전으로 발전되었다.

지도자 교체와 회담재개

포로교환문제로 교착상태에 빠졌던 휴전회담을 더욱 어렵게 만든 것은, 1952년 5월 7일의 거제도 포로 소요사건과 수용소 사령관인 돗드(Dodd,F.T.) 장군 감금사건이었다. 그곳의 공산군 포로들은 비밀통제조직을 결성하여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를 위협하고 테러를 가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유엔군사령관 릿지웨이 장군은 미국 대통령에 입후보하기 위하여 사임하는 아이젠하워(Eisenhower, D. D.) 장군의 후임으로 나토사령관으로 전보되고, 클라크(Clark, M. W.) 장군이 유엔군사령관에 임명되었다. 클라크 장군이 부임하자 회담 재개전략의 일환으로 새로운 공격이 시작되었고, 6월 22일에는 거의 성역으로 되어 있던 수풍댐까지도 폭격하는 강경책을 택하였다. 또한, 유엔 공군기와 새로이 등장한 공산측의 미그 15기의 공중전이 빈번해졌고 전투는 다시 격화되었다.

한반도에서 일진일퇴의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1952년 11월 미국의 대통령선거가 있었으며, 그 결과로 공화당의 아이젠하워가 당선되었는데, 그는 당선되면 전쟁을 끝내기 위하여 한국을 방문하겠다고 공약한 바 있었다. 한국전쟁의 정치적 성격을 이해하지 못한 미국인에게는 전쟁이 장기화함에 따른 불만과 권태로 정전을 약속한 공화당 후보에게 20년 만에 처음으로 정권을 맡긴 것이다. 약속대로 아이젠하워는 당선 직후 한국전선을 방문하고 귀국 기자회견에서 전쟁을 확대시키지 않을 것을 명백히 함으로써 공산측에 군사적인 압력을 가하여 휴전회담에 응하게 하려는 클라크를 실망시켰다. 그러나 2차대전의 영웅인 아이젠하워와 강경 정책의 대표인 덜레스(Dulles, J. K.)의 국무장관 취임은 공산측에게 심리적인 압력으로 작용했다.

휴전회담이 교착된 상태에서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두 가지의 중대한 사건이 있었다. 첫째로는 1952년 12월 3일 제7차 유엔총회에서는 인도가 제안한 포로송환에 관한 결의안을 압도적 다수결로 통과시켰다. 즉, 체코 · 폴란드 · 스웨덴 · 스위스 등 4개국으로 송환위원회를 구성하여 포로를 120일간 그 위원회에서 설득하여 가고 싶은 곳으로 송환되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포로의 자유송환이라는 이유로 소련과 중공이 반대하였다. 또 하나의 큰 변화는 1953년 3월 5일에 소련의 스탈린이 사망하였고, 이로 인하여 전기를 맞은 것이다.

3월 28일에 공산측은 휴전회담의 재개를 제의하였고, 소련의 새 지도자들과 협의를 마친 중국의 주언라이 수상은 송환을 희망하지 않는 포로를 중립국에 맡겨 그들의 귀국문제를 정당하게 해결하자는 새로운 제의를 하였다. 4월 11일에 이르러 상병포로교환협정이 성립되어 20일부터 교환이 시작되었다. 또한, 4월 26일에는 휴전회담이 재개되어 중립국 감시위원단 구성에 대하여 양쪽은 인도안에 동의하여, 즉시송환을 원하지 않는 포로를 관리하는 중립국으로 인도를 지정하는 데까지 합의하였다.

반공포로의 석방

1953년 3월 이래 휴전회담이 급속히 진전되는 과정에서 한국 정부의 저항이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많은 인명과 재산의 손실을 가져 온 북한의 침략전쟁을 분단상태로 마감하려는 데서 한국의 통일정책이 좌절을 겪게 된 것이다. 더구나, 공산군의 점령치하에서 강제로 의용군에 징집되었다가 포로가 되거나 또 국군 포로로 공산군에 강제 편입되었다가 다시 포로가 된 반공 포로를 공산측에 양도한다는 것은 이승만 대통령으로서는 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이승만은 휴전은 일종의 자살행위이며 필요하다면 한국군만으로 전쟁을 수행하겠다고 공언하였다.

클라크 장군과 브릭스(Briggs, E. O.) 주한 미국대사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휴전회담이 재개되기 이틀 전인 4월 24일에 아이젠하워에게 중공군이 북한에 주둔한 상태에서 휴전이 성립된다면 한국을 유엔군사령관의 지휘권에서 빼내겠다고 통고하였다. 한국민들도 통일정책을 지지하여 휴전을 반대하는 시위가 계속되었고, 5월 12일에는 포로 관리를 위한 인도 군인의 입국마저도 거부하고 나섰다.

이에 미국은 협상의 주역인 클라크로 하여금 공산측을 설득할 것과 그것이 안될 때 확전 여부를 결정하도록 하였다. 또한 인도정부를 통해 중공을 설득하도록 하였는데, 가장 어려운 점은 한국 정부를 휴전에 동의하게 하는 작업이었다. 그 조건으로는 한국에 대한 경제 · 군사 원조에 관한 아이젠하워의 친서를 이승만에게 보내 휴전에 동의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이승만의 태도는 완강하여 한국 대표로 하여금 휴전협상을 거부할 것을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5월 30일에 이승만은 아이젠하워에게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 모든 외국군의 동시철수를 제안하였다. 6월 4일에 공산측은 유엔측의 최종안에 원칙적 동의를 보내 왔고, 6일에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에게 휴전성립 후에 한미방위조약을 교섭할 용의가 있으며 한국에 대한 군사 및 경제 원조를 계속할 것을 약속하였다. 드디어 6월 8일에는 한국 대표가 불참한 가운데 양측은 포로송환 협정에 서명하였다.

그러나 ‘반공 포로’의 송환을 놓고 한국 정부의 태도가 가장 중요한 변수로 등장하였다. 한국 정부를 무마하기 위하여 이승만의 미국방문을 청하였으나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한 채 6월 18일 새벽에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 사전예고도 없이 한국포로 감시원에게 명하여 2만 7000명에 달하는 반공포로를 석방시켜 버렸다. 이승만은 이것이 자기의 명령임을 명백히 하고 군경에 대하여 석방된 반공포로를 보호하도록 명하였다. 이러한 돌발사태 속에서 공산측은 미국을 이승만의 공범자라고 맹렬히 비난하였다. 한편, 미국은 이 사건과 관련이 없음을 해명하기에 바빴고 단지 휴전교섭을 파기시키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새로운 한미관계와 제네바협정

미국은 이승만을 설득하기 위해서 더욱 구체적인 교섭을 벌이지 않을 수 없게 되자, 1953년 6월 25일 국무차관보 로버트슨(Robertson, W. S.)을 대통령특사로 파견하였다. 16일 간이나 서울에 머물면서 이승만의 동의를 얻기 위해 교섭을 했으나 이승만의 저항은 완강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전투는 계속 진행되었고, 특히 한국군의 방어선에 대한 집중 공격이 행하여졌다. 경계선을 확정하려는 마당에 오히려 상황이 불리하게 진전되었으므로 7월 11일 마침내 이승만은 휴전에 동의하였다. 이때 미국이 제시한 조건은 크게 네 가지이다.

①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위한 교섭을 시작한다.

② 장기간 대한 경제원조를 제공한다.

③ 휴전협정 성립 후에 개최될 한국의 정치적 통일에 대하여 90일 간 아무런 구체적인 성과가 없을 때 미국은 그 회의에서 탈퇴한다.

④ 한국군의 증강을 위한 미국의 원조 약속 등이다.

이로써 1953년 7월 27일에 비로소 휴전협정이 이루어짐으로써 3년 1개월에 걸친 전쟁은 중지되고 휴전이 성립되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휴전협정이 서명되던 바로 그 날 미국 의회에 대하여 대한 경제원조의 확대계획을 제출하여 승인을 받고, 그 날 유엔군으로 파병된 16개국은 장래에도 한국에 대한 침략에 대하여는 공동으로 대처하겠다는 공동선언을 하였다. 또한 휴전성립 10일 후인 8월 7일에는 덜레스가 서울에 와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가조인하기에 이르렀다. 가조인 서명 때의 공동선언에서 고위 정치회담에서는 한국의 평화적 통일을 추구할 것과 90일 이후에도 성과가 없을 때 양국은 동시에 회담에서 탈퇴할 것에 합의하였다.

8월 28일의 유엔총회는 한반도문제를 둘러싼 정치회담의 개최를 촉구하는 결의를 채택함으로써 10월 26일부터 다시 판문점에서 정치회담을 위한 예비회담이 개최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어려움은 소련의 참가여부를 둘러싼 문제였고, 공산측은 인도처럼 중립국의 자격으로 참가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12월 13일에 유엔대표인 딘(Dean, A.)이 회담의 결렬을 선언함으로써 무기휴회로 들어가 버렸다. 그 동안 유엔측은 1954년 1월 23일에 설득기간이 지난 송환거부 포로 2만 3000명을 석방하였다.

그 뒤 4월 26일부터 4대 강국과 중공, 남북한 그리고 유엔 파병국들을 포함한 외상회의가 제네바에서 열렸다. 7월 21일까지 약 3개월에 걸친 제네바회의는 인도지나를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하는 남북 월남을 분할하여 휴전을 성립시켰을 뿐, 한국의 통일문제는 예상했던 대로 어떠한 실마리도 풀지 못하였다. 한반도문제는 6월 15일에 유엔 파병 16개국이 토의 종결 선언을 남긴 채 끝남으로써 분단상태가 지속되고 휴전협정만이 유일한 공식문서로 남게 되었다.

전쟁의 영향

한국전쟁의 국제정치적 영향

6 · 25전쟁은 국제정치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또한 강대국들의 국내외 정책과 한민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① 국제정치적 영향:첫째는 미국이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이름과 실제 두 면에서 세계 최강대국의 지위를 굳혔다는 사실이다. 흔히,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미국이 그 지위를 얻은 것으로 말하고 있으나, 미국의 군사력은 한국전쟁 기간에 두드러지게 증강되었고, 또 한국전쟁이 휴전된 뒤에도 그 추세가 계속되었음을 많은 국제정치학자들이 지적한다. 그리하여 한국전쟁을 계기로 국제정치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은 그 이전에 비하여 훨씬 커졌다.

두 번째는 미국과 소련 사이의 냉전을 더욱 굳혔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특히 국무장관 덜레스의 강력한 반공정책을 추구해 나갔고, 소련 역시 이에 강경히 대응하여 동서의 냉전이 사실상 구조화되었다.

세 번째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국제적 지위가 강화된 점이다. 중공은 한국전쟁의 참전으로 유엔에 의해 ‘침략자’로 규정되었고, 유엔에서 중국 대표권은커녕 회원국 자격도 얻지 못하였으나, 적어도 아시아문제에 대해서는 중공의 발언권을 인정하여야 한다는 인식이 국제적으로 퍼졌던 것이다.

② 강대국들의 국내정치와 대외정책에 미친 영향:첫째, 미국을 살피건대, 6 · 25전쟁은 미국의 국내 분위기를 우경화시켰고, ‘반공히스테리’를 자라나게 하였다. 그 상징이 ‘매카시 선풍’이다. 극우 상원의원 매카시(McCarthy, J.)가 선봉이 되어 ‘용공분자 색출’운동을 크게 벌여, 많은 진보주의 인사들이 정부와 학계를 비롯한 여러 지도적 자리에서 쫓겨났다. 대외적으로는 강경한 반공정책을 취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미국은 세계의 많은 보수정권과 상호방위조약을 맺었고, 여러 지역에서 반공적 집단안보기구를 만들어냈다.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와 같은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미국의 베트남 개입이 깊어진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미국은 북베트남(월맹)이 소련과 중국의 부추김을 받아 ‘아시아 적화음모’의 한 고리로 남베트남을 ‘침공’하고 있다는 인식 아래, 군사 개입을 확대하여 나간 것이다.

둘째, 소련을 살피건대, 6 · 25전쟁이 소련 국내정치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소련 역시 군사력을 키워 나갔고 자신의 동맹관계를 강화해 나갔는데, 이것은 당시 소련 국민들 사이에 일어난 소비생활 개선에 대한 욕망을 억제하는 결과를 낳았다. 소련은 중공업정책을 추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셋째, 중공의 경우, 중공군의 참전은 모택동(毛澤東)체제를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공산당에 반대하는 세력은 물론이거니와 중국공산당 안에서 모택동의 지도력에 대항하던 세력도 억압당하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넷째, 일본을 살펴보자. 6 · 25전쟁은 패전국인 일본의 경제부흥과 보수체제의 안정에 이바지하였다. 이 때의 일본은 물론 강대국이 아니다. 그러나 일본이 강대국으로 자랄 수 있는 계기를 6 · 25전쟁이 마련해 준 것이다.

한민족에 미친 영향

6 · 25전쟁은 한민족 전체에게 말할 수 없이 큰 재해를 안겨 주었다. 인적 · 물적 · 정신적 모든 면에서 그 재해는 엄청나게 컸다. 먼저 인적 손실을 살펴보기로 한다. 여기서 지적해야 할 점은 정확한 통계수치의 부족이다. 기관 또는 연구자마다 수치가 다르다. 예컨대, 대한민국 국군의 손실(사망 · 부상 · 실종)을 유엔군쪽에서는 25만 7000여 명으로, 공산군쪽에서는 58만 6000여 명으로 발표하였다. 이에 비하여, 일본의 『통일조선신문』은 98만 8403명으로 추정하였다.

이 점을 전제로 대한민국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정부에 가까운 연구자들의 자료인 『북한30년사』에 따르면, 대한민국 국군은 전사 14만 7000여 명, 부상 70만 9000여 명, 그리고 실종 13만 1000여 명을 내 전체 손실이 98만 7000여 명에 이르렀다(이 숫자는 『통일조선신문』의 98만 8000여 명에 가깝다). 다시 『북한30년사』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민간인 피해는, 피학살자 12만 8936명, 사망자 24만 4663명, 부상자 22만 9625명, 피랍자 8만 4532명, 행방불명 33만 312명, 의용군 강제징집자 40만여 명, 경찰관 손실 1만 6816명 등 140여만 명이다(이 숫자는 「통일조선신문」의 99만여 명보다 40여만 명이 많다. 「통일조선신문」의 합계에는 의용군 강제징집자와 경찰관 손실이 빠져 있다). 이로써 『북한30년사』의 자료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인적 손실은 모두 230만여 명에 이른다(「통일조선신문」의 자료에 따르면, 약 198만 명이다).

이어 북한을 살펴보기로 한다. 『북한30년사』에는 북한군은 52만여 명이 사망하고 40만 6000여 명이 부상했으며, 민간인 손실은 200만여 명에 이른다고 되어 있다. 이것을 합치면 북한의 인적 손실은 292만여 명인 것으로 추정된다(「통일조선신문」은 북한군의 인적 손실을 61만 1206명, 민간인의 인적 손실을 268만 명으로 보도하였다. 이것을 합치면, 북한의 인적 손실은 약 329만 명으로 나타난다).

한편, 유엔군은 약 15만 명의 인명 손실을 내었다. 『북한30년사』는 전사 3만 5000여 명, 부상 11만 5000여 명, 실종 1,500여 명으로 파악하였고, 「통일조선신문」은 전사 3만 6813명, 부상 11만 4816명, 실종 6,198명, 합계 15만 7827명으로 보도하였다. 중공군의 인적 손실에 대하여, 『북한30년사』는 약 90만 명으로 보았다. 「통일조선신문」은 전사 18만 4128명, 부상 71만 5872명, 실종 2만 1836명, 합계 92만 1836명으로 보도하였다.

이 자료들을 종합할 때, 남북한을 합친 한국민의 인명 손실은 무려 520만 명선이다. 참으로 엄청난 인적 손실이 아닐 수 없는데, 특히 비전투요원의 인적 손실이 전사상(戰史上) 유례없을 만큼 컸다는 점에 6 · 25전쟁의 비참성이 있다. 이 점은 한국전 당시 유엔군 초대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의 증언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1951년의 의회 청문회에서 그는 “평생을 전쟁 속에서 보낸 본관과 같은 군인에게조차 이러한 비참함은 처음이어서 무수한 시체를 보았을 때 구토하고 말았다.”고 고백한 것이다. 인적 손실과 함께 지적해야 할 점은 방대한 규모의 이산가족의 발생이다. 이산가족의 수를 정확히 밝히기는 어렵다. 일반적으로 1000만 명 규모인 것으로 말한다.

인적 손실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물적 손실이다. 이에 관해서도 정확한 통계가 있는 것은 아니나, 한반도 전체를 통하여 학교 · 교회 · 사찰 · 병원 및 민가를 비롯, 공장 · 도로 · 교량 등이 무수히 파괴되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남북한 모두의 사회 및 경제 기반이 철저하게 파괴된 것이다. 우선 북쪽을 보면, 1949년 수준에 대비할 때, 광업생산력의 80%와 공업생산력의 60% 및 농업생산력의 78%가 감소했다. 금속제품 · 전기제품 · 건설재 · 어업 부문에서는 생산이 60∼90%로 떨어졌다. 선철 · 구리 · 알루미늄 · 알칼리 화학비료 부문에서는 생산의 감소가 그것보다 훨씬 더 심하였다. 90만 6500에이커의 농지가 손상되었으며, 60만 채의 민가와 5,000개의 학교 및 1,000개의 병원이 파괴되었다.

남쪽을 보면, 휴전 직후 집을 잃고 거리에서 방황하는 전재민의 수가 200만여 명에 이르렀고, 굶주림에 직면한 인구가 전체인구의 20∼25%나 되었다. 1949년 1년의 국민총생산에 맞먹는 재산상의 피해가 발생하였으며, 농업생산은 27%가 감소했고, 국민총생산은 14%가 감소되었다. 약 900개의 공장이 파괴되었고, 제재소와 제지공장 및 금속공장을 비롯한 작은 생산소들은 거의 전부가 파괴되었다. 약 60만 채의 가옥이 파괴되었고, 특히 교통 및 체신 시설이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이러한 인적 및 물적 손해도 손해려니와, 이에 못지않게 심각한 손해는 민족 내부의 불신과 적대감이다. 서로 상대방을 증오하고 복수심을 갖게 되었으며, 따라서 평화적인 통일의 분위기를 가로막고 있다. 남과 북 모두에서 흑백논리의 사고방식이 크게 자라나 의식세계가 경직되었으며, 상대방과의 타협과 대화 자체를 죄악시하는 분위기가 자리잡았다. 그리하여 남과 북 모두에서 중도적인 이념을 추구하는 세력이 성장할 수 없었고, 어느 한쪽으로 편향된 이념과 세력만이 집권하게 되었다.

북한에 미친 영향

6 · 25전쟁의 피해는 북한에서 더 컸다. 유엔군의 화력이 훨씬 더 강하였고, 특히 중공군의 참전 이후, 그리고 휴전협상의 막바지에서 공중에서 집중적으로 파괴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피해 차원뿐만 아니라, 6 · 25전쟁은 북한사회 전반에 대하여 엄청나게 큰 영향을 미쳤다.

① 대내 정치의 영향:6 · 25전쟁은 국내 정치적으로 김일성체제를 강화했다. 이 과정을 간단히 설명하기로 한다. 6 · 25전쟁 직전 북한 권력구조 안에는 4개의 정치적 파벌이 공존하였다. 국내파 · 연안파(친중공파) · 소련파(소련에 이주하였던 한인 2세) · 갑산파(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세력) 등이 그것이다. 1950년 12월 김일성은 우선 연안파의 군사 지도자인 무정(武亭)을 숙청하였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연안파가 고무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던 김일성은 평양실함의 책임을 씌워 무정을 숙청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규모의 숙청은 휴전 직후에 이루어졌다. 3년 동안 계속된 6 · 25전쟁이 중단되고 휴전이 성립된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속죄양’으로 김일성은 국내파 곧, 남로당계열을 지목한 것이다. 여기에서 남로당계열은 1946∼1948년에 월북한 남로당 간부와 당원을 말한다. 휴전 직후인 1953년 8월 3일 북한당국은 박헌영(朴憲永)을 비롯한 12명의 남로당원들이 ‘미제국주의 고용 간첩’으로서 ‘미제국주의와 결탁’ 아래 북한정권을 전복하려는 쿠데타를 계획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이들은 모두 중형에 처해졌다. 부수상 겸 외상이었던 박헌영은 물론, 북한노동당 비서이며 인민검열위원장인 이승엽(李承燁)과 문화선전성 부상 조일명(趙一明) 등 10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2명이 10년 이상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러한 남로당계 수뇌급 외에 수많은 월북 남로당원들이 처단되거나 숙청되었다.

남로당계열의 숙청과 함께 남로당계 이외의 고위층 인사도 박헌영의 반당행위와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적지않게 숙청되었다. 그 대표적인 보기가 소련파 허가이(許哥而)이다. 그는 소련공산당 당적을 가진 채 북한에 들어와 북한 노동당의 창당에 크게 이바지한 실력자였으며 박헌영과도 가까워 김일성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다. 이러한 그를 김일성은 박헌영과 연관시켜 탄압하자 그는 자살하고 말았다. 김일성의 반대파 숙청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56년에는 연안파와 일부 소련파가 ‘기회주의 세력’으로 단죄되었다. 연안파의 수령으로 북한의 ‘국가원수’직에 있던 김두봉(金枓奉)도 이때 숙청되었다. 그리하여 1958년 초까지 김일성의 유일독재체제가 확립되었다.

② 대내 사회적 영향: 6 · 25전쟁은 북한주민들 사이에 반미주의를 굳게 자리잡게 하였다. 김일성은 이것을 더욱 조장하였다. 그는 ‘미제국주의의 재침’ 위험성을 강조하면서 ‘미제국주의와의 투쟁’을 혁명의 제1의로 삼고, 자신을 ‘미제국주의와의 투쟁’의 선봉장으로 상징 조작하였다. 이러한 상징조작은 그의 독재체제를 정당화하는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③ 경제적 영향: 6 · 25전쟁은 북한의 경제를 철저히 파괴하였다. 그리하여 휴전과 더불어 북한이 추구한 1차 과제는 경제복구였다. 여기서 북한은 세 단계를 설정하였다. 첫째 단계가 전반적 경제복구의 준비단계였다. 6개월 내지 1년 동안에 경제를 복구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둘째 단계가 3개년 계획이었다. 이 계획에 따라 경제 각 분야에 걸쳐 전쟁 이전의 수준이 회복되었다. 셋째 단계가 5개년 계획이었다. 이 계획은 예정기간보다 빨리 성취되었는데, 이로 인해 공업화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이러한 경제 복구작업은 대체로 북한주민의 노력동원으로 추진되었다. 그것은 소련이 5개년 계획안을 지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소련과 동구 및 중공의 경제적 지원이 낮았기 때문이다. 1959년 3월부터 시작된 천리마운동은 그러한 노력동원이 더욱더 조직화된 것인데, 이러한 노력동원을 통하여 북한은 점점 ‘동원체제’로 굳어져 갔다.

④ 대외관계에 미친 영향: 6 · 25전쟁은 북한의 대외관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김일성 정권의 출발은 원래 소련이 만든 ‘위성국가’이며, 또 소련의 강력한 통제 아래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기간에 소련은 북한을 크게 지원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김일성은 소련에 대해 깊은 불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소련에 비하여 중공의 지원은 적극적이었다. 1950년 10월 북한 정권이 붕괴위기에 직면하였을 때 구출에 나선 쪽은 소련이 아니라 중공이었다. 따라서, 북한은 점차 중공과도 우의를 두텁게 하였고, 이로써 북한의 대외관계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대한민국에 미친 영향

6 · 25전쟁은 대한민국 사회 전반에 대하여서도 큰 영향을 미쳤다.

국내 정치적 영향

우선 반공적 국가질서를 강화했다. 광복 직후 남한에는 좌우익 투쟁이 격심하였다. 그러나 좌파가 패배하고 우파가 중심이 되어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준비해 나갔다. 이 시점에서 우파의 중요한 일부가 민족주의의 이념 아래 통일정부를 수립할 것을 강조하면서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을 추진하였으나 좌절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대한민국이 수립되었으나, 좌파와 중간파의 반발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점은 1950년 5월에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서도 나타나, 대한민국 수립을 추진한 세력이 퇴조하고 반면에 남북협상파를 비롯한 중도파가 두드러지게 진출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비판도 높아지고 있었다.

6 · 25전쟁은 이러한 흐름에 쐐기를 박았다. 우선 북한의 남침 그 자체가 남북협상파와 중간파에 대한 국민의 믿음을 떨어뜨렸다. 전쟁은 ‘적이냐 동지냐’의 양분법적 사고방식을 강하게 조장했으며, 따라서 중간노선이나 협상노선은 배척당했다. 민주사회주의 같은 온건한 사회주의 이념조차 공산주의와 동일시되거나 용공시되었다. 또, 지배층 가운데서는 이러한 분위기를 더욱 북돋는 인사들도 있었다. 게다가 중간노선과 협상노선을 추구한 지도자들이 대부분 월북하였거나 납북되었다. 김규식(金奎植) · 조소앙(趙素昻) · 안재홍(安在鴻) · 원세훈(元世勳) · 김약수(金若水) 같은 정치인들이 대표적인 보기이다. 그리하여 중간노선 또는 협상노선이 정치세력으로 결집되기가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반공적 정치질서를 고착화했다. 물론, 좌파 성향의 흐름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흐름은 잠재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50년대 중반 진보당의 등장, 그리고 당수 조봉암(曺奉岩)이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 200만 표 규모로 득표한 사실은 혁신세력에 대한 지지를 말해 준다. 그러나 진보당의 불법화와 조봉암의 처형은 반공적 질서가 굳어졌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정신적 영향

6 · 25전쟁은 반공주의적인 정신적 분위기를 높였다. 공산주의는 ‘살인주의’ 또는 ‘비인간주의’와 같은 것으로 매도되었고, 반공태세를 강화하지 않는 한 대한민국의 국가 기반 자체가 흔들릴 것이라는 분위기가 지배하였다. 여기서 반공은 사실상 대한민국의 대의명분인 자유민주주의를 대체해 나가기도 하였다. 반공주의라는 이름 아래 오히려 권위주의가 합리화되는 경향마저 나타났다. 이러한 분위기를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한 정치인은 이승만 대통령이었다. 그가 1953년에 단행한 반공포로 석방 같은 결정은 그의 ‘국부상(國父像)’ 수립에 크게 이바지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국제관계상의 영향

6 · 25전쟁은 대한민국의 대외관계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우선 6 · 25전쟁은 미국이 대한민국의 구원자이며 은인이라는 믿음을 국민들 사이에 심어 주었고, 미국과의 동맹관계가 국가의 안전을 보장하는 필수적인 요소라고 받아 들이게 하였다. 미국에 대한 한국인의 이러한 인식은 1982년 동아일보사가 고려대학교 통계조사연구소와 공동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부분적으로 나타난다. 한국전쟁 후 무려 1세대가 지난 이 시점에서도 응답자의 60.6%가 미국을 가장 좋아하는 나라로 지목한 것이다. 한 · 미관계에 대하여서도 58.1%가 ‘만족스럽다’고 응답하였다. 이러한 인식 위에서 휴전 이후 친미외교는 더욱 강화되었다. 대한민국은 거의 예외 없이 미국의 대외정책을 철저히 따랐다.

반공주의는 미국의 그것을 능가하는 경우마저 있었다. 예컨대, 1950년대 후반 미국이 소련과의 평화공존을 지향할 때, 이승만 대통령은 그것이 자유세계에 이롭지 않다는 이유로 비판하기도 하였다. 친미외교는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제3세계에 접근하는 것을 가로막았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은 인도와 같은 친서방 중립국가조차 용공시하였으므로, ‘반제국 반식민’을 표방하는 비동맹권과의 외교적 접근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1960년대 중반 이후 시정된다.

6 · 25전쟁은 또한 유엔에 대한 믿음을 강화시켰다. 유엔이 북한의 남침으로부터 국가를 건져 주었다는 인식은 유엔창설일을 공휴일로 삼게까지 하였고, 유엔을 상대한 외교를 중시하게 만들었다. 통일문제에 대해서도 남북대화의 방식보다는 유엔을 통한 해결방식을 채택하였는데, 이것은 1970년대 중반 이후에 중단되었다.

경제적 영향

6 · 25전쟁은 한국경제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산업생산시설이 파괴되었고, 일반 주거용 주택은 약 60만 호가 파괴되었으며, 철도는 전체시설의 약 47%가 손해를 입었다. 철도를 비롯한 도로와 교량 등의 사회간접자본의 훼손도 매우 컸다. 제조업의 경우에는, 경인공업지대와 삼척공업지대가 결정적인 손해를 입었고, 방직공업을 비롯하여 조선 · 기계 공업과 인쇄 · 출판업은 물론 피혁과 제지의 화학공업 부문도 큰 손해를 입었다. 1951년 말 현재 정부의 조사로는, 공업 부문의 전쟁피해는 건물이 44%, 공장시설이 42%의 원상 피해율을 나타내었다. 광업의 피해도 컸다. 1951년 8월 말 현재 남한의 전체 전쟁피해액의 23. 3%를 광업 부문이 차지하였다. 전력 부문을 보면, 총 발전시설의 약 80%가 손상되었다. 이들 광공업 및 전력 이외의 다른 산업 부문, 예컨대 농업이나 기타 3차산업의 피해도 컸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경제원조와 그리고 미국 주도 아래 이루어진 유엔의 경제원조를 바탕으로 전후 경제를 복구해 나갔다. 그리하여 미국의 원조는 1950년대 대한민국의 산업생산 활동뿐만 아니라 국민경제생활을 전반적으로 규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1953∼1961년 사이에 미국이 총 22억8000만 달러의 막대한 원조를 해 주었다. 그러나 그 내용이나 규모는 전적으로 미국측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그런데 1954∼1961년 사이에 총투자율이 연평균 12.0%였으나 그 가운데 국내 저축률은 연평균 3.7%에 지나지 않았고, 대부분의 투자는 미국 원조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원조의 내용은 곧 한국산업구조의 변화를 결정하였다. 좀더 상세히 설명하면, 미국의 원조는 우선 원자재로서의 소비재와 양곡이 주종을 이루었다. 전자를 다시 나누면, 대개 철도차량 도입을 중심으로 한 교통 부문과 기타 교육 및 후생 부문에 대한 도입에 치중되었다. 바꾸어 말하여 제조업에 대한 시설재의 도입은 매우 적었음을 의미한다. 종합하건대, 6 · 25전쟁에 따른 한국의 경제는 자주 성장의 가능성을 사실상 잃어버린 것이다. 특히, 수원국(受援國)의 경제적 요구나 필요와는 관계 없이 이루어진 미국의 경제원조를 바탕으로, 소비재 경공업을 뼈대로 하는 공업화가 추진됨에 따라 공업의 대외 의존적 성장과 농업의 정체현상이 자라나게 되었다.

군사적 영향

6 · 25전쟁은 대한민국 군부를 급격히 성장시켰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6 · 25전쟁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졌으며, 그 성장은 다른 사회 부문의 성장보다 월등히 커서 사회 여러 세력과 ‘불균형 성장’을 나타내었다. 이것은 국내 정치에 대한 군부의 영향력 증대를 뜻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50년대까지는 군부의 직접 정치 개입은 억제되었다. 군부의 중립적 입장은 1960년 4 · 19혁명을 성공시키는 요소로까지 평가되었다. 그러나 1961년 5월 16일 군부의 정권장악은 그 전통을 깨뜨렸다. 군부의 성장과 팽창은 거의 전적으로 미국의 지원 아래 이루어졌다. 특히, 1953년 10월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로 미국과 군사동맹이 성립됨에 따라 대한민국 군부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체계화되었다. 한편, 1950년 7월 한국전쟁중에 체결된 대전협정(大田協定)은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사실상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이양함으로써 한국군에 대한 미국의 통제를 강화하였다.

사회적 영향

6 · 25전쟁은 하나의 ‘민족대이동’을 낳았다. 6 · 25전쟁 동안에만 약 29만 명이 월북하였거나 납북되었으며, 약 45∼65만 명이 월남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인구 대이동은 북한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남한사회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인구이동은 이 시기에 도시인구의 증가에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에 급격하게 성장한 도시는 서울 · 인천 · 대전 · 광주 등이다. 그리하여 6 · 25전쟁 직전 5만 명 이상의 인구가 사는 도시의 전체인구는 남한인구의 약 17%였는데, 1955년 현재 21%로 늘어났다.

휴전의 성립과 더불어 정치상황이 비교적 안정되자 출산율이 높아져 1955년 이후 연평균 2.9%의 기록적인 인구성장률을 나타냈다. 이러한 높은 성장률과 더불어, 전쟁으로 피폐해진 농촌을 떠나는 농민들과, 역시 전쟁의 피해로 그 기능을 잃은 지방의 중소도시를 떠나는 도시 하층민들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이들은 대체로 막노동과 품팔이 및 서비스업 따위의 고용기회를 찾아 큰 행정도시와 미군부대 주둔지 및 관광지대로 몰려 들었다.

이처럼 도시집중이 이루어짐으로써 1950년대 중반과 후반의 실업률은 심각할 정도로 높았다. 1960년 현재 완전실업률은 8.2%이며, 잠재실업률은 26.0%로서 이 둘을 합치면 34.2%에 이르렀다. 이것을 다시 농가와 비농가로 나누면, 농가의 총실업률은 29.1%이며, 비농가의 경우는 42.0%이다.

6 · 25전쟁은 또한 많은 수의 전쟁고아와 전쟁미망인을 낳았다. ‘상이용사’들의 생활문제도 심각하게 제기되었다. 한편, 미군의 주둔에 따른 국제결혼이 발생하였고, ‘양공주’와 혼혈아의 문제가 뒤따랐다. 이와 더불어, ‘양키문화’로 불리는 낮은 수준의 미국문화가 유입되어 한국의 전통문화와 갈등을 빚었다. 그러나 미국문화의 유입이 부정적인 결과만을 낳은 것은 아니다. 학문과 예술에서 긍정적인 접촉이 지속된 것도 사실이다. 한국전쟁은 한국인들의 미국 유학과 연수를 자극하였으며, 그것 자체가 새로운 문제를 낳은 측면도 있으나 전반적으로 전후 한국의 학문과 기술 및 예술의 발전에 적지않게 이바지하였다고 할 수 있다.

문학적 영향

6 · 25전쟁은 한국의 문학세계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이 큰 영향을 주었다. 한국의 대표적 소설로 꼽히는 작품들이 대부분 6 · 25전쟁을 다루고 있으며, ‘6 · 25문학’이라는 말이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는 현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전쟁을 겪고 난 나라에서는 반전문학이 성장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한국 여건은 반전문학의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비록 그렇다고 하여도, 전쟁의 비인간성에 대한 고발, 인간을 누르는 경직된 체제와 이념에 대한 냉소, 약소민족의 운명을 자의로 처리하는 강대국가들에 대한 반발, 그리고 전쟁의 피해자들을 향한 깊은 동정 등이 강조되었으며 국제적 수준의 문학성을 보여 주는 것들도 있다.

⑧ 6 · 25전쟁 미체험세대의 등장: 6 · 25전쟁이 발발한 지 이미 35년 이상 지나면서 6 · 25전쟁을 체험한 세대는 점점 사라지고 6 · 25전쟁 이후의 세대가 크게 자라났다. 1986년 현재 6 · 25전쟁 이후에 출생한 국민은 전체 인구의 약 70%를 차지한다. 이 6 · 25전쟁 미체험세대는 6 · 25전쟁을 체험하였기 때문에 전쟁의 참극을 잊지 못하거나 여전히 피해의식에 젖어 있는 세대와 달리 훨씬 더 많은 자신감과 자주적 의식을 지니고 있다. 이들의 사회적 진출은 이미 우리나라 사회 전반에 적지않은 영향을 주고 있거니와 이러한 흐름은 앞으로도 더욱 확산될 것이다. 북한에서도 6 · 25전쟁 이후세대가 진출하고 있다. 남북한 모두에서 이들이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때 남북한 관계에도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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