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용수(溶叟), 호는 성서(城西). 아버지는 이휘음(李徽音)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권두문(權斗文)의 딸이다. 할아버지인 증병조참판 이개립(李介立)에게 수학하였다.
1624년(인조 2) 도산서원(陶山書院)에 들어가 학문 연마에 매진하였고, 1633년 진사과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1637년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뒤에 화의가 성립되자 벼슬의 뜻을 단념하고 고향에 돌아가 지냈다.
1648년 다시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이듬 해 사간원정언에 제수되었고, 그 뒤 성균관사예·사헌부장령·병조정랑 등을 역임하고 정선군수를 거쳐 1654년(효종 5) 영광군수, 1656년 다시 성균관직강에 임명된 뒤 안악군수·성균관전적을 역임하였다.
2년 뒤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 영암군수가 되었다. 외직에 있을 때에는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다음 해 사헌부집의로 재직하다가 1661년(현종 2)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가 후진들을 교육시키며 김응조(金應祖)·조임도(趙任道) 등과 산수를 유람하면서 세사를 잊고 지냈다.
그 뒤 1664년 함안군수에 임명되어 재직하다가 1년 후 병으로 인하여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죽었다. 저서로는 『성서문집(城西文集)』 6권 3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