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자정(子正), 호는 옥계(玉溪). 아버지는 홍산현감 이향성(李享成)이다. 젊어서 박지화(朴枝華)에게 배웠고, 또한 이이(李珥)를 스승으로 섬겼다.
글솜씨로 이름이 있었는데 1590년(선조 23) 소과(小科)에 합격하였고, 1594년 이몽학(李夢鶴)의 난 때에는 의병을 일으켜 홍주목사 홍가신(洪可臣)을 도와 난을 진압하는 데 힘쓴 탓에 뒤에 청난공신(淸難功臣)에 녹훈되기도 하였다.
의금부도사·감찰 등을 역임하였고, 1619년(광해군 11) 당진현감 재직시 공홍도순검사(公洪道巡檢使) 권반(權盼)에 의하여 탐오수령으로 탄핵받으면서 관력을 마치게 되었다. 이정민이 거처하던 세심대(洗心臺)는 경치 좋기로 도성내에서도 제일이었다 하는데, 광해군이 빼앗고 대신 벼슬을 주었으나 이를 피하여 홍주 봉서산(鳳棲山) 아래로 돌아갔다.
만년에는 옥계(玉溪)에 거주하고 이를 호로 삼았다. 날마다 일기를 썼고 이를 『파안록(破顔錄)』이라 하였는데, 시사문제를 꺼리지 않고 직필하였으니 사람들이 일컬어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