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공주(公州). 자는 자문(子聞), 호는 빈교(貧郊). 아버지는 증 병조참판 이우(李瑀)이며, 어머니는 개령문씨(開寧文氏)로 현감을 지낸 문덕교(文德敎)의 딸이다.
외할아버지에게 수학해 1626년(인조 4) 문과에 급제했으나 당시의 권신과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아 파방(罷榜: 과거급제를 합격 취소함)되었다. 1633년 다시 응시하여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의병을 모집해 싸웠으며, 이듬 해에 성균관학유에 제수되었다. 청나라와 화의가 성립되자 사직하고 귀향했다가 1638년 고산도찰방(高山道察訪)에 재임했고, 2년 뒤 성균관전적, 1645년 형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을 지냈으며, 이어 병조좌랑에 임명되었다.
그 뒤 용강현령으로 재직하면서 여러 가지 민폐를 척결했고, 당시 칙사가 이르러 무리한 요구를 해오는 것을 능란한 지혜로 대처해 상급자들을 감동시켰는데, 이 일을 감사 이원(李愿)이 조정에 알려 1647년 특명으로 고원군수에 제수되었다.
그 뒤 통례원상례·사헌부장령·남원부사·상의원정(尙衣院正)·제용감정(濟用監正) 등을 두루 역임하는 동안 두 차례 파직을 당했으며, 1655년(효종 6) 삼척부사, 1660년(현종 1) 밀양부사, 1665년 종성부사 등의 외직을 거쳐 한성부우윤에 제수되었는데, 시사(時事)가 뜻에 거슬려 사직하려 했지만, 송시열(宋時烈)의 적극적인 권유로 그의 뜻을 따랐다.
1669년 형조참판 겸 동지중추부사·의금부도사·한성부좌윤 등에 임명되었다. 1671년 흉년이 들자 한성부우윤으로 재직하면서 진제도감(賑濟都監)의 임시직을 겸임하였다.
그 해 5월에 종묘제헌관(宗廟祭獻官)으로 파견되어 제사를 치르고 난 뒤 병으로 별세하였다. 1704년(숙종 30) 백산사(柏山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빈교문집(貧郊文集)』 4권 2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