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탄금(彈琴), 호는 사포(沙浦). 이사필(李士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우인(李友仁)이고, 아버지는 이상홍(李尙弘)이며, 어머니는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의 딸이다.
1619년(광해군 11)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 등의 관직을 거쳤다. 1630년(인조 8)에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으로 사행길에 올랐다가 병으로 도중에 돌아왔다. 당시는 명청교체기로서, 서장관을 모면하려는 풍조가 심하였기에 이로 인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오랫동안 침체되었다.
효종 때에 단천군수로서 재직중 파직되었으나, 뒤에 재임시 수리에 힘써 산을 뚫어 물길을 열고 관개한 공을 인정받아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를 받았다.
현종초에 한성부우윤에 제수되었으나 성품이 원만하지 못하다 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체직되었다. 계룡산의 「갑사사적비(甲寺事蹟碑)」는 그가 찬한 것으로, 불교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