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헌구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공조판서, 대사헌,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치서(稚瑞)
국간(菊幹)
시호
충간(忠簡)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84년(정조 8)
사망 연도
1858년(철종 9)
본관
전주
주요 관직
한성부판윤|공조판서|대사헌|우의정
정의
조선 후기에, 공조판서, 대사헌,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치서(稚瑞), 호는 국간(菊幹). 좌의정 이건명(李健命)의 현손이며, 이면지(李勉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철상(李徹祥)이고, 아버지는 이장현(李章顯)이며, 어머니는 김치온(金致溫)의 딸이다. 청검(淸儉)하며 근면하기로 이름났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14년(순조 14)에 진사가 되고, 1816년(순조 1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29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으며 그 뒤 성균관대사성·이조참의를 역임하고, 1836년(헌종 2)에 이조참판에 올랐다.

이듬해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고, 1841년 한성부판윤·공조판서·대사헌을, 이듬해 형조판서·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한편 그 해 평안도관찰사로 파견되어 의주를 비롯한 여러 산성에 군량을 비축하도록 하였고, 별무시(別武試)를 실시하였다.

1844년 사헌부대사헌으로 김유근(金逌根)·김홍근(金弘根)의 추죄를 주장하다가 덕원부에 유배, 이듬해 석방되어 사은 겸 동지정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47년 형조판서·대사헌·한성부판윤을 역임하고, 1849년(철종 즉위년) 이조판서, 이듬해 예조판서·판의금부사를 역임하였으며, 1852년 우의정에 올랐다. 그 때 나이 69세로 치사(致仕)하기를 연이어 간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으며 바로 좌의정이 되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판중추부사·광주유수(廣州留守)를 역임하는 등 치정(治政)에 힘썼다. 70세가 되어 국가로부터 궤장(几杖)을 수여받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참고문헌

『순조실록(純祖實錄)』
『헌종실록(憲宗實錄)』
『철종실록(哲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집필자
원유한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