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갑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판의금부사, 전의도감제조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원여(元汝)
평천(平泉)
시호
정헌(正獻)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64년(영조 40)
사망 연도
미상
본관
한산(韓山,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
주요 관직
이조참의|황해도관찰사|형조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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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판의금부사, 전의도감제조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원여(元汝). 이병건(李秉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산중(李山重)이고, 아버지는 참판 이태영(李泰永)이며, 어머니는 유한모(兪漢萺)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90년(정조 14)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강제(講製) 문신이 되었다. 호남암행어사·홍문관교리를 역임하였다. 1801년(순조 1) 부호군으로 사건에 연루되어 칠원에 유배되었다가 곧 석방되었다.

1807년 이조참의, 이듬해 황해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812년 대사간, 1814년 이조참판을 역임하였고, 1816년 함경도감사로 부임하여서 수재로 큰 피해를 본 함흥을 비롯한 6개 읍에 진휼정책(賑恤政策: 재해를 입은 백성들을 구제하는 정책)을 잘 수행하였다.

이듬해 이조판서로 임명되었고, 1820년 판의금부사로서 동지정사로 임명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예조판서·형조판서·수원부유수·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827년 평안도관찰사로서 탄핵을 받아 한때 삭직되었다가 다시 판의금부사로서 1830년 책저도감제조(冊儲都監提調), 이듬해 전의도감제조(典醫都監提調) 등을 역임하였다. 1833년 70세가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시호는 정헌(正獻)이다.

참고문헌

『정조실록(正祖實錄)』
『순조실록(純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진신자력(縉紳資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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