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는 인쇄판의 판면에 먹 또는 잉크를 묻혀 그 판면의 문자·기호·그림 등을 종이·깁(비단) 따위에 누르거나 문질러 찍어내는 복제 기술이다. 오늘날에는 전자·광선·자력 등으로 인쇄물을 만드 기술을 포괄한다. 초기 목판인쇄에서 출발한 인쇄술은 금속이나 나무로 활자를 만들어 배열하여 인쇄하는 활자인쇄로 발전했다. 우리나라는 통일신라 때 세계 최초의 목판인쇄물인 「무구정광다라니경」을 펴냈고, 고려시대에는 서양보다 200여년 앞서 금속활자를 발명했다. 조선의 인쇄문화도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근대기 이후에는 서양 인쇄술로 대체되어 나갔다.
인쇄판은 옛날의 목판 · 활자판을 비롯하여 근대의 볼록판 · 평판 · 오목판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인쇄는 인류의 두뇌 · 학문 · 과학 및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급진적으로 발전하여 오늘날에는 전자 · 광선 · 자력 등으로 인쇄물을 만드는 일, 또는 그 기술을 포괄한다. 그러나 근대식 연활자가 출현하기 이전에는 오로지 목판과 활자판의 인쇄가 인류문화를 발전시키는 원동력 구실을 하였다.
우리 나라의 초기 인쇄도 목판인쇄에서 비롯되었다. 그 시기는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나온 『무구정광대다라니경 無垢淨光大陀羅尼經』 목판권자본이 751년(경덕왕 10) 무렵에 간행된 점으로 미루어 그 이전으로 소급될 수 있다. 우리 나라의 초기 목판인쇄는 본문 내용이 짤막한 『다라니경』 등의 불경을 소형판에 새겨 다량으로 찍어 납탑공양(納塔供養)한 데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 뒤 9세기 후반기인 신라 말기에 이르러서는 시문(詩文) 등의 일반 학문서적을 판각해 내는 단계로까지 널리 보급되었다. 고려시대로 들어와서는 불교가 국가적 종교로 승격, 호국이념과 결부되어 그 진흥책이 더욱 강화되자 불교서적의 판각이 성행하였다.
현전하는 1007년(목종 10) 간행의 개성 총지사판(摠持寺板) 『일체여래심비밀전신사리보협인다라니경 一切如來心祕密全身舍利寶篋印陀羅尼經』을 비롯하여, 11세기에 새겨 낸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과 교장(敎藏), 그리고 13세기 전반기에 다시 판각해 낸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이 이를 뒷받침하여 준다. 글자의 새김이 정교하고 일련의 거질(巨帙) 판각인 점에서 목판인쇄의 발달이 한층 돋보인다.
이와 같이 발전된 판각술은 사찰판(寺刹版) 및 관판(官版)의 간행사업을 계속 촉진시켰으며, 조선시대로 이어지면서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조선은 고려와는 달리 숭유억불정책을 국시로 삼아 주로 경사(經史:經書와 史記) 중심의 책들이 간행하였다. 판각의 기법도 고려가 사찰판이 정교하였다면, 조선은 관판 중 특히 중앙관판의 인쇄가 자못 정교하였다.
한편, 목판인쇄는 시간과 비용이 너무 많이 들 뿐만 아니라 오직 한 책의 출판으로 국한되는 폐단이 있었기 때문에, 출판공정의 시간과 비용을 절감하고 필요한 책을 간편하게 찍어내어 공급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활자인쇄가 시도되었다.
그 최초의 것은 11세기 중기에 북송(北宋)의 필승(畢昇)이 고안한 교니활자(膠泥活字)의 인쇄이다. 그러나 이것은 재료가 흙이고 조판이 어려워 실용화되지 못하였다. 그 실패를 금속활자의 인쇄에서 최초로 성공시킨 것이 바로 고려의 주자인쇄이다.
13세기 전기에 주자로 찍은 『남명천화상송증도가 南明泉和尙頌證道歌』를 몽고군의 침입으로 강화에 피란하여 다시 그대로 새긴 중조본(重雕本)이 전해지고, 또 피란할 때 미처 가지고 오지 못한 50권 거질의 『상정예문 詳定禮文』을 주자로 28부 찍어 여러 관사에 나누어 주었다.
중앙관서의 주자인쇄는 그 뒤 지방의 사찰에까지 파급되어 1377년(우왕 3)에 청주목의 교외에 있었던 흥덕사(興德寺)에서 주자를 만들어 찍어낸 『불조직지심체요절 佛祖直指心體要節』이 전하여지고 있다.
이러한 고려의 주자인쇄는 조선으로 계승되어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눈부신 발전을 하였다. 활자의 재료면에서 볼 때 동 · 연 · 철 · 나무 · 찰흙 등과 같이 그 종류가 다양하며, 글자체의 면에서 볼 때는 더욱 그러하다.
또한 활자의 정교도도 참으로 우아하고 미려하다. 활자인쇄는 경사자집(經史子集)의 여러 주제 분야에 걸쳐 필요한 책을 고루 찍어 널리 반포하여 학문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특히 민간에서까지 활자를 다양하게 만들어 인쇄하게 되어 서민문화의 저변을 확대하는 데 이바지함으로써 문화사적인 면에서 그 의의가 크게 평가된다.
우리 나라의 목판인쇄가 어느 때 시작되었는지 정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인쇄문화사적인 관점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에 와서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이른 시기에 그 발상을 보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겨레가 일찍부터 고도의 문화를 소유하였기 때문이다.
먼저 불교서적의 인쇄를 싹트게 한 것은 대내적으로는 불교국가를 이상으로 하는 신라 왕조의 자주적 토대를 굳건하게 다지려는 국가정책과 영합하여 불교문화를 자못 흥륭(興隆)하게 발전시킨 데서 기인한다.
대외적으로는 당시 동양에서 문명국의 위치라는 것이 불교문화의 깊이 여하에 따라 좌우되었던 만큼 국제적인 경쟁정책과 호응하여 그 문화를 더욱 찬란하게 꽃피게 한 데서 말미암은 것임을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한 문화적 기반 위에서 일찍이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였던 초기단계의 인쇄 지식과 기법을 발전시켜 목판인쇄술을 싹틔워 퍼지게 하였으며, 이것을 이내 가능하게 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여러 여건이 고루 갖추어졌기 때문이다.
첫째, 금석류(金石類)의 표면 또는 평면에 글자 · 부호 · 그림 등을 새기는 기술, 그리고 그것에서 필요에 따라 탁인(拓印)해 내는 방법이 마침내 목판의 평면에 글자와 그림을 반대로 새겨서 다량으로 찍어내는 기법으로의 전환을 가능하게 한 여건이 되었다.
목판인쇄가 싹트기 이전에 우리 영토에는 이미 여러 종류의 비석이 세워져 전해지고 있었으며, 또한 기물(器物)에도 양각 또는 음각으로 새겨지거나 주조되어 그러한 기술이 이미 보급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석경(石經)의 글자는 그 기술이 섬세하고 정교하여 필력을 예리하게 나타내 주고 있는바, 신라 석각술(石刻術)의 우수성이 자못 돋보인다.
그리고 각종 금동판에는 비교적 긴 문장이 양각 또는 음각의 자획으로 잘 새겨졌다. 그 중 익산군 왕궁리 석탑에서 나온 금판경첩(金板經帖)은 삼국통일 이후부터 고려 초기까지의 것으로 넓게 추정하고 있지만, 글자의 볼록새김이 예리하고 글줄이 정연하며, 각판의 일단을 철사로 철하여 책과 같이 장첩(粧帖)하였다.
이렇듯 금석류에 조각 또는 주성하는 기술과 거기서 탁인해 내는 방법이 목판에 글자와 그림 등을 새겨 인쇄하는 기법을 가능하게 하고, 그 전파에 크게 기여하였다.
둘째, 쇠붙이 · 돌 · 상아 · 나무 등의 재료를 이용하여 부호 · 이름 · 관직명 등을 새긴 인장에 인주와 먹을 칠하여 문서 등에 찍고, 또 불인(佛印)과 탑인(塔印)에 칠하여 종이 또는 깁에 찍어 다량 생산했던 방법도 인쇄방법과 공통성을 지닌 점에서 목판인쇄술의 발상에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인장류는 일찍부터 사용되었으며, 675년에는 동으로 일정하게 주조하여 여러 관서와 주군(州郡)에 나누어 주기까지 하였다.
불인과 탑인의 기록은 문헌에서 아직 찾아내지 못하였지만, 중국에는 이미 7세기 후반 초기에 인도에서 전래되었고, 일본에도 8세기 전반기의 고문서에 그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그 조각기법과 날인방법은 동양에서 다량으로 소요되는 『다라니경』 등의 불서를 서사(書寫)하는 대신 소형의 나무판에 새겨 수시로 얼마든지 찍어내어 납탑공양하는 단계로 전환시키는 데 큰 작용을 하였을 것이다.
셋째, 우리 나라는 옛날부터 주로 닥을 사용하여 훌륭하게 종이를 만들어 냈는데, 이것이 또한 목판인쇄술을 발전시킨 전제적 여건이 되었다. 우리 나라의 저지(楮紙)는 희고 두껍고 질겨서 오래 견딜 수 있음이 일대 장점이다. 이처럼 양질의 한지를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생산하여 공급했으므로 인쇄문화 발상에 큰 구실을 하였다.
넷째, 인쇄에 필요한 먹을 옛날부터 훌륭하게 생산해 냈음도 목판인쇄술을 발전시킨 전제적 여건이 되었다. 우리 나라의 고구려 고분 중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가 발견된 무덤의 전실 정면 윗벽에는 종횡으로 그어진 계선 안에 매줄 10자씩 총 81줄의 사경체 글씨가 있다. 또 중국 사람이 쓴 문헌을 보면, 삼국시대에 벌써 훌륭한 먹이 생산되어 중국에 수출, 애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나라의 먹에는 송연먹과 유연먹이 있는데, 그 중 송연먹이 초기에 생산되어 인쇄에 사용되었다. 이것은 먹이 번지지 않고 먹색에 윤이 나서 목판인쇄에는 아주 적합하였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목판인쇄술을 발생하게 한 전제적 여건이 고대에 벌써 고루 갖추어졌기 때문에 중국으로부터 초기단계의 인쇄 지식과 기법이 수입되자 우리 나라에서도 바로 싹트게 되었던 것이다.
중국에서 목판인쇄의 기원은 그 설이 복잡다양하나, 동양인쇄문화의 발달사적 관점에 의하면 7세기 후기부터 8세기 초기까지의 당대(唐代)로 여겨진다. 우리 나라에서도 중국에 뒤이어 바로 목판인쇄술을 발상하게 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시대에 간행된 목판본 중 오늘날까지 전래되고 있는 것은 1966년 10월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나온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다. 이 경권(經卷)이 발견된 초기에는 고증에 있어서 엇갈린 견해가 제기되었으나, 학계에서는 그 간행시기를 751년 무렵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전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을 770년 무렵의 간행인 일본의 『백만탑다라니 百萬塔陀羅尼』로 여겨왔다. 이 『백만탑다라니』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서 4종의 다라니만을 발췌, 길고 짧게 하여 도합 8종으로 찍어낸 낱장의 인쇄물로서 초기단계의 불인 · 탑인의 날인방법과 같이 판목조각에 글자를 새겨 종이를 아래에 놓고 그 판으로 위에서 눌러 찍은 것이다.
글자새김과 글자체도 실물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자못 치졸한 편이다. 이에 대하여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비록 소형 목판본이기는 하나 판목에 본문과 다라니의 경문을 완전하게 새겨서 평면으로 놓고 글자면에 먹물을 칠한 다음, 종이를 놓고 그 위를 문질러 찍어 목판인쇄술의 성격을 완전하게 갖춘 초기의 것에 해당한다.
그 장정은 도서의 초기 형태인 권자본이며, 판각술이 정교하여 글자체의 힘찬 필력을 제법 살려 주고 있다. 또한 먹색이 자못 진하고 묵광이 창연하다. 따라서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서는 이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인쇄술의 성격과 특징을 갖춘 가장 초기의 목판권자본이 되며, 고졸(古拙:기교가 없고 서툴러 보이나 고아한 멋이 있음)한 가운데서 보여주는 정교도는 당시 우리 겨레의 고도로 발달하였던 인쇄문화 수준을 여실히 입증해 주고 있다.
신라 말기의 인쇄문화는 고려로 접어들자 사찰에 의하여 계승,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신라시대 인쇄의 발상 보급에 큰 영향을 끼쳤던 불교가 고려로 넘어와 국가적 종교로 승격되자, 그 진흥책이 더욱 강구되어 사찰이 경향각지에 우후죽순 격으로 늘어났고 종파가 점차로 확장되었으며 국민 전체의 신앙도가 날로 높아졌다. 따라서 사찰의 불경 간행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국초부터 계속되는 거란 · 여진 · 몽고의 외침, 그리고 잦은 내란을 겪는 사이에 그 동안 간행된 귀중한 전적을 비롯한 숱한 문화유산들이 소실되고 탕진되어 버렸다.
탑 또는 불복(佛腹) 중에 간직하였던 간본들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을 뿐이며, 그 중 가장 오래된 것이고 김완섭(金完燮) 소장인 1007년 간행된 총지사판 『보협인다라니경』이다.
이 경은 우리 나라의 독자적인 판본으로서 중국으로부터 경문(經文)을 도입하고, 그것을 새겨 탑에 안치하는 불사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실제의 판각과정에서는 그것보다 월등하게 창의성을 발휘하여 독자적인 방법으로 정서, 정각해 낸 것이다. 우리 조상들의 슬기로운 지혜가 담긴 고려 초기의 대표적인 정각본(精刻本)이며, 당시의 간본 가운데 백미임을 자랑할 만하다.
고려 초기의 인쇄술은 해를 거듭할수록 발달하여 왔는데, 때마침 북송에서는 10세기 말기에 동양 최초의 거질 대장경인 『개보칙판대장경』이 판각되었다. 그것이 991년(성종 10)에 수입되었는데, 불교가 흥륭하였던 고려로서는 그것의 판각을 통해 문화국으로서의 위력을 떨치고자 은근한 경쟁심을 솟구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던 중 거란의 외침이 자행되었는데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대장각판군신기고문 大藏刻板君臣祈告文」에도 나타나 있듯이 대장경 판각에 의한 불력으로 대국란을 타개하고자 거국적으로 발원하여, 마침내 1011년(현종 2) 무렵에 그 판각에 착수하였다. 이것이 바로 초조대장경이며, 1087년(선종 4)에 이르러 일단락을 보게 되었다. 571함 6,000권으로 거질(巨帙)의 한역정장(漢譯正藏)이다.
그 판각에 있어서는 개보칙판 송본(宋本)을 비롯한 거란본 · 송신역경론(宋新譯經論) · 정원속개원록(貞元續開元錄) 입장의 경전 등을 바탕으로 삼고, 판식은 매줄 14자인 송본에 준거하였는데, 종래는 초조대장경 전체가 바탕 책을 그대로 번각(翻刻)한 것으로 여겨 왔다.
그러나 그 바탕이 된 책들은 그 뒤 수기(守其)가 재조대장경을 판각할 때 교정용으로 사용하였으므로 재고할 여지가 있다. 더욱이 그 번각설은 초조대장경의 판각술을 낮게 평가하는 것이 되므로 검토할 필요성이 있다.
이 초조대장경(이하 초조본으로 약칭함)은 우리 나라에 전해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근년에 천혜봉(千惠鳳)이 200여 권을 발견하여 이미 일본의 난젠사(南禪寺)에서 조사한 것을 합치고, 또 관계 문헌을 섭렵하여 새로운 검토를 해본바, 바탕으로 삼은 책 중 거란본은 17자본임을 밝혀냈다. 본문만을 충실하게 받아들이고 판식은 송본에 준거, 새로 판각용 정서본을 마련하여 판각하였음이 분명하다.
그 인쇄술은 송본계 초조본에 필적하는 정교도를 보인다. 또 그 바탕이 된 책 중에는 국내전본(國內傳本)도 들어 있음을 알아냈다. 이것도 물론 송본의 판식에 준거하였기 때문에 다른 송본계 및 거란본계 초조본과 똑같으며, 서법이 매우 해정하고 판각술이 정교하여 구양순체(歐陽詢體)의 굳센 방필(方筆)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그 손색없는 인쇄술의 독자적 우수성은 괄목할 만하다.
정장(正藏) 전체를 충실한 번각, 수용으로 여겨 왔던 종래의 통설이 우선 여기서 지적될 수 있다. 송본에 의거한 초조본의 경우도 그 본문과 판식을 받아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전적으로 번각 수용한 것은 아니다. 함차(函次)를 달리하고, 권말의 간기(刊記)를 생략하였다.
재조대장경의 경우와 같이 응당 우리 나라의 간기를 새겨 넣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당시의 미묘하였던 국제관계가 연호와 국호사용을 주저하게 하여 그것이 들어 있는 간기 자체를 생략함이 자주성을 살리는 길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또 송본계 초조본에는 송나라 황제의 피휘결획자(避諱缺畫字)가 보이는데, 그것들이 모두 결획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정자(正字)로 고쳐 새긴 것이 적지 않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현전되고 있는 송본과 우리 초조본의 『어제비장전 御製祕藏詮』 권13의 판화를 비교하여 보면 그 구도내용이 다르게 나타난다. 이것은 송본을 그대로 번각한 것이 아님을 뚜렷이 입증해 주는 자료가 될 것이다.
이렇듯 종래의 번각 수용설은 보다 구체적인 조사를 하지 않고 문헌 중심으로 막연하게 언급한 것이기 때문에 시정이 불가피하다. 이와 같이 초조본 판각술의 우수성과 자주성은 고려 전기의 인쇄문화 연구에서 종래 소홀하였던 특성의 일면을 되찾는 데 새로운 전기가 될 것이다.
재조대장경(이하 재조본으로 약칭함)은 몽고군의 침입으로 부인사(符仁寺) 소장의 초조경판이 1232년(고종 19)에 소실되자, 다시 이를 새겨서 불력의 수호로 몽고의 외침을 물리치고자 2차로 판각한 한역정장이다. 1236년부터 1251년까지 16년간에 걸쳐 완성시켰으며, 그 경판 수는 무려 8만1000여 판에 달한다. 이른바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이 바로 그것이다.
이 재조본은 초조본을 비롯한 송본 · 거란본과의 대교는 물론 각종의 불경목록까지 두루 참고하여 본문의 오탈(誤脫) · 착사(錯寫) · 이역(異譯) 등을 논정하여 교정 또는 보수한 다음 번각한 것이다.
따라서 판각의 정교도는 초조본보다 훨씬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본문만은 동양의 어느 한역대장경보다 우수함이 국내외 학계의 정평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끊임없이 수입하여 갔으며 불교 전파의 초전으로 삼아 왔다.
그 예로 일본에서 최초로 1613년에 착수하였던 기타노(北野) 경왕당판(經王堂板) 대장경이 재조본의 영향을 받고 그 판식을 따랐음을 볼 수 있다. 또 19세기 말기부터 20세기 초기까지의 사이에 간행한 축쇄대장경(縮刷大藏經)이라든지 신수대장경(新修大藏經) 등이 모두 재조본을 정본(定本)으로 삼고, 송본 · 원본 · 명본 등으로 교합하였다.
이들 대장경이 현재 도처에 널리 보급, 이용되고 있으니, 고려대장경의 우수한 본문이 온 세계의 불교문화 연구 및 발전에 끼친 영향은 크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 방대한 팔만대장경판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원형을 보존하고 있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3) 교장(敎藏)
교장은 한역정장에 대한 동양 학문승들의 신구찬술(新舊撰述)인 제종의장(諸宗義章)과 소초(疏鈔)인 장소(章疏)를 말하며, 그 편찬 간행사업이 문종의 넷째 왕자인 의천(義天)에 의하여 계획, 실행되었다.
그는 1085년(선종 2)에 미복(微服) 차림으로 송나라에 들어가 각지를 순방하면서 장소 3,000여 권을 수집하여 돌아왔고, 그 뒤 국내에서는 물론 요(遼)와 일본에서까지 두루 수집하여 4,000권의 장소 목록인 『신편제종교장총록 新編諸宗敎藏總錄』 3권을 1090년에 엮어냈다.
한편, 흥왕사(興王寺)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 본문의 오류와 결락을 바로잡으면서 판각에 착수하였다. 그 판각의 시작과 마침, 그리고 그 규모에 관한 기록이 문헌에 자세하게 적혀 있지 않아, 그가 죽을 때까지 완간되었는지의 여부는 아직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 완간문제가 어떻든 간에 동양 학문승들의 장소를 최초로 집대성하여 정장과 쌍벽을 이루게 한 것은 다른 민족이 감히 시도하지 못했던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
교장의 현존 원각본으로는 일본 도다이사도서관(東大寺圖書館) 소장의 『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 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鈔』와 다이도큐문고(大東急文庫) 소장의 정원본 『화엄경소 華嚴經疏』, 그리고 간기(刊記)를 잃은 국내 소장의 『주인왕호국반야경 注仁王護國般若經』 등이 알려져 있고, 그 번각본으로는 송광사를 비롯한 몇몇 곳에 여러 종이 전존되고 있다.
그 전존본을 조사해 보면 본시 수집한 교장의 간본(刊本)인 경우는 그대로 번각하였지만, 초본(鈔本)인 경우는 그 본문을 여러 고승이 교감한 다음 달필가가 판서(板書)하여 이름있는 각수들이 판각해 냈다.
이를테면 『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는 요나라에서 수집한 간본을 번각하였지만, 그 밖의 교감자(校勘者)와 판서자(板書者)의 표시가 있는 교장은 모두 우리 나라에서 독자적으로 판각용 정서본을 마련하여 철저하게 교정한 다음 정성껏 초각(初刻)한 조본(祖本)들이다. 그 판각술의 우아 정교도는 당시 고도로 발달하였던 인쇄문화를 잘 뒷받침해 준다.
우리 나라의 목판인쇄는 신라 때 개판된 불국사판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고려 초기에 개판된 총지사판 『보협인다라니경』에 의하여 알 수 있듯이, 사찰판에서 싹터 널리 전파되었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불교를 국교로 삼고 승려를 우대했으며, 또 사원경제가 풍요해지고 왕실을 비롯한 권신 · 양반 등의 권력층과 부호들이 국태민안과 소원성취, 그리고 공양과 명복을 기원하는 불사를 돈독히 수행함에 따라 사찰판의 간행이 전대에 걸쳐 꾸준히 촉진되었다.
게다가 사찰의 승려들이 판각, 인출 및 장책하는 기술을 직접 체험하여 자력으로 능히 처리할 수 있었고, 판각용 목재는 주위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었으므로 사찰판은 자못 발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여건하에서 많은 불경이 사찰에서 간행되었는데, 이 간본들은 판각이 정교하고 먹색이 선명하게 윤이 나며 품이 매우 고상하다.
또한, 13세기 최우(崔瑀:뒤에 崔怡로 개명함)를 위하여 판각한 해인사 소장의 고려경판은 모두 정교하며, 이는 1982년에 국보 또는 보물로 각각 지정되었다. 초기의 사찰판 국내전본을 보면 신라에서 고려로 승계, 발전되어 온 사경체(寫經體)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이 특징이나, 그 서법이 모두 일정한 것은 아니다.
한편, 중국에서 입수해 온 불경을 바탕으로 간행한 것을 보면 송본 또는 원본의 글자체를 그대로 번각 수용한 것도 적지 않다. 고려 말기의 불교서적에 그러한 번각계의 글자체가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사찰판으로서는 가장 품이 떨어져 조잡한 편이다. 이와 같이 사찰판은 번각본을 제외하면 그 대부분은 인쇄술이 정교하여 간본이 모두 우아 미려하다는 것이 정평이다.
경사(經史)의 서적은 과거제도가 채택된 광종 이후 점차로 요구되기 시작하였으며, 성종은 왕위에 오른 뒤 선왕을 계승하여 유술(儒術)을 숭상하고 경사의 서적을 정비, 수장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베껴서 비서성(祕書省)과 백호관(白虎觀)에 소장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며, 또 학생들의 이용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서경(西京)에 수서원(修書院)을 설치하고 모은 책도 역시 초사(抄寫)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관서가 경사를 비롯한 자부(子部)의 책을 간행한 것은, 거란과의 싸움이 멈추고 거국적 사업인 초조대장경의 판각이 상당히 진척되었으며, 또 판각술이 지방관서에까지 고루 전파되었던 무렵인 정종 때이다. 그 관판본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042년(정종 8)에 동경관인 경주에서 왕명으로 『전한서 前漢書』 · 『후한서 後漢書』 · 『당서 唐書』를 간행하여 진상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1045년에는 중앙관서의 비서성이 『예기정의 禮記正義』와 『모시정의 毛詩正義』를 간행하여 어서각(御書閣)에 소장함은 물론 문신들에게 반사해 주었다. 그 이후 책판(冊板)은 주로 지방에서 이루어져 비서성으로 옮겨 보존하면서 인쇄, 보급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이렇듯 고려의 관판은 지방관서가 주로 담당하여 왔다. 그리하여 11세기인 문종 때는 문헌이 크게 갖추어졌다.
이와 같이 고려는 수서(收書)와 판각에 힘을 기울여 비각의 책판은 크게 늘어났고, 그것이 쌓여 훼손이 생기게 되었다. 그 결과 1101년(숙종 6) 3월에는 국자감(國子監)에 서적포(書籍舖)를 새로 설치하고 책판을 모두 그곳으로 옮겼다. 그 이후도 관판본은 중앙관서인 보문각(寶文閣) 등에서 본문을 교수한 다음 지방의 주현(州縣) 관서에 나누어 보내서 새겨 바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중앙에서는 그 책판을 잘 관리하면서 필요에 따라 수시로 찍어 보급하여 교육과 면학에 이바지하였다. 이것이 고려의 관판인쇄정책이었으며, 그 결과 지방관서의 판각술이 크게 발달하여 지방의 문호들로 하여금 사가판(私家版)을 출간하게 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현전되고 있는 관판본을 살펴보면 판각기법이 사찰판보다는 아류에 속하며, 중국에서 수입된 문헌은 대체로 송본과 원본을 번각하고 있어 그 기법이 또한 치졸한 편이다. 한편, 우리 나라의 저술을 개판한 것 중에는 고려판각의 독자적 전통성을 보여주는 것도 있음을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고려의 인쇄문화에서 정수라 일컬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독창적인 주자인쇄가 될 것이다. 고려주자인쇄술의 발명시기에 대하여는 아직도 그 설이 정확하게 밝혀지고 있지 않으나, 13세기 전기에 그 주자인쇄가 실시된 것만은 뚜렷하게 확인된다.
고려정부가 개경에서 주자로 찍은 『남명천화상송증도가』를 강화로 천도한 1239년에 그대로 뒤집어 새긴 책이 전래되고 있다. 이것은 전란으로 어수선한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다량으로 필요하여 무인정부의 제일인자인 최이가 직접 간행하게 한 것이다.
이 주자본을 중조(重雕)한 이른바 주자판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의 번각본이 2종 전래되어 밝혀진 것이다. 이들이 다소 후쇄이기는 하지만, 새김이 매우 정교하여 바탕이 된 주자본의 성격과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관주본인 경우는 정교하게 주형을 만들어 활자를 부어 낸 다음 잘 손질하여 인쇄한 듯, 글자의 크기와 모양이 한결 정연하다. 이 주자판 『증도가』 중조본을 통해 천도 이후의 주자인쇄술이 상당한 수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천도 이후의 주자인쇄에 대하여는 『상정예문』을 28부 찍어 각 관서에 나누어 주었다는 기록이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실려 있다. 그런데 그 인출시기를 종래는 1234년(고종 21)으로 여겨 왔으나, 그와 같이 한정시킬 만한 근거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 글은 최이가 1234년 진양공(晉陽公)에 책봉된 뒤에 이규보에게 대작(代作)을 명하여 쓴 것인데, 그가 1241년 강화에서 죽었으므로 그 사이에 인출된 것으로 넓게 추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고려의 관주인쇄는 원나라의 지배 아래 놓이면서 학문이 위축되자 그 기능이 점차 마비되었다.
그러다가 중국 대륙에서 신흥세력인 명나라가 일어나서 원나라를 북쪽으로 몰아내기 시작하자, 국내에서도 배원사상(排元思想)이 싹트고 주권을 복구하려는 의식이 대두되었으며 그에 따라 학계에서도 종전처럼 서적포를 두고 주자를 만들어 경사자집에 걸쳐 고루 책을 찍어 학문을 권장하여야 한다는 건의가 제기되었다. 그 사실은 정도전(鄭道傳)이 쓴 『치서적포시병서 置書籍舖詩並書』에 잘 나타나고 있다.
그 결과 1392년(공양왕 4) 정월에 마침내 서적원이 설치되고 주자인쇄 업무를 관장하는 영(令)과 승(丞)의 직책까지 두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나 그 해 7월에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면서 그 혼란으로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종전의 마비된 관서의 주자인쇄를 제도상으로 부활시켰다는 사실은 크게 주목해야 할 것이다.
고려주자에 있어서 특기할 것은 중앙관서가 관장하였던 주자인쇄술이 사찰에까지 전파, 보급되었다는 점이다. 그 사주본(寺鑄本) 중 청주목 교외의 흥덕사에서 1377년 7월에 주자로 인출한 『불조직지심체요절』의 하권 1책이 오늘에 전래되고 있다.
이 책은 플랑시(Plancy,C.de.)가 1887년 서울 주재 프랑스공사로 부임하여 12년간 수집한 장서 중의 하나로, 현재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것이 1972년 ‘세계도서의 해’를 기념하기 위한 책의 전시회에 출품됨으로써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임이 확인되었다.
이 흥덕사 주자본은 관서가 활자를 만들어 찍어낸 것이 아니고 사찰이 전통적인 재래의 밀랍주조법으로 활자를 만들어 찍어낸 것이기 때문에 활자의 크기와 모양이 고르지 않고 동일한 글자에 같은 모양의 것이 드물며, 한 줄의 자수에 있어서도 1, 2자의 드나듦이 있을 만큼 아주 조잡한 활자본이다.
이 사주본을 조선시대 때 1차로 주조한 계미자(癸未字)로 찍어낸 『역거삼장문선대책 歷擧三場文選對策』과 대조해 보면, 관주(官鑄)가 아닌 사주(寺鑄)이며, 또 시대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활자의 주조가 더 치졸하나 조판기술의 미숙도에서는 공통성이 없지 않다. 이것은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있어서의 활자인쇄술의 상호연계성과 발달과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인쇄문화자료가 된다.
동양의 활자판은 송나라의 필승이 1041년부터 1048년까지 만든 교니각자(膠泥刻字)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그 활자는 재료가 흙이어서 조판인쇄가 매우 까다로웠던 듯하다. 그리하여 인판(印板)의 계격 안에 진흙을 깔고 활자를 배열하여 다시 구워 고착시킨 다음 인쇄하였는데, 이러한 방법은 활자를 한번밖에 사용할 수 없었으므로 결국 실용화되지 못하고 하나의 시도작으로 끝났다.
그 이후 원나라 때 왕정(王禎)이 쓴 『농서 農書』에 근세에 주석을 녹여 활자를 만들었다는 내용과 함께 그 조판법이 소개되어 있다. 여기서 말한 근세는 몽고가 원으로 국호를 사용한 1271년 무렵, 즉 13세기 후반기가 되므로 우리 나라의 주자인쇄보다 뒤에 있었던 일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활자 면에 먹이 잘 묻지 않고, 또 활자를 철사로 꿰어 줄로 만들어 조판하였기 때문에 인쇄중에 파괴가 잦아 오래 사용하지 못하고 목활자로 대체되었다고 전해진다. 중국의 주자인쇄는 15세기 말기부터 16세기 초기까지의 사이에 민간인쇄업자들에 의하여 비로소 성공을 보았다.
한편, 서구에서는 독일의 구텐베르크(Gutenberg,J.)가 1440년대 말기에 처음으로 금속활자를 발명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조선에서 세 번째로 1434년(세종 16)에 동으로 주성한 갑인자(甲寅字)보다도 뒤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비교해 볼 때 활자의 개념은 비록 교니활자에서 비롯하였다 하더라도 고려주자는 그 창의성과 우위성이 높이 평가된다.
조선시대의 인쇄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활자인쇄가 고도로 발달한 것이 그 특징이다. 조선의 관판인쇄는 중앙관서가 중심이 되어 실시해 왔는데, 오랜 기간에 걸쳐 소요되는 책은 목판으로 간행한 것도 있지만 주로 활자를 만들어 필요한 책을 수시로 찍어내어 문신을 비롯한 중앙 및 지방의 관서 · 학교 · 서원 등에 반사(頒賜:임금이 물건이나 녹봉을 내려 나누어 주는 것)하고, 그것이 더 필요한 경우는 다시 번각하여 널리 보급하게 하는 인쇄정책을 써왔음이 고려 때와 견주어 크게 다른 점이다.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새로운 왕조를 수립하자 관제를 제정하였는데, 그것은 대체로 고려의 제도를 답습한 것이었다. 따라서 서적을 찍어내는 일을 관장하는 관서의 직제에 있어서도 고려 말기 서적원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고, 영과 승의 관직도 그대로 두게 하였다.
그러나 건국 직후는 신왕조의 기반이 잡히지 않았고, 또 왕권을 둘러싼 혈육간의 싸움이 지속되어 혼란한 상태에 있었으므로 주자인쇄와 같은 것은 염두에 둘 수 없었다. 그러므로 건국 초기에는 긴히 필요한 인쇄물에 한하여 목활자와 목판으로 찍어 충당할 수밖에 없었다.
1395년(태조 4)에 이원길(李原吉)과 한노개(韓奴介) 그리고 1397년에 심지백(沈之伯)에게 반사한 『개국원종공신녹권 開國原從功臣錄券』이 목활자인쇄본이고, 1397년에 반포한 『경제육전 經濟六典』이 목판인쇄본인 것이 그 예이다. 신왕조의 기틀이 안팎으로 안정된 것은 제3대왕 태종이 즉위하여 왕권을 확고하게 다진 뒤이다.
태종은 우선 행정기구를 개혁하여 독자적인 관제로 정비하기 시작하였고, 또한 억불숭유책을 국시로 하는 이념적 또는 정신적 토대 구축에 박차를 가하는 동시에 특히 숭문정책의 실천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그 정책의 촉진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유생들에게 학문을 권장하는 일이며, 그 일을 위해서는 서적을 고루 간인하여 널리 보급시키는 일이었다.
1403년 2월에는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하고 동활자의 주조를 명하였는데, 이때 수개월 걸려 완성된 활자가 계미자이다. 이 계미자는 그 해의 간지를 따서 이름을 붙였으며, 밀랍에 잘 꽂힐 수 있도록 그 끝은 송곳 모양으로 뾰족하게 만들어졌다. 그러나 인쇄중에 자주 동요가 생겨 수시로 밀랍을 녹여 부어 바로잡아야 했기 때문에 하루에 수지(數紙)밖에 찍어내지 못하였다.
이 조판기술은 1420년(세종 2)에 만들어진 경자자(庚子字)에서 크게 개량되었는데, 활자와 조판용 동판을 평정하고 튼튼하게 만들어 서로 잘 맞도록 하여 인쇄중 밀랍을 녹여 사용하지 않아도 활자가 움직이지 않아 인쇄의 능률이 계미자보다 훨씬 증가하여 하루에 20여 지를 찍어냈다. 이 경자자의 인본은 비교적 여러 종이 전래되고 있다.
세종은 1434년 7월에 또다시 개주에 착수하여 큰 자와 작은 자의 동활자 20여만 개를 주성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갑인자이다. 이는 글자체가 매우 아름답고 명정한 필서체이며, 일명 위부인자(衛夫人字)라고도 일컫는다. 이 갑인자에 이르러 활자의 네모를 평평하고 바르게, 그리고 조판용 동판도 완전한 조립식으로 튼튼하고 정교하게 개조하였기 때문에 대나무만으로 빈틈을 메워 조판해 인쇄하는 단계로까지 발전시켜 하루의 인출량이 40여 지로 대폭 증진되었다.
우리 나라의 관주인쇄술(官鑄印刷術)은 세종 때의 갑인자에 이르러 비로소 고도의 단계로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갑인자는 1580년(선조 13)에 재주할 때까지 가장 오랫동안 사용되어 전해지고 있는 인본이 가장 많다. 이 활자는 정교하고 아름다워 조선 말기까지 보주 또는 개주되면서 주용되었다.
초주갑인자와 여러 개주갑인자로 찍은 책들은 글자체가 같아 그 식별이 어려우나, 글자 획에 나타나는 박력도와 특정 글자에 나타나는 차이 등으로 가름될 수 있다. 조선의 관주인쇄술이 절정에 이르렀던 세종 때에는 우리글을 창제하고 처음으로 한글활자를 부어 국역본을 찍어냈음도 우리 나라의 인쇄문화사상 특기할 만한 일이다.
1447년에 인출된 『석보상절 釋譜詳節』과 『월인천강지곡 月印千江之曲』, 그리고 1488년에 인출된 『동국정운 東國正韻』의 한글이 모두 고딕체의 한글활자로 정교하게 찍혀져 있다. 이 활자는 강직한 굵은 직선의 인서체인 것이 그 특징이다.
또 세종 때에는 『사정전훈의자치통감강목 思政殿訓義資治通鑑綱目』의 강(綱)의 글자를 찍어내기 위하여 1436년에 진양대군(晉陽大君:뒤의 세조)에게 큰 글자를 쓰게 하여 바탕글자로 삼고 연(鉛)으로 활자를 주조하였는데, 이것이 병진자(丙辰字)이다. 늠름한 특대의 활자로, 조선 때 최초로 등장한 우리 글자체의 독자적인 한 활자가 된다. 이로 말미암아 이후 독자적인 활자가 잇따라 나왔으니 이 활자 주성의 의의가 더욱 크다.
1450년(문종 즉위년)에는 당대의 명필가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의 글씨를 바탕글자로 삼고 동으로 주성한 활자가 있는데, 바로 경오자(庚午字)이다. 안평대군의 독특한 필체가 잘 나타나고 있는 아름다운 활자이다. 이 활자는 안평대군이 형 세조의 찬탈을 반대하다가 사사된 뒤 바로 녹여 을해자(乙亥字)를 주조하였기 때문에 그 인본이 극히 드물다. 세조는 비록 의롭지 못하게 등극하였지만, 그가 인쇄문화 발달에 기여한 공헌은 참으로 컸다.
1455년에 강희안(姜希顔)의 글씨를 바탕글자로 삼아 동으로 활자를 주성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을해자이다. 이 활자에서는 한글활자가 함께 사용되어 많은 국역서가 인출되었으며, 임진왜란 직전까지 갑인자 다음으로 오래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 인본이 비교적 많이 전래되고 있다.
1457년에는 덕종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동활자를 만들어 『금강경』을 찍어냈다. 이 활자를 정축자(丁丑字) 또는 금강경대자(金剛經大字)라 일컫는다. 1458년에는 글자체가 가장 크고 작은 동활자인 무인자(戊寅字)를 만들었다. 그 중 큰 활자만을 일컬어 교식자(交食字)라 하기도 한다.
1465년에는 정난종(鄭蘭宗)의 글씨를 바탕글자로 하여 대 · 중 · 소의 동활자를 주성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을유자(乙酉字)이다. 이때에는 한글활자도 아울러 만들어졌다. 을유자는 본시 『원각경 圓覺經』을 찍어내기 위하여 주성된 것인데, 그 밖에 약간의 불교서적을 비롯한 일반서적이 인출되었다. 성종 이후에 주성된 활자는 그 자본을 또다시 중국의 간본에서 구하였기 때문에 글자체가 일변되었다.
을유자는 모양이 정연하지 않아 성종 때부터는 그 사용을 꺼려 1484년(성종 15) 새로운 활자를 주조하였는데, 이것이 갑진자(甲辰字)이다. 이는 작으면서도 해정하고 예쁜 동활자이다. 1493년에는 동활자 계축자(癸丑字)를 주성하였다. 이는 갑진자보다 크고 굵은 진체(晋體)계의 활자이나, 세련도는 좀 떨어진다.
성종이 죽자 1495년(연산군 1) 대비들이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원각사(圓覺寺)에서 불경을 찍어내기 시작하였다. 유신(儒臣)들의 반대가 심하여 은밀히 인경하고자 목활자를 만들어 냈으며, 그 비용은 임금이 사사로 쓰는 내탕금(內帑金)으로 충당하였다. 그 제작은 성종의 계비인 정현대비(貞顯大妃)와 덕종의 비인 인수대왕대비(仁粹大王大妃)가 주관하였다.
이때 한자목활자뿐만 아니라 한글목활자까지 만들어져 국역불경이 인출되었다. 이들 활자를 인경자(印經字)라 하며, 이 활자에 의한 인경은 유신들의 줄기찬 반대로 다음해에 중단되었다. 인경자는 대비들이 내탕금으로 정성껏 만들어 낸 것이기 때문에 글자체가 해정하고 새김이 정교하며, 또 먹색이 시커멓고 선명하여 아름답다. 그리고 한글활자본인 『육조대사법보단경 六祖大師法寶壇經』과 『진언권공 眞言勸供』은 당시의 실제음으로 국역된 점에서 귀중하게 평가되고 있다.
16세기로 접어든 중종 때에는 종래 사용하여 오던 동활자에 없어진 것이 생겨 목활자의 보충이 많아졌고, 또한 마멸이 심하여 쓸 수 없게 된 것도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중국본의 『자치통감 資治通鑑』에서 글자모양이 가늘고 크기가 적절한 것을 골라 바탕글자로 삼고 활자를 새로 주조할 것이 발의되는 동시에, 갑인자 · 갑진자의 이지러진 것과 마멸된 것도 다시 주조할 것이 계획되었다.
1516년(중종 11) 1월에 주자도감이 설치되고, 4월에는 그 업무를 맡아보았던 낭관(郎官)들에게 승직(陞職)의 논공행상(論功行賞:공적의 유무 · 대소를 논결하여 각각 알맞은 상을 주는 일)까지 하며 활자의 주조를 진행시켰으나, 5월에 심한 가뭄으로 주자도감이 혁파되었다. 이때 주성된 활자의 수량이 얼마나 되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이를 흔히 병자자(丙子字)라 일컫고 있다.
그런데 『중종실록』 14년 7월에는 외방(外方)의 향교에 서적이 너무 없어 책을 판매하는 서사(書肆)를 설치하고 그 책을 찍어낼 활자를 주조하여야 한다는 요청에 이어, 소격서(昭格署) 및 외방 사찰의 유기로 주자를 만들어 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사는 『동각잡기 東閣雜記』에도 보이며, 이것을 기묘자(己卯字)라 한다. 그러나 이 계통의 활자본을 두루 조사해 보면 같은 글자에 차이가 있는 것이 있지만, 그 글자체는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따라서 기묘자를 새로운 글자체의 활자로 여기지 않고 1516년에 주조하다 중단하였던 병자자의 보주로 보는 경향이 짙다. 글자모양이 경자자와 비슷하여 양자의 식별에 착각이 있음을 볼 수 있으나, 글자 획이 가늘고 글씨의 박력이 그보다 훨씬 못하다.
16세기 후반기인 선조 때 와서도 새로운 활자가 주성되었다. 재주갑인자인 경진자 이외에 사서를 비롯한 『소학』 · 『효경』 등의 국역본을 찍어내는 데 이용되었던 한자 및 한글활자이다. 이 경서의 국역본은 1588∼1590년까지의 사이에 인출되었는데, 그 인출에 사용된 활자가 언제, 어디서, 누구의 글씨체를 바탕으로 주조되었는지는 기록이 자세하지 않다.
종래 이를 경진자(庚辰字) · 방을해자(倣乙亥字) · 한호자(韓濩字) 등으로 다양하게 불러왔지만, 모두 정확한 고증을 바탕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이 활자는 오로지 경서 국역본의 인출에 사용되었으므로 경서자로 부르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 다음으로 인력주자(印曆鑄字)가 있는데, 이 활자는 임진왜란 때 유성룡(柳成龍)이 도체찰사가 되어 전란을 지휘, 명령한 것을 수기(手記)한 『대통력 大統曆』을 찍은 것이다.
그 재료는 무쇠로 여겨지며, 연주활자(連鑄活字)가 많이 쓰인 것이 특징이다. 조선 전기에 고도로 발달해 온 활자인쇄시설은 임진왜란을 겪는 사이에 완전히 파괴 또는 소실, 약탈되었다. 난중에 입은 피해로 오랫동안 혼란이 지속되고 물력의 결핍으로 세태가 안정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활자를 새로 주조하여 책을 찍어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해 흩어진 옛 활자를 모아 목활자로 보충하여 사용했지만, 그것으로는 필요한 책의 수요를 도저히 충당할 수 없었다.
훈련도감에서 자급자족의 한 방법으로 목활자를 만들어 책을 찍어 판매하여 경비의 일부를 충당하려는 대책이 강구되었는데,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바로 훈련도감자(訓鍊都監字)이다. 이 활자에 의한 인쇄는 선조 말기부터 시작하여 인조 때까지 이루어졌는데, 갑인자체 · 경오자체 · 을해자체 · 갑진자체 · 병자자체 등을 본뜬 나무활자이다.
임진왜란 후 1618년(광해군 10)에 무오자(戊午字)가 처음으로 주조되기는 하였으나, 극히 작은 규모인 데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탕진되어 몇 종의 인본이 전해질 뿐이다. 또 인조 때에는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목활자의 사용기간이 더욱 길어졌다. 1648년 5월에 인출된 『찬도호주주례 纂圖互註周禮』의 발문에 의하면, 세태가 수습된 인조 말기부터 일국의 인쇄사업이 옛날과 같이 다시 교서관으로 돌아왔다.
전날 훈련도감에서 경험을 쌓았던 장인들도 이 시기부터는 교서관으로 소속되어 인쇄업무에 종사하였다. 교서관이 맡아 찍어낸 초기의 책은 주로 을해자체를 본뜬 목활자로 찍어냈으나, 효종 후반기부터는 필서 또는 행서체의 목활자가 혼용되기 시작하였다. 이 목활자를 전기교서관필서체자(前期校書館筆書體字)로 총칭한다. 이 활자는 1668년(현종 9) 무신자(戊申字)의 대대적인 주조로 주자인쇄가 다시 부활되기 이전까지 사용되었다.
임진왜란 후에는 그 밖에도 넓은 의미에 있어서의 실록자(實錄字)가 나무로 만들어져 역대실록을 비롯한 『선조실록』 · 『인조실록』 · 『효종실록』의 인출에 사용되었다. 각 실록활자의 크기와 글자체가 서로 다른 점에서 각각 선조실록자 · 인조실록자 · 효종실록자로 나누어 일컫기도 한다. 그리고 이 무렵 공신도감에서도 목활자로 녹권(錄券)과 회맹록(會盟錄) 등을 찍어냈음이 기록에 나타난다. 이를 공신도감자(功臣都監字)라 일컫는다.
주자인쇄가 부활된 이후, 숙종시대로 들어서면서부터는 활자가 양산되기 시작하였다. 1677년(숙종 3)에는 『현종실록』을 찍어내기 위하여 전용의 동활자를 마련하였는데, 이를 현종실록자라 일컫는다. 이 활자는 민가의 낙동계(洛東契)에서 구한 3만여 개의 활자에 1만개를 더 주조하여 보태고 명칭한 것이다.
또, 숙종 초기에는 교서관이 명조체의 간본을 바탕글자로 삼고 인서체철활자(印書體鐵活字)를 주성하였다. 금속활자에 인서체가 적용된 것은 이것이 최초이다. 그 재료가 철이기 때문에 주조가 까다로워 획이 좀 굵고 거친 편이다. 그리하여 경종 초기에 다시 주조를 시도하여 가로획을 가늘게 하고 인서체다운 모양을 갖추게 하였다. 이를 전기 및 후기 교서관인서체자 또는 운각인서체자로 각각 구분하여 부르고 있다.
숙종 초기에는 개인까지도 동활자를 주조하였다. 무신자의 주조를 주관하였던 김좌명(金佐明)의 아들 김석주(金錫胄)가 한구(韓構)로 하여금 바탕글자를 쓰게 하여 주조한 활자가 있다. 독특한 소형 필서체이며, 초주 한구자(韓構字)로 명칭하고 있다. 정부가 1695년에 이를 사들여 사용하여 오다가, 1782년(정조 6)에 재주하고, 1858년(철종 9)에 삼주하였으며, 그 실물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숙종 때에는 그 밖에도 1676년 무렵에 교서관왜언자(校書館倭諺字)를 주성하여 『첩해신어 捷解新語』를 찍어냈고, 1688년 무렵에는 ‘교서관필서체자(校書館筆書體字)’를 만들어 『기아 箕雅』 등의 책을 찍어냈다. 이를 ‘후기교서관필서체자’라 일컫는다. 그리고 1692년에는 원종자(元宗字)를 주조하여 『맹자대문 孟子大文』과 그 국역본을 찍어냈다.
뿐만 아니라 숙종 때부터 영조 때까지의 사이에는 각종의 목활자가 만들어져 많은 책의 인쇄에 사용되었다. 영조 때의 것 중 특기할 것은 도활자(陶活字)의 인쇄이다. 이재항(李載恒)이 통제사로 황해도 황주병영(黃州兵營)에 있었던 1729년(영조 5) 6월부터 다음해 9월까지의 사이에 도자기를 만드는 흙으로 활자를 만들어 책을 찍어냈다.
정조가 집정할 때부터는 문예진흥정책에 치중하고 역대 선왕의 인쇄정책을 계승, 발전시키는 데 힘썼기 때문에 조선 후기 활자인쇄문화를 더욱 찬란하게 꽃피게 하였다. 정조는 동궁으로 정사를 돕고 있었을 때 임진자의 주조에 이어 방홍무정운대자(倣洪武正韻大字)를 만들었고, 즉위한 뒤에는 정유자 · 재주한구자, 조윤형(曺允亨)과 황운조(黃運祚)의 글씨를 자본으로 한 춘추강자(春秋綱字) 등을 차례로 만들어 활자인쇄를 성행하게 하였다.
그리고 후기에는 청나라와의 인쇄문화 교류를 통하여 새로운 자양(字樣)의 활자를 만들어 내는 데 역점을 두었다. 청나라는 18세기 후반기에 무영전(武英殿)에서 목활자를 만들어 사고전서(四庫全書)를 비롯한 많은 책을 찍어냈는데, 그 일을 청나라에 귀화한 우리 나라 사람의 후손인 김간(金簡)이 주관하였다. 따라서 활자인쇄에 대한 개괄적인 지식은 활자왕국이자 모국인 우리 나라에서 얻었고 자신 있게 맡아 운영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우리 나라에서는 청나라의 흠정무영전취진판정식(欽定武英殿聚珍板程式)의 도입에 이어 1790년(정조 14)과 1791년 두 차례에 걸쳐 목활자를 사들였는데, 연무목자(燕貿木字)가 바로 그것이다. 그 뒤 새로운 자체의 활자가 만들어졌다. 1792년에 내각이 교정한 『오산집 五山集』을 기영(箕營)에 보내어 중국 취진당자(聚珍堂字)의 방법을 본떠 목활자를 만들어서 찍어내게 하였다. 이것이 최초의 적용이며, 이를 기영목활자(箕營木活字)라 일컫는다.
이어 그 해 윤4월 24일에는 내각이 새로 꾸미기 시작한 『취진자보 聚珍字譜』라는 활자보를 완성하고 기영에 보내어 16만 자를 만들게 하였다. 또 그 해 6월 29일에는 내각에 명하여 나무자의 자본을 만들게 하였다. 어제(御製)를 찍고자 평안감영에 동으로 자본을 만들게 하려 하였다가 그 재료를 나무로 바꾸어 내각에 명한 것이다.
그리고 그 해에 중국의 사고전서에 들어 있는 취진판식 『강희자전 康熙字典』의 글자를 바탕으로 삼고 나무활자 32만 개를 만들어 냈는데, 이를 생생자(生生字)라 일컫고 있다. 그 새김이 정교하고 글자체가 아름다워 1795년에는 이를 자본으로 하여 동활자를 주성하였다. 정리자(整理字) 또는 그 해의 간지를 따서 을묘자(乙卯字)라 일컬으며, 크고 작은 활자를 합쳐 30만 자였다. 이 정리자에 있어서도 한글활자가 만들어져 병용되었다.
1857년(철종 8) 10월에는 주자소에 불이 나서 정유자 · 초주정리자 · 재주한구자 등이 소실되어 다음해에 정유자를 제외하고 다시 주조하게 하였다. 그것을 재주정리자 · 삼주한구자라 일컬으며, 그 실물이 지금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 간직되어 있다. 관서에서의 활자주조는 위에서 설명한 것이 마지막이다. 학부 편집국이 1895년(고종 32)부터 몇 해에 걸쳐 개편, 인출한 교과서에는 목활자가 사용되었다. 이것을 학부목활자(學部木活字)라 한다.
관서의 목활자 인쇄로는 그 밖에도 관상감이 인행하여 온 책력이 있고, 지방의 여러 관서가 다양하게 인출하여 온 목활자본이 전래되고 있다. 근대의 신식연활자(新式鉛活字)는 1880년 일본에서 최지혁(崔智爀)의 글씨에 의거해서 만들어 『한불자전 韓佛字典』을 찍어낸 것이 그 효시라 전하여진다.
그 다음해에는 『한어문전 韓語文典』과 『텬쥬셩교공과』가 인출되었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1883년 일본으로부터 도입됨과 동시에 박문국(博文局)이 설치되었고, 그 이후 신문과 서책이 비로소 인출, 보급되었다. 그에 따라 옛 활자의 사용이 점차로 줄어들었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20세기 전기까지 명맥을 유지하면서 우리 전통문화 전파의 한몫을 맡아 왔다.
조선시대에는 중앙관서의 활자인쇄가 크게 발달하였지만, 인출 부수에 제한을 받아 지방과 민간에까지 두루 보급하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 결과 지방의 서원 · 사찰과 같은 사사기관은 물론, 특권층에 있는 개인과 민간인들이 도처에서 활자를 만들어 필요한 책을 수시로 찍어 각계각층의 수요를 충당해 주었다.
현재까지 알려진 전본 중 오래된 것으로는 15세기 중기 무렵으로 추정하고 있는 사찰판 목활자본이다. 그 목활자본은 교장 계통의 불서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활자체는 을유자를 방불케 한다. 서원의 활자인쇄는 16세기에 이루어진 것이 오래된 것으로 나타난다. 성주(星州)의 임고서원(臨皐書院), 서천(舒川)의 명곡서원(鳴谷書院), 인동(仁同)의 오산서원(吳山書院)이 찍어낸 목활자본이 이에 해당한다.
그 중 명곡서원이 1581년에 찍어낸 『표제구해공자가어 標題句解孔子家語』와 『신간소왕사기 新刊素王事記』의 권말에는 목활자를 새긴 각수를 비롯한 인출자 · 교정자 및 간행사항이 표시되어 있어 서원의 활자본 연구에 크게 도움이 된다. 이 활자는 갑진자체를 닮게 만든 목활자인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옥산서원(玉山書院) 소장의 『맹자대문』 목활자본에 적혀 있는 간기를 보면, 1600년에 경주부가 노강서원(盧江書院)의 활자를 사용하여 찍어냈음이 밝혀지고 있다. 서원에서 만든 활자이지만, 도처로 가지고 다니며 인쇄하였음을 입증해 주는 한 사례가 된다.
서원이 근세에 이르기까지 활자로 책을 찍어낸 기록은 빈번하게 나타난다. 그 중 노봉서원(露峰書院)에서는 1799년에 정리자를 본뜬 인서체목활자로 책을 찍어냈고, 옥계서원(玉溪書院)에서는 1830년에 필서체목활자로 책을 찍어냈음이 밝혀지고 있다. 필서체의 목활자는 그 종류가 다양하며, 그 뒤에도 몇몇 서원에서 책을 찍어냈음이 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지방의 목활자본 가운데에는 관직 또는 특권층에 있었던 개인들이 활자를 만들어 찍어낸 사가(私家) 목활자본도 16세기 이후 근세에 이르기까지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들 목활자 중 임진왜란 이전의 것에는 관주활자인 갑인자 · 을해자 · 을유자 · 갑진자 · 병자자 등의 자체를 본뜬 것이 주로 나타나고, 그 이후에는 각종의 필서체 또는 인서체가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인서체는 교서관인서체 · 정리자체 · 전사자체 중 어느 하나를 닮게 만든 것이 특징이다.
16세기에 사가에서 만든 목활자로 찍어낸 책 중 활자의 새김이 잘 되어 글자체가 단정하고 인쇄가 정교하고 선명한 것은 정사룡(鄭士龍)의 『호음잡고 湖陰雜稿』이다. 이 활자의 인본이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유일하므로 호음자라 일컫는 이도 있다. 이 책은 당시의 사가활자인쇄술의 발전을 입증해 주는 점에서 귀중한 인쇄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장혼(張混)이 만든 필서체 소형목활자 또한 중요하다. 현재까지 알려진 초기의 인본은 1810년(순조 10)에 인출된 『당률집영 唐律集英』 · 『근취편 近取篇』 · 『몽유편 蒙喩篇』 등이 있으며, 그 뒤 『시편 詩篇』을 비롯한 각종의 시문이 잇따라 순조 연간에 인출되었다. 이 활자는 그가 죽은 뒤에도 철종 · 고종 연간에 많은 도교 계통의 책을 비롯하여 약간의 문집과 의서의 인출에 사용되었다.
이이엄자(而已厂字) 또는 장혼자(張混字)라 일컬어지고 있으며, 민간활자로서는 정교하고 인상적이다. 순조 때는 고위관직에 있던 관리와 권세를 전횡하였던 외척 등의 개인들이 청나라의 무영전 취진판의 영향을 받고 사사로이 활자를 만들어 냈다. 그 중의 하나가 필서체취진자(筆書體聚珍字)이다. 남공철(南公轍)이 관각(館閣)의 요직을 주재하고 있었을 무렵, 그의 중국 취진판에 대한 취미와 호기심이 마침내 이러한 활자를 만들어 내게 하였다.
그 활자는 그의 자저(自著)인 『금릉집 金陵集』에 1815년의 개인(開印)임이 표시되고 있으므로, 그해의 제작임을 알 수 있다. 청나라의 취진판식을 본떠 목활자를 만들어 중국 종이를 사용하여 찍어내고, 중국 장정으로 장책하였다. 이 활자로 찍어낸 인본은 자신의 저서를 비롯한 친지의 저서 약간만이 있을 뿐이다. 남공철이 자신의 취미와 호기심에서 만든 활자로 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활자를 처음에는 단순히 취진자로 이름하였다. 그것은 같은 활자로 찍은 『보만재집 保晩齋集』의 책머리에 그 용어가 표시된 데서 연유한 것이다. 그러나 취진판은 활자판을 뜻하는 일반적 명칭으로서 다른 글자체의 활자본에도 쓰이고 있으므로 고유명칭은 될 수 없다. 이 활자는 파임에 굴곡상향성(屈曲上向性)의 특징을 나타내 주고 있는 점에서 취진자의 용어를 쓴 다른 활자본과는 곧 식별이 된다.
순조 때 사사로이 만든 활자 중 또 들어야 할 다른 하나는 인서체취진자인 전사자(全史字)이다. 이것은 박종경(朴宗慶)의 중국취진판에 대한 호기심이 주성해 낸 것이다. 이것은 그의 호를 따서 돈암인서체자(敦巖印書體字)로 부르기도 한다. 주조가 자못 정교하여 글자체가 작으면서도 균정하고 섬세한 인서체이다.
그 초인본은 1816년에 찍어낸 그의 아버지 문집인 『금석집 錦石集』이며, 잇따라 세고(世稿) 등이 나왔다. 이 활자는 본시 개인이 주관하여 주조한 것이므로 처음에는 사유에 속했던 것이나, 철종 무렵부터는 이곳 저곳으로 옮겨지면서 민간인쇄에 이용되었다. 대원군이 집정할 때에는 운현궁으로 몰수하여 인쇄에 사용하였다. 여기서 운현궁활자(雲峴宮活字)의 별칭이 생겨났다.
대원군의 집정 무렵과 그 뒤에 나온 약간의 관리용 정서류(政書類)를 제외하면 거의가 개인이 엮었거나 저술한 책들이며, 도교와 불교 서적도 적지 않게 들어 있다. 대한제국시대까지 비용을 받고 민간이 필요한 책들을 인쇄하여 널리 보급하여 주었으며, 민간인쇄에 기여한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지방의 인쇄문화는 지방관서와 사찰이 싹트게 하여 사가의 문집 · 족보 및 교육용 각종 교재 등의 인쇄를 촉진시켰고, 나아가서 상업을 목적으로 하는 민간수요서의 인쇄 · 보급 및 확산의 단계로 발전을 보게 하였다. 그 인쇄의 수단은 목판이 아니면 목활자에 의하였다. 그 중 목활자는 그 종류가 다양하였으나, 오래 사용하면 마멸이 생겨 조잡해졌다. 그 결과 민간에서도 주자인쇄가 시도되었으며, 그것이 마침내 상업적인 면에서 실천을 보게 되었다.
1802년에 나온 『문곡연보 文谷年譜』를 보면 정리자체철활자(整理字體鐵活字)로 찍혀지고 있으며, 초기의 인본인 듯 비교적 정교하다. 그 활자의 명칭을 전주의 희현당자(希顯堂字)로 부르기도 하나, 그 고증내용은 언급하지 않았다. 이 활자는 고종 때 이르기까지 호남지방을 비롯한 서울에서 많은 책을 찍어내는 데 이용되었기 때문에 그 전본(傳本)이 적지 않다.
도처에 가지고 다니면서 많은 책을 찍어 준 주자는 그 밖에도 필서체철활자가 있다. 순조 때부터 고종 때까지의 사이에 주로 민간의 문집 · 족보 · 교재 및 여러 일용잡서를 찍어내는 데 이용되었다. 누가, 언제, 처음으로 주조하였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1859년에 찍어낸 『동래정씨파보 東萊鄭氏派譜』의 후록(後錄)을 보면 ‘활자주인 백기환(活字主人 白琦煥)’이 표시되어 있고, 그가 정기증(鄭基曾)의 집에 가서 족보를 인출할 때 주인으로서 택자인(擇字人)의 구실을 하였음이 명시되어 있다.
소유주가 활자를 이곳 저곳으로 가지고 다니면서 비용을 받고 책을 찍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활자로 찍은 책 중 1837년에 나온 『의회당충의집 義會堂忠義集』의 권말에 ‘교서관활인(校書館活印)’의 인출기록이 있는 것에 의거하여 교서관철활자로 이름 붙인 경우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인출기록만을 뒤에 다른 목활자로 추인(追印)하였다는 사실을 먼저 인식하여야 하고, 민간활자인 정리자체철활자의 인본 중에도 성균관의 비천당에 와서 책을 찍어주고 ‘비천당간인(丕闡堂刊印)’을 표시한 것이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이것이 바로 상업성을 띤 민간활자인쇄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 활자는 그 뒤 1897년에 『선원속보 璿源續譜』의 인출에 사용되었다. 그 무렵에 궁내부(宮內府)가 민간 소유의 활자를 사들였거나 세내어 쓰다가 나라의 주권을 잃게 되자 총독부가 그대로 인수하고 그것이 그 뒤 박물관으로 넘어가 오늘에 이른 듯하다. 이와 같이 민간이 철활자까지 만들어 주로 민간이 필요로 하는 책을 영리의 목적으로 찍어 서민의 독서와 면학의 저변을 확대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음은 인쇄문화사에 있어서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조선시대의 관판본은 활자인쇄에 의한 것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활자인쇄는 인출 부수에 제한이 있었기 때문에 전국에서 요구되는 책을 넉넉히 공급하여 줄 수 없었다. 그 결과 목판인쇄가 촉진되었다.
더욱이 조선의 건국이념인 숭유우문정책을 적극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유교경전을 비롯한 역사 · 시문 계통의 서적을 전국적인 규모로 펴내야 했다.
또한 주자소에서 찍어낸 활자본, 또는 중국에서 도입한 책을 번각 또는 판각하여 그 책판을 잘 간직하면서 필요한 경우 언제라도 찍어내어 두루 공급해 주어야 했다. 국초에 시작된 목판인쇄가 활기를 띤 것은 세종이 즉위한 때부터였다.
세종은 왕위에 오르자 1419년 명나라에서 거질의 영락판(永樂板) 『성리대전 性理大全』 · 『사서대전 四書大全』 · 『오경대전 五經大全』을 수입하고, 그 대전을 간행, 보급하기 위하여 1425년에는 명나라에 청하여 사신 김시우(金時遇)가 돌아올 때 번각용으로 그 대전을 한 벌 더 가져오게 하였다. 이렇게 준비를 갖추고 1426년부터 그 간행에 착수하였는데, 그 중 『성리대전』이 1427년 경상도에서 일차로 간행되었다.
이어 1428년까지의 사이에 강원도에서 『사서대전』, 경상도에서 『주역』 · 『서대전』과 『춘추대전』의 일부, 전라도에서 『시대전』과 『춘추대전』의 일부가 각각 간행되었다. 그리고 『예기대전』은 1429년에 전라도에서 새겨낸 것으로 기록에 나타난다.
그 전래본을 보면 왕명으로 간행된 것이기 때문에 어느 것이든 새김이 대체로 정교하다. 종이도 정성껏 떠서 튼튼하고 먹색도 시커멓게 윤이 나서 선명하다. 비록 번각본이지만 조선 초기의 지방관서의 목판인쇄술을 살펴볼 수 있는 인쇄자료이다.
중앙관서에 있어서의 목판인쇄는 주로 주자소와 교서관, 그리고 정조 때 규장각이 설치된 이후 그 본원인 내각(內閣) 등이 담당해 왔다. 그뿐만 아니라 특정 주제 분야의 전적은 그 용도에 따라 특수한 여러 관서, 이를테면 춘방(春坊) · 관상감 · 사역원 · 내의원 · 장악원 · 군기시 · 종부시 등이 맡아 간행해 왔다. 이러한 중앙관판본은 어느 것이나 판각이 정교하고 인쇄가 깨끗한 편이다.
그 중에서도 교서관장판과 내각장판에서 찍어낸 책은 그 품이 자못 뛰어나며, 조선시대의 정각본(精刻本)을 대표한다. 지방관서의 목판인쇄는 국초부터 이루어졌으며, 특히 세종 이후 점차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중앙관서가 요구하는 것은 물론 자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수시로 판각하고 그 책판을 오래 잘 간직하며, 필요한 이들이 언제라도 찍어내어 이용할 수 있게 하였다.
임진왜란 이전에 이루어진 지방관판은 『고사촬요 攷事撮要』의 팔도정도(八道程途)에 수록되고, 임진왜란 이후의 지방책판이 수록된 것은 『고책판소재고 古冊板所在攷』이다. 이는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기까지 판각한 책판을 주요 개판지별로 적은 것이다.
1759년에는 충청 · 전라 · 경상 · 함경의 각 도에서 새겨낸 책판을 조사하여 엮은 『삼남책판목록 三南冊板目錄』, 그리고 1791년(정조 15)에는 이를 다시 조사하여 엮고 개제(改題)한 『오거서록 五車書錄』이 있다. 이들 책판 목록은 주로 영조 · 정조시대의 삼남지방 관판을 연구하는 데 크게 참고가 된다.
1796년에는 규장각의 각신 서유구(徐有榘) 등이 중앙 및 지방의 공사장책판(公私藏冊板)을 포괄적으로 조사하여 『누판고 鏤板考』라는 책판을 엮어냈다. 이것은 가장 포괄적으로 신빙성 있게 조사된 책판 목록이며, 조선 후기의 목판인쇄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서지자료의 구실을 하고 있다.
19세기 중기에 8도의 주요 지방에서 판각된 책판을 조사, 수록한 것으로는 『각도책판목록 各道冊板目錄』 또는 『제도책판목록 諸道冊板目錄』이 있다. 지방관판의 인쇄는 그 정교도가 중앙관판에 미치지 못하나, 사사기관 및 개인들의 사판(私板)과 방각판(坊刻板)보다는 그 새김과 인쇄가 훨씬 나은 편이다. 이와 같이 목판본은 그 판각처의 여하에 따라 인쇄의 정조도(精粗度)가 크게 좌우되었다.
조선시대 불서의 목판인쇄는 두 가지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국왕의 명령으로 나라에서 찍어낸 불서이고, 다른 하나는 대군과 왕비들이 왕실에서 찍어낸 불서이다. 국왕 자신 또는 왕실이 주관하여 불서를 간행한 것은 조선 왕조가 건국된 직후인 15세기 초기부터 말기까지의 1세기 사이가 된다.
조선은 건국하여 숭유억불정책을 국시로 삼았지만, 건국 초의 왕들은 본시 개인적으로 숭불심이 두터웠기 때문에 불경의 전사(轉寫)와 간행은 물론 불사(佛事)에까지 참여하였다.
1399년에 상왕인 태조가 사재로 찍어낸 거질의 대장경은 그의 공덕이 깃들인 인경사업이었다. 그리고 초기에 판각된 불서 중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대자능엄경 大字楞嚴經』도 태조의 발원으로 신총(信聰)이 정서하여 1401년에 간행한 것인데, 인쇄가 정교하고 형태가 커서 참으로 아름답고 늠름하다.
세종도 처음에는 불교를 멀리하는 정책을 썼으나 중년부터는 점차 관심을 갖고 여러 불사를 묵인하기 시작하였다. 소헌왕후(昭憲王后)가 죽은 1446년에는 재불(齋佛)에 직접 참여하였고, 명복을 빌기 위하여 불경의 전사와 편찬, 인출에 착수하게 하였다.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의 국문판 활인본은 그 주된 사례가 된다.
그리고 말년에는 내불당(內佛堂)을 짓고 불상을 조성하였는데, 이때 사리 출현의 상서가 있었음을 적은 『사리영응기 舍利靈應記』를 1450년 갑인자로 찍어냈다. 세종은 또한 그 해 2월에 동궁의 수종질환의 치유를 위하여 『화엄경』을 목판, 『법화경』을 갑인자로 각각 30부 각인해 냈다. 세종 연간에는 책 인쇄의 성행으로 국산 닥종이가 달렸는데, 이 간인본은 수입한 왜닥종이로 찍어내어 이채롭다.
왕비와 대군들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간행한 불서 중에는 태종의 넷째 왕자인 성녕대군(誠寧大君)과 그의 비인 원경왕후(元敬王后)의 명복을 기원하고자 인순부윤(仁順府尹) 성억(成抑)이 성달생(成達生) 형제에게 쓰게 하여 1422년에 새겨낸 『법화경』이 전래되고 있다.
그리고 효령대군(孝寧大君)은 숭불심이 돈독하여 조카인 안평대군과 더불어 『법화경』의 간행을 발원하고 1448년(세종 30)에 완성시켰는데, 그 책 끝에는 안평대군이 정성껏 써서 새긴 발문이 붙어 있다.
효령대군은 조카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수양대군은 안평대군과 더불어 세종 때 진행된 불서편찬인행과 불교행사에 주동적인 구실을 하여왔지만, 그가 임금의 자리에 오른 뒤부터는 그것을 본격적으로 촉진시켰다. 세조의 간경(刊經)은 1457년에 왕세자를 잃은 뒤부터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내경청(內經廳)을 설치하고 저명한 승려와 유신을 모아 불경의 서사와 교정을 맡게 하였다. 사경(寫經)은 당대의 명필가 강희안 · 성임(成任) · 안혜(安惠) 등이 맡아 금니 또는 먹으로 썼고, 교정은 고승들이 맡아본 다음 주자소로 보내어 활자로 찍어내게 하였다.
또, 거질의 대장경과 『화엄경』은 목판에서 각각 1부를 인성하게 하였다. 그러더니 그 해에 또다시 대장경 50부의 인출을 계획하고 그에 소요되는 방대한 양의 종이를 충청 · 전라 · 경상 · 강원 · 황해의 5도 관찰사에 배정하여 만들게 하였다.
그 준비가 완료되자 다음해인 1458년 2월에 인출을 시작하여 6월에 마쳤다. 이때 인출된 대장경을 국내의 명산복지(名山福地)의 사찰에 두루 봉안하고 그 전법(傳法)에 이용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끊임없이 요구해 오는 일본과 유구(琉球) 등의 외국에까지 대량으로 반사하여 불교문화를 전파한 점이다.
세조의 이러한 적극성은 마침내 불서를 국역으로 간행하는 단계까지 되었다. 그 첫 사업은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의 국역내용을 바로잡고, 깁고, 보태어, 간행하는 일이었다. 그것이 1459년에 『월인석보 月印釋譜』의 제목으로 간행되었으며, 그 뒤에도 여러 사찰에서 무수하게 복각, 전파되었다.
이와 같이 토대를 다져 온 세조는 그 국역간행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시키기 위하여 1461년 6월에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였다. 비록 일시적인 관서였지만, 고려시대의 교장도감과 대장도감을 본떠서 중앙에 도감을 두고 개성부 · 전주부 · 남원부 · 안동부 · 상주부 · 진주부 등에 많은 분사(分司)를 두었다.
이 도감은 세조가 죽은 뒤 유신들의 혁파 상소가 계속되어 1471년 12월에 마침내 폐지되고 말았다. 이로써 왕이 주관하던 불서인쇄는 종지부를 찍게 되었는데, 간행된 국역불서로는 『능엄경언해』 · 『법화경언해』 · 『아미타경언해』 · 『금강경언해』 · 『선종영가집언해』 · 『반야심경언해』 · 『원각경언해』 · 『목우자수심결언해』 · 『법어언해』 등이 알려지고 있다.
이들 책의 글자는 당대의 명필가인 황오신(黃伍信) · 안혜 · 유환(柳晥) · 박경(朴耕) 등이 모두 동원되어 육중한 송설체로 정서하였다. 그 글자의 도각은 정교하고 먹색은 진하게 윤이 나며, 종이는 닥에 고절(藁節) 또는 모맥절(麰麥節)이 섞여 있는 것을 사용한 것 등이 간경도감본의 특징이다. 그리고 간경도감의 한자본은 주로 불경의 장소(章疏)를 간행한 것이 또한 그 특징인데, 그 중에는 고려의 교장본을 번각한 것과 새로 판서본을 마련하여 새겨낸 것이 섞여 있다.
성종 때에는 왕실판의 간행이 자못 활기를 띠었다. 그 중에서 특기할 만한 것을 든다면 정희대왕대비(禎禧大王大妃)와 인수대왕대비의 인경활동이다. 정희대왕대비는 승천한 선왕들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1470년(성종 1)에 큰자의 『법화경』을 간행하고, 1474년에 역시 큰자의 『상교정본자비도량참법 詳校正本慈悲道場懺法』 · 『예념미타도량참법 禮念彌陀道場懺法』을 간행하였는데, 모두 당대의 일류각수를 총동원하여 새겨냈기 때문에 참으로 정세 미려하다.
그리고 1482년에는 학조(學祖)로 하여금 세종의 유명으로 계속 검토해 온 국역본 『금강경삼가해 金剛經三家解』를 정축자, 『영가대사증도가남명선사게송 永嘉大師證道歌南明禪師偈頌』을 을해자로 각각 500부씩 찍어 널리 베풀었다. 국역활자본은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1472년 인수대비는 승천한 선왕들의 명복을 추천(죽은 사람을 위해 공덕을 베풀고 그 명복을 빎)하고 전하와 왕비들의 수복을 빌기 위하여 무려 29종의 경판에서 2,815부를 찍어내고, 각 책 끝에 제일(齊一:똑같이 가지런하게)하게 갑인소자의 발문을 붙여 널리 펴냈다.
또 1485년에는 성종의 연수(延壽)를 기원하기 위하여 『불정심다라니경 佛頂心陀羅尼經』과 『오대진언집 五大眞言集』에 도상(圖像)을 넣어 우아하고 섬세하게 새겨냈다. 이 도상들은 판화미술로도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1495년에는 정현왕후(貞顯王后)와 함께 승하한 성종의 극락천도를 위하여 원각사(圓覺寺)에서 대대적으로 인경(印経)하고 목활자로 발문을 제일하게 찍어 널리 펴냈다. 이것 또한 모두 정교한 간인본들이다.
이어 다음해인 1496년(연산군 2)에는 내탕(內帑)으로 한자와 한글 목활자인 인경자를 정성껏 만들어 국역판 『육조법보단경 六祖法寶壇經』과 『진언권공 眞言勸供』 등을 찍어냈다. 이 국역본은 동국정운식 주음(注音:으뜸음)을 벗어나 시음(時音)으로 번역한 점에서 국어학 연구상 귀중한 자료로 손꼽힌다.
이렇게 활기를 띤 왕실판은 인수대비가 1504년에 죽자 도승법(度僧法)과 원각사가 폐지됨과 아울러 억불정책이 실시되어 왕실의 인경에 마침내 종지부를 찍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국왕 또는 왕실판은 나라 또는 왕실의 비용으로 공을 들여 정성껏 새겨냈기 때문에 그 정교도는 중앙관판보다 오히려 나은 편이고 또 우리의 독자성을 지닌 판본과 국역본이 많은 것이 그 특징이다.
조선왕조가 건국하자 숭유억불정책을 썼지만 숭불심에 깊이 젖은 민간인들은 여전히 사찰을 찾아 시주하고 국초부터 많은 불경을 간행해 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사찰판 불서 중 국초의 사찰본은 대체로 고려본을 번각한 것이며, 간혹 독자적인 판본이 있을 뿐이다. 15세기 초기부터는 조선시대의 독자적인 판본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405년(태종 5)에 안심사(安心寺)에서 간행한 『법화경』은 명필가인 성달생이 그의 아우 성개(成槪)와 함께 써서 판각한 것이다. 글씨가 독특한 필체의 중간자로서 그 모양이 예쁘고 균정하다. 또한 새김이 정교하고 종이도 상품의 닥을 얇게 뜬 인경지(印經紙)를 사용하고 있다. 그 밖에도 성달생이 쓴 판각용 정서본에 의거해 새겨낸 『법화경』은 1422년(세종 4)과 1443년에 간행한 두 종의 별본이 있다.
이 두 책은 판식이 비슷하고 지질도 얇은 상품의 닥종이이다. 성달생의 글씨로 된 책은 1424년에 그가 평안도관찰사 겸 출척사의 직에 있었을 때 쓴 것을 새긴 『육경합부』가 있고, 1429년부터 1432년까지의 사이에 쓴 것을 새긴 『능엄경』이 있다.
이 책들은 그 뒤 여러 차례에 걸쳐 번각되었다. 그리고 15세기 전반기에는 황진손(黃振孫)의 글씨를 창민(唱敏)이 새긴 『법화경』도 있다. 글씨체가 성달생의 그것과 비슷하나, 자세히 조사해 보면 차이점이 발견된다. 그 밖에도 성거(省琚) · 최사립(崔斯立) · 공암(空菴) 등의 글씨를 새긴 불서도 있다. 이것들은 모두 독자적인 사찰본이다.
그러나 16세기 이후에는 국초부터 국왕과 왕실이 간행한 목판 및 활자판 불서를 비롯하여 사찰이 간행한 각종의 불서를 그대로 번각한 것들이 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조선 전대의 사찰판 불서에 대하여 도서인쇄사적인 시각에서 그 성격과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불서에는 시대와 관련된 판본의 계통적 성격이 비교적 잘 나타나고 있다. 조선 초기의 목판 불서는 대체로 고려본 계통의 번각으로 나타나는데, 이를 세분해 보면 송본계 · 원본계 · 독자계의 고려본을 번각한 것으로 가름된다.
15세기의 불서는 성달생 · 황진손 · 성거 · 최사립 · 공암 등의 글씨체 판본을 비롯하여 국왕 및 왕실 간행의 판본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당대의 명필가들이 써서 새긴 독자적인 판본 계통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16세기 이후부터 조선 말기까지의 사이에 나온 판본은 독자적인 판본계의 번각이 대부분이고, 간혹 명간본과 청간본의 번각도 나타난다. 그리고 이 시기에 나온 판본 중 독자성을 띤 것으로는 우리 나라 승려의 어록 · 시문 · 잡서를 집록한 문집 등이 약간 있을 뿐이다.
둘째, 조선 전대에 걸쳐 사찰본을 개관할 때 번각본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판각의 솜씨가 고려의 사찰본에 비하면 훨씬 떨어진다. 더욱이 여러 차례에 걸쳐 거듭 번각된 경우는 글자체가 일그러지고 새김이 더욱 조잡하다. 독자적인 성격을 지닌 판본이라 하더라도 그 정성도가 역시 고려의 사찰본에 비하여 훨씬 떨어진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이다.
셋째, 사찰판본에는 책 끝의 간행기록에 이어 그 간경(刊經)의 화주(化主) · 시주질(施主帙) · 연판승(鍊板僧) · 자판승(煮板僧) · 각수승(刻手僧) 등의 역승(役僧)을 표시한 것이 많다. 사찰판에서 주로 볼 수 있는 특징의 하나이다. 이것은 판본의 정확한 고증에는 물론 우리 나라 목판인쇄술의 발달과정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귀중한 자료가 된다.
사찰에서는 주위에서 나무를 베어 판자로 만들어 쪄서 말려 잘 대패질해 판각하고, 또 종이와 먹을 만들어 인쇄한 다음 장책하는 일을 역승들이 스스로 해결해 왔으며, 역승들은 관서와 사가에까지 나가서 조판업무를 수행하여 왔다. 이렇듯 사찰판의 인쇄는 우리 나라 목판인쇄술의 발달에 있어서 중추적인 구실을 해 온 것이다.
조선시대 지방의 사학교육기관인 서원은 1543년(중종 38)에 고려 안향(安珦)의 사당을 옮기고, 그 당 앞에 서원을 세워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으로 이름한 데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서원이 1550년(명종 5)에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사액된 이후, 1554년에는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 다음해에 해주의 수양서원(首陽書院), 그리고 1560년에는 함양의 남계서원(灆溪書院)이 사액되었다.
선조 때에도 계속되어 임진왜란 전까지 도합 13개의 서원이 사액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액서원들은 서적반사의 특혜를 받고 어서각(御書閣)을 세워 잘 간직하며 이용해 왔다. 한편, 서원에서도 자체적으로 필요한 책을 간행하였다. 그러나 서원은 경제적인 여유가 별로 없었으므로 인쇄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전해지고 있는 임진왜란 이전의 기록 중에는 청량서원(淸凉書院)이 1566년(명종 21)에 『근사록집해』와 1568년(선조 1)에 『고사통략 古史通略』을 간행하였고, 성주의 천곡서원(川谷書院)이 1574년부터 그 다음해에 걸쳐 『설문청공독서록요어 薛文淸公讀書錄要語』와 『주자서절요 朱子書節要』를 개간하였으며, 서천의 명곡서원이 1581년에 『표제구해공자가어』를 판각하였음이 밝혀지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서원의 창건과 사액의 수는 늘어났다. 철종 때까지는 무려 650개의 서원이 세워졌으며, 그 중 265개의 서원이 사액되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서원이 이렇듯 증가되었지만 서원에서의 책 간행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역시 부진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간행된 책은 주로 서원과 관련이 있는 일족의 가문과 일파의 문벌을 빛내기 위한 것들이 많다는 평이다.
유가류와 경서류는 서원과 관련 있는 유가의 저술이 아니면 서원의 강학용 자료에 지나지 않으며, 학문탐구를 위한 자료는 별로 간행되지 않았다. 그 이후 1871년(고종 8)에 서원이 훼철되기까지의 사이에 개판된 것을 살펴보아도 서원판의 인쇄가 별로 활기를 띠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가판은 사가에서 조상의 시문집 및 여러 편저물을 자손 또는 후손 그리고 문인들이 비용을 염출하여 찍어내는 데서 비롯하였으며, 그 전통은 고려에서 조선으로까지 이어져 성행하였다. 그 비용은 또한 저자와 교분이 있던 이들의 자손으로부터 그와 관련이 있는 서(書) · 기(記) · 서(序) · 발(跋) · 축제문(祝祭文) 등을 수록해 주고 비용의 일부를 거두어 충당하기도 하였다.
그 간행은 연판장(鍊板匠) · 자판장(煮板匠) · 각수장 · 장책장을 구하여 청부하는 경우도 있지만, 흔히는 근친 · 친척 · 친구 · 문인 중에 지방의 수령으로 부임하여 책을 판각할 때 그 기회를 이용하여 행하(行下:품삯 이외로 더 주는 돈)의 지불 정도로 값싸게 찍어낸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또한 한 씨족이 비용을 거두어 족보를 찍어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사가판은 가문을 빛내고 혈통과 문벌을 자랑하기 위한 데에서 발달하였으며 그 비용을 거두어 값싸게 인쇄한 까닭에 그 품이 일반적으로 빈약하고 조잡한 편이다.
민간인이 영리의 목적으로 판각하여 찍어낸 책을 흔히 방각판(坊刻板)이라 일컫는다. 이 용어는 중국의 남송시대에 서방(書坊)에서 판매 목적으로 책을 목판에 새겨 찍어낸 데서 비롯하였다. 우리 나라의 문헌에서는 서사(書肆) · 방사(坊肆) · 서방(書坊) · 서포(書舖) 등의 명칭을 가진 서점에서 간행, 보급한 용례가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서사는 민간이 경영한 것뿐만 아니라 관서가 경영하려 한 것도 있었으며, 또 책의 생산수단에 있어서도 목판 이외에 목활자와 금속활자를 사용하여 다양하게 찍어냈음이 중국과 비교하여 크게 다른 점이다. 우리 나라에서 현재까지 알려진 자료에 의하면, 민간이 영리 목적으로 책을 판각하여 찍어낸 사례는 16세기 후기에 서울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지방에서는 그보다 뒤에 이루어진 사례를 볼 수 있다. 방각본은 서울에서 싹터 지방으로 점차 파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민간이 장사의 목적으로 책을 간행하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요인이 작용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첫째, 중앙관본의 반사는 종실, 의정부 및 육조의 당상관, 문관 2품 이상이 그 대상이 되고, 그 밖의 문신들에게는 특수한 경우로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책을 공급해 주는 일이 긴요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요구가 민간의 서사를 발생하게 한 하나의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둘째, 관서가 책을 간행하면 반사용을 제외하고 실비로 판매하는 정책도 써왔는데, 활자판의 경우는 기술의 미숙으로 인출 부수에 제한을 받아 그 공급이 넉넉하지 못하였고, 목판의 경우는 새김의 비용과 번잡으로 판각의 종수에 제한을 받아 역시 필요한 책을 충분하게 공급하여 주지 못하였다.
주자소에서 활자로 찍은 책을 일반에게 팔게 한 것은 일찍이 계미자의 인본을 1410년(태종 10)에 판매한 사례에서 볼 수 있고, 교서관과 같이 책의 출판업무를 맡고 있는 중앙관서가 책판을 간직하면서 책을 찍어 일반에게 팔게 한 것은 16세기 후기에 편찬하여 여러 차례 간행한 『고사촬요』의 서책시준(書冊市准)에서 볼 수 있다.
이 서책시준에는 인출에 소요되는 종이수에 이어 면포와 백미로 값이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그 책판의 종수가 워낙 적어 전국에서 요구되는 유생들의 과거시험용 서책을 비롯한 아동들의 교육용 서책, 그리고 일반 서민층들이 필요로 하는 일용잡서의 공급이 절실하게 필요하였던 것이다.
셋째, 관서가 관본의 판매유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그 업무의 전담부서인 서사를 설치 · 운영하고자 한 바 있었는데, 그것이 또한 민간 서사의 발생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중앙관서는 16세기로 접어든 중종 때에 서사를 설치 · 운영하려고 입법과 절목까지 마련한 일이 있었으며, 또 명종 때에도 서사를 따로 세워 책판매를 편리하게 하자는 계청(啓請:임금에게 아뢰어 청함)이 있었으나, 그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였던 듯하다.
이와 같이 관본의 판매유통과정에 있어서 관영의 서사가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함에 따라, 민간 서사의 필요성이 한층 더하여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민간인이 영리의 목적으로 책을 간행한 사례로 가장 앞선 기록은 고 송석하(宋錫夏) 소장의 『고사촬요』 끝장의 간기에 그 책을 새겨낸 해인 1576년(선조 9, 만력 4) 7월의 표시에 이어, “수표교(水標橋) 아래의 북쪽 이제리(二第里) 수문 입구에 있는 하한수(河漢水)의 가각판(家刻板)을 사고 싶은 사람은 찾아오라.”고 새긴 것을 들 수 있다.
이것은 민간인에 의한 각서판매의 행위가 16세기 후기에 서울에서 이루어졌음을 입증해 준다. 그러나 그 뒤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광해군의 폭정, 이괄의 난, 그리고 정묘 · 병자의 호란이 잇따라 일어나서 인조 말기까지는 인쇄가 침체되었다. 겨우 중앙관서가 나무활자로 긴요한 책을 찍어 이용한 정도였다.
이 인쇄기능이 회복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중기 이후가 되므로 방각판의 인쇄도 역시 그 무렵부터 다시 이루어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난(亂) 후에도 오랫동안 책의 인쇄는 중앙관서에 의해 긴요한 것만 이루어졌을 뿐, 지방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점차 세태가 안정되자 지방에서는 책의 요구가 급증했으며, 이때부터 지방의 방각본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현재까지 알려진 초기의 지방 방각본으로는 호남지방의 완판(完板) · 태인판(泰仁板) 및 금성판(錦城板) 등이 있다. 서울지방에서 새겨낸 경판(京板)은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안성판(安城板)은 간행연대를 알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한말 이후에는 서점과 서림(書林)이 붙은 서사(書肆)가 등장하였다. 방각본은 그 밖에도 달성 등 여러 곳에서 나왔으나, 그 규모가 별로 크지 않았다.
민간인이 영리를 목적으로 한 책의 인쇄는 목판 이외에 나무와 쇠로 활자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특히, 활자인쇄는 조선 후기에 와서 다양한 종류의 책을 공급함으로써 서민의 독서와 면학의 저변 확대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고 서민층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각종 소설책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방각본은 지방의 일반인과 서민층이 필요로 하는 학습 · 과시 및 일용서인 것이 그 특징이다. 방각본 역시 우리 나라의 인쇄문화사에 있어서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우리 나라 인쇄에 있어서 근대라고 한다면 1880년대 이후를 말한다. 그것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무너지고 신문화개화기라 할 수 있는 1883년에 근대화된 서양식 인쇄기계가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근대 이전에는 영리를 완전히 도외시한 관립인쇄소를 설치, 운영하였으며, 서양보다 200여 년이나 앞서 금속활자를 발명해 사용하였다.
그러나 다른 나라와의 교류가 전혀 없이 나라 안의 기술로만 운영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의 발전 없이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발명국임에도 불구하고 근대 인쇄술은 외국으로부터 도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도 서양으로부터 직접 전해받지 못하고 일본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1590년 발랴나(Valignani,A.)에 의하여 중국과 일본에 근대인쇄술이 전하여졌으나, 200여년 동안 별로 사용되지 못하다가 1807년 마리슨(Marison,R.) 선교사에 의해 중국에서 출판된 『중국어 사전 A Dictionary of the Chinese Language』을 계기로 그 사용이 본격화되었다.
그 뒤 1883년(고종 20) 10월에 박영효(朴泳孝) 등의 건의에 의해 신설된 박문국에 처음으로 근대식 인쇄기계와 인쇄술이 도입되었다. 이곳의 인쇄시설은 수동식 활판기로서, 이것으로 제일 먼저 찍은 것이 『한성순보 漢城旬報』이다. 박문국에 뒤이어 1884년에 광인사인쇄공소(廣印社印刷公所)가 근대식 인쇄기계와 연활자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곳은 본래 목활자 인쇄를 해오던 최초의 민간출판사로서 자가인쇄시설을 보유함은 물론, 처음으로 한글연활자도 갖추고 있어 『충효경집 忠孝經集』 · 『농정신편 農政新編』 등 많은 책을 간행하였다. 이 인쇄소가 남긴 문화사적인 의의는 최초로 국한문 혼용의 서적을 인쇄하기 시작한 데에 있다.
광인사에 이어 1885년에는 아펜젤러(Appenzeller,H.G.) 선교사에 의하여 배재학당이 세워지고, 1886년에는 학당 안에 인쇄부도 설치되었다. 근대 인쇄는 일제의 암흑시대, 6·25전쟁의 참화를 겪으면서도 꾸준히 발전하여 우리 나라는 최신시설 및 높은 기술을 쌓아 오고 있다.
근대 인쇄에 있어서 그 종류와 특징을 크게 나누면, 판의 모양에 따라 볼록판 · 평판 · 오목판 등 세 가지 형식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그 밖에 공판(孔版) · 콜로타이프(collotype, Albert-type) · 복사(複寫) · 컴퓨터식자시스템(computerized typesetting system) 등이 사용되고 있다.
목판 · 활자판 · 선화판(線畫版) · 사진판 · 고무판 · 감광수지판 등이 있다.
① 활판:볼록판의 대표적인 것으로 요철된 판면의 볼록한 부분에 잉크를 칠하고 그 위에 종이를 놓고 압력을 가하여 인쇄하는 방식으로 인쇄영상이 선명하고 힘있게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② 선화볼록판:백지나 플라스틱 베이스 등에 검은색 화재(畫材)를 사용하여 그림이나 문자를 그린 다음 사진을 찍어 음화필름으로 만들어 감광제가 칠해진 금속판에 필름을 포개어 빛을 쬐고 부식액으로 부식시켜 볼록판으로 만들어 인쇄하는 방법이다.
③ 사진판:인화지로 된 사진을 원고로 하여 제판용(製版用) 카메라로 스크린을 이용한 촬영에 의해 망네거티브필름으로 만든 뒤 선화볼록판 제작과 같은 방법으로 판을 만든다. 이 사진판은 아주 작은 망점(網點)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이는 1인치 사이의 망점의 수가 많을수록 영상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오프셋인쇄라 하는데, 이는 잉크가 묻는 부분과 묻지 않는 부분이 같은 평면상에 있는 데서 나온 말이다.
평판은 물과 기름이 서로 반발하는 성질을 이용한 것으로, 잉크가 묻는 화선부(畫線部)에는 친유성층을 만들고 비화선부에는 친수성층을 만들어 물을 칠해 주면서 유성의 잉크를 판 전면에 묻히면, 수분이 있는 면에는 잉크가 묻지 않으나 친유성으로 처리된 면에는 잉크가 묻게 되는 원리를 이용한 방법이다. 석판과 금속평판으로 나누는데, 여기에 사용되는 잉크는 물에 녹지 않는 유성잉크라야 한다.
① 석판:평판인쇄술의 가장 초기 형태로서 석회석 위에서 물과 기름이 혼합되지 않는 원리를 이용하여 판판한 돌의 표면 위에 비누와 지방을 섞은 재료로 글자와 그림 따위를 제판하여 찍어내는 방법이다.
이것을 영인(影印)이라고도 하는데, 원본을 사진이나 기타 과학적 방법으로 복제하는 것으로 가장 정밀한 인쇄방식은 콜로타이프인쇄이다. 이것은 두꺼운 유리판 표면에 젤라틴을 칠하고 그 위에 감광제를 섞은 젤라틴을 칠하여 말리면 미세한 물결무늬가 판면에 생긴다.
사진네거티브막(膜)을 벗겨 이에 겹쳐 빛을 쬐면 빛의 강약에 따라 젤라틴의 막면이 굳어진다. 이 유리판을 물에 담가 글리세린 따위의 약물로 처리한 뒤 유성잉크로 인쇄한다. 이것은 망점이 없는 것이 특색이며, 내쇄력(耐刷力)이 극히 적어 500부 이상의 인쇄에는 곤란하나 제판비가 적게 들어 적은 부수의 졸업앨범이나 회화의 복사 등에 적합하다.
② 금속평판:묘판(描版) · 전사판(轉寫版) · 난백판(卵白版) · 평요판(平凹版) · 다층판(多層版) · PS판(版) 등이 있다. 묘판은 원고의 형태를 황산지에 본을 뜬 뒤 비누성분으로 된 기름먹으로 그린 화선 부분을 친유성으로 처리하여 인쇄판을 만드는 방법이다. 현재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전사판은 묘판에 의하여 제판된 것을 전사지에 인쇄하는 방법으로, 한장의 원판으로부터 여러 개의 같은 판을 큰 인쇄판에 식판(植版)시켜 제판하는 방법이다. 역시 오늘날에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난백판은 문자나 사진 등의 원고를 제판카메라로 촬영하여 네거필름으로 만든 뒤 난백을 이용한 감광제를 바른 금속판에 밀착시켜 빛을 쬐어 제판하는 방법이다.
평요판은 인쇄판의 내쇄력을 강하게 하기 위하여 화선부를 오목하게 처리하는 방법이나, 실제로는 평판과 같다. 이것은 비교적 인쇄화면이 선명하고 많은 부수를 인쇄할 수 있어 널리 이용되고 있다.
다층판은 종류가 다른 금속을 2층 ·3층으로 만든 판으로, 다른 인쇄판에 비하여 10배 이상의 내쇄력이 있다. 판의 구조는 화선부에 친유성의 금속(구리)이 나오게 하고, 비화선부에는 친수성의 금속(연마된 크롬)이 나오도록 만들어져 있다.
PS판은 얇은 알루미늄판에 디아조계 감광액을 미리 칠해 놓은 판으로 공급하기 때문에 PS(pre-sensitized)라는 약자를 사용하였다. 이 종류는 포지티브형과 네거티브형의 두 가지가 있으며, 비교적 온도 · 습도의 영향을 받지 않아 장기간의 보존이 가능하며 제판 과정이 간단하여 널리 이용되고 있다.
볼록판인쇄와 반대로 잉크가 묻어야 할 부분이 오목하게 들어가 있어 그 깊이에 따라 인쇄된 잉크의 농담이 다르게 된다. 이는 화선부에만 잉크가 남도록 한 뒤 피인쇄물(종이)에 압력을 주어 잉크가 옮겨 오도록 하는 인쇄방식으로, 조각오목판과 사진오목판이 있다.
① 조각오목판:동판(銅版)의 표면을 잘 연마하여 특수한 왁스를 바른 뒤 유연(油煙)을 묻힌 다음 바늘로 원고와 반대 방향으로 그림을 그린 후에 그 부분의 왁스를 긁어내고 부식시켜 오목하게 한 다음에 조각도로 깊게 조각하여 사용하는데, 이것은 주로 지폐 · 우표 · 증권 등을 인쇄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② 사진오목판:사진제판에서 사용하는 스크린을 이용하여 제판하는 방법으로 그래뷰어(gravure)인쇄라고도 한다. 조각오목판과 사진오목판의 차이는 판의 화상이 망점으로 되어 있느냐 아니냐에 있다. 이것은 중후한 아름다움을 지니는 점에서는 근대 인쇄의 3판식 가운데 가장 우수하나, 평판인쇄에 비하여 사용할 수 있는 종이의 범위가 좁은 것이 결점이다.
그리고 이 방식은 두루마리식 윤전기를 사용하므로 고속으로 다색 양면인쇄를 할 수 있다. 구미지역에서는 많이 사용하고 있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포장인쇄와 건축자재용 인쇄 등에 주로 이용되고 있다.
형지(型紙)에다 타자기나 철필로 글자나 그림을 찍거나 써서 만든 판을 인쇄틀에 끼운 뒤 그 위에 잉크를 묻힌 롤러(roller)를 사용하여 판 아래 놓인 종이 · 베 · 플라스틱 등의 표면에 인쇄하는 방법으로, 등사판 · 실크스크린법, 타자기에 의한 활자공판이나 사진공판이 있다. 이는 가장 간편하게 인쇄할 수 있는 방법이다. 위의 인쇄방법 외에도 최근에는 복사(duplicator) 또는 컴퓨터식자시스템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문서나 도면을 간단하고 신속하게 여러 장을 복제하는 방법이다. 복사하는 방법에 따라 분류되나 빛의 파장(자외선 · 가시광선 · 적외선)에 의한 분류, 할로겐화(할로겐과 은의 화합물)의 이용법에 의한 분류, 피복사물에 의한 분류법이 있다.
① 디아조식복사:감광제와 발색제의 혼합용액을 도포한 감광지에 원고를 겹쳐서 투과노광(透過露光)하면 원고의 화상(畫像) 부분은 빛이 투과하지 않으므로 그대로 잠상(潛像:사진에서 노출 후 아직 현상하지 않은 감광막 가운데 있는 피사체의 象)으로 남아 있게 되는 방법이다.
② 사진복사:확산전사법(擴散轉寫法) · 스태빌라이즈법 · 다이트랜스퍼법(젤라틴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는 할로겐화은의 이용에 의한 방법이다.
③ 정전식(靜電式) 복사:반도체를 빛에 쬐면 전기저항이 감소하는 광도전성(光導電性)의 성질과 정전기를 응용하여 복사하는 방법이다.
④ 감열식(感熱式) 복사:열을 가하면 발색하는 왁스상태인 제2철의 화합물 및 페놀화합물을 가공한 감열지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인쇄에 있어서 문선 · 식자 · 교정 · 조판의 작업을 컴퓨터에 의하여 처리하는 방법으로 1960년대에 실용화되었다. 이것의 대상은 도서 · 신문 · 잡지류부터 각종 사전 · 명부 등 다양하다.
이 방식은 인쇄공장에서 수많은 활자재고와 핫메탈(hot metal)을 불필요하게 하고 편집상으로도 종래의 입고(入稿)→편집→문선의 공정에서 입고→편집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더욱이 전시장치를 이용한 회화형(繪畫型) 편집을 함으로써 조판이 간편해지고 제작기간도 단축되었다. 또한, 색인의 자동편집이 가능하고 개정할 경우 개정자료만 입력하면 되는 장점이 있다.
종이 이외의 물질인 유리 · 플라스틱 · 금속 · 은박지 · 옷감 · 비닐 · 목재 · 도자기 등 모든 재료에 위에서 열거한 여러 가지 방법에 의해 인쇄하는 것이다. 그 범위는 점차 확대되어 가고 있으며, 인쇄와 관련된 산업도 함께 발전되어 갈 것으로 기대된다.
우리 나라의 인쇄사업소는 1998년 말을 기준으로 문화관광부에 인쇄소 등록을 한 수가 5,185개 사이며, 국내의 시설로는 활판인쇄기 총보유대수가 420대로 매년 급감하는 추세로 자취를 감추게 될 전망이며, 평판인쇄기는 4,987대가 가동되고 있어 우리 나라 인쇄시설의 주종이 되고 있다.
그래뷰어인쇄 · 전산폼인쇄 · 카본인쇄 · 씨링기 등 특수인쇄기는 1,091대가 운용되고 있다. 전산화의 발전으로 전산 입출력기가 대폭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입력기는 1990년 1,517대에 불과하였으나 1998년에 4,698대로 증가하였고, 출력기는 1990년에 15대였으나 1998년 1,225대로 증가하였다. 색분해기도 1990년에 63대였으나 1998년에 205대로 증가하였다.
이와 같은 인쇄 · 기술의 급속한 발달과 시설의 현대화 추세에 따라 고급인쇄기술의 인력이 요구되고 있으며, 이에 의하여 5개의 직업전문학교, 5개 공업계 고등학교, 5개 전문대학, 2개 종합대학, 1개의 대학원 과정에 인쇄과 또는 인쇄 관련학과가 설치되어 있다. 이 밖에도 직업훈련원에서 인쇄기능공 양성을 위한 1년 과정의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우리 나라의 근대인쇄는 1883년 서양의 인쇄기술이 들어온 이래 계속적인 발전을 거듭하면서 오늘날에는 컴퓨터식자시스템에 의한 인쇄술까지 도입하여 사용하고 있으며, 많은 양의 인쇄물을 수출하고 있다.
1998년 말 기준으로 우리 나라는 연간 인쇄물 총액 1억6천만 달러에 해당하는 물량을 수출하였는데, 주요 수출국은 미국 · 일본 · 오스트레일리아 · 프랑스 · 독일 · 영국 · 중국 · 이집트 · 필리핀 · 브라질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