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홍 ()

전해산
전해산
근대사
인물
대한제국기 고막병참전투에 참전한 의병장.
이칭
수용(垂鏞)
해산(海山)
이칭
종기(鍾棄), 전해산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79년(고종 16)
사망 연도
1910년(순종 3)
본관
천안(天安)
출생지
전라북도 임실
정의
대한제국기 고막병참전투에 참전한 의병장.
개설

초명은 전종엽(全鍾燁). 본관은 천안(天安). 자는 수용(垂鏞), 호는 해산(海山). 전라북도 임실 출신. 아버지는 전병국(全炳國)이며, 어머니는 경주김씨이다. 9세에 이한룡(李漢龍)의 문하에 입문해 24세까지 수학하였다. 특히 『춘추좌씨전』에 심취, 정치에 관심과 안목을 갖게 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07년 한일신협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한국군이 강제해산되자, 그 해 겨울 임실의 이석용(李錫庸)을 찾아가 기병하였다. 이 때 호남 일대에서 제일 먼저 의거를 일으킨 고광순(高光洵)과 기삼연(奇參衍)이 붙잡히자, 기삼연의 부하 김준(金準)이 의병을 재수습해 장성(長城) 일대를 중심으로 전세를 떨치고 있었다.

이에 이석용에게 김준의 의병들과 연합전선을 전개할 것을 제안, 이들은 남진하고 이석용의 의병들은 북진해 장성에서 합류하기로 하였다. 그즈음 부하를 거느리고 남하한 정원집(鄭元執)에 의해 7월 25일 대동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의진은 선봉장 정원집, 중군장 김원범(金元範), 후군장 윤동수(尹東秀), 호군장 박영근(朴永根), 도포장 이범진(李凡振) 등으로 구성되었다. 의병은 불갑산(佛甲山)으로 진군해 약간의 적을 포살하고, 27일에 나주 석문동(石門洞)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이어서 10월 16일의 대명동(大明洞), 10월 24일 대치(大峙), 11월의 고막병참(古幕兵站) 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명성을 듣고 입대하는 의병의 수도 날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1909년에 이르러 일제가 ‘의병대토벌전’을 강력하게 추진하자, 1월 17일 일시 고향으로 돌아가 마지막 인사를 고하고, 고향 일대에 「본고을 반당(反黨)에게 보내는 격문」을 띄웠다.

그리고 2월 22일 의병들을 거느리고 화산(化山)을 거쳐 궁관산(宮冠山)으로 행군해 3월 27일 영광 오동치(梧桐峙)에 이르자 적에게 포위되어 접전하였다. 그러나 형세가 불리해 많은 사상자를 낸 끝에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탈출해 의병들은 일시 해산하였다.

그 뒤 장수 고래산(古萊山)의 서당에서 훈장을 하면서 지내던 중 조두환(曺斗煥)·이경오(李景五)의 밀고와 김현규(金顯圭) 인솔로 붙잡혀 영산포 일본헌병대로 압송되었다. 광주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1910년 5월 대구형무소로 이송되어, 7월 18일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저서로는 『전해산진중일기(全海山陣中日記)』 5책이 있으며, 그 중 2책이 전해지고 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전해산진중일기(全海山陣中日記)』
『해산창의록(海山倡義錄)』
『전수용전(全垂鏞傳)』
『성재기선생거의록(省齋奇先生擧義錄)』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항일의병장열전』(김의환, 정음사, 1975)
『기려수필』(송상도, 탐구당, 1974)
『독립운동사』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해산전수용의 항일투쟁」(강길원, 『역사학보』101, 역사학회, 1984)
관련 미디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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