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여숙(余淑), 호는 용서(龍西). 아버지는 참봉 정수인(丁守仁)이다.
10세 때 경전(經典)과 『사기』를 읽고 해석하므로 신동이라 일컬어졌다.
15세 때 아버지를 여의자 문과진출의 뜻을 포기하고, 1588년(선조 21)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이순신(李舜臣) 밑에서 순초장(巡哨將)으로서 전공을 세웠다.
그 뒤 이순신의 건의로 당진현감에 제수되었으나 전투중에 얻은 심한 상처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 원균(元均)이 패하고 나라가 도탄에 빠진 것을 보고 고금도로 이순신을 찾아가서 종군하였다.
그 때 이순신의 뜻을 따라, 순천에 있는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에게 수륙(水陸)이 호응하여 왜교(倭橋)의 고니시(小西行長)를 협공하기로 약속하는 심부름을 맡기도 하였다.
이듬해 마지막 노량해전 때에는 이순신과 함께 출전하였다가 뒤늦게 이순신이 전사한 것을 알고 같이 죽지 못함을 한탄하다가 뒤에 순절하였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고, 병조판서로 추증되었으며, 오충사(五忠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