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래(洪景來)의 난 때의 순절신(殉節臣)이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공면(公勉), 호는 창파(蒼坡). 정구(鄭逑)의 후손이다.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과거에는 응시하지 않았는데, 1811년(순조 11)에 무반(武班)출신인 그의 아들 정시(鄭蓍)가 가산군수에 임명되자 그의 조카 정질(鄭耋)과 함께 따라가 있었다.
이 때 홍경래·김사용(金士用)·우군칙(禹君則) 등 평안도지방의 유랑지식인층이 중심이 되어 가산 다복동(多福洞)을 근거로 반란을 기도하여, 같은 해 12월 18일에 남·북진(南北陣)의 두 갈래로 군대를 나누어 평안도 각 지역을 공격하였다.
홍경래가 이끈 남진군은 이날 밤 3경에 곧장 가산군 군아(郡衙)를 습격하였다. 난군의 침입이 있자 아들 시가 피하기를 권하였으나, 그는 “국록을 받는 사람이든 받지 않는 사람이든 마땅히 반란군에 대항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아문(衙門)에 돌입하여오는 적을 군졸로 하여금 막게 하였다.
적에 의하여 군아가 함락되자 난군에 합세하기를 거부하다가 아들과 함께 난군의 선봉장인 홍총각(洪總角)에게 피살되었다. 이 때의 순절로 난이 평정된 뒤 집의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이조참판·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에 가증(加贈)되었다. 가산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