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丁午)는 백련사, 묘련사를 중심으로 활동한 천태종 승려이다. 그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여 구체적인 생애는 알 수 없다. 그는 어릴 때 승과에 응시하여 상상과(上上科)로 합격하였다. 1278년(충렬왕 4)에 용혈암(龍穴庵)에 머물렀고, 1280년에 상주 사불산 동백련사(東白蓮社)로 옮겨 10년 동안 머물렀다. 1290년(충렬왕 16)에 다시 용혈암 서편의 괘탑암(掛塔庵)으로 돌아와 3년을 머무르다가, 다시 용혈암에서 10년 동안 주석(駐錫)하였다.
1302년(충렬왕 28)에 보월산(寶月山) 백운암(白雲庵)으로 옮겼다가, 충렬왕의 초청으로 묘련사(妙蓮社) 3세 주법(主法)이 되었다. 이와 같이 정오는 백련사 관계 사찰에서 24년 동안 머물다가 왕실의 후원을 받게 되면서 묘련사의 주법이 되었고, 이후 고위 승계(僧階)에 오르며 여러 중요 사찰의 주지가 되었다. 1306년(충렬왕 32)에 그는 백월낭공적조무애대선사(白月朗空寂照無㝵大禪師)라는 호를 제수받았다.
다음 해에 심왕(瀋王: 훗날의 충선왕)이 그를 왕사로 책봉하고, 불일보조정혜묘원진감대선사(佛日普照靜慧妙圓眞鑑大禪師)라는 호를 내렸다. 1308년에 충선왕이 즉위하면서 정오는 선교각종산문도반총섭조제(禪敎各宗山門道伴摠攝調題)의 자리를 제수 받았는데, 이로서 그는 선종과 교종 모두를 거느리는 승계, 곧 불교계의 교권을 가지게 된다. 1309년에 충선왕은 정오를 국청사(國淸寺)에 주법하게 하고,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오대사(五臺寺), 수암사(水巖寺), 조연사(槽淵寺), 안락사(安樂寺), 마류사(碼瑠寺) 등 다섯 사찰을 통제하도록 하였다. 또한 이를 계기로 국청사에 금당(金堂)을 새로 짓고, 석가여래상과 좌우 보처(左右補處) 보살상을 봉안하였다. 이어 1315년에는 낙성법회를 열어 천태종 승려 3천여 명을 초청하였다. 이러한 정황은 정오가 당시 불교계에서 지녔던 영향력과 불교 교단에서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한편 정오는 1310년에 밀양 영원사(瀅原寺)로 주법을 옮겼다. 1313년에 충숙왕이 즉위하면서, 정오를 국통(國統)에 책봉하고 대천태종사쌍홍정혜광현원종무애국통(大天台宗師雙弘定慧光顯圓宗無㝵國統)이라는 법호를 제수하였다. 1314년에 정오는 진주목 반성(班城)의 용암사(龍巖寺)를 하산소(下山所)로 삼고 주석하다가 생애를 마친 것으로 보인다. 제자로는 선사 굉지(宏之), 대선사 승숙(承淑), 중덕(中德), 일생(日生) 등이 있었다.
이와 같이 정오는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대에 왕실과 밀착해 불교계의 교권을 장악한 인물이다. 따라서 그의 행적을 통해 원 간섭기 천태종의 동향을 알 수 있다.
한편 정오가 주법을 한 영원사는 본래 선종 소속의 사찰이었으나, 13세기 말에 천태종에 소속되었다가 다시 선종 소속으로 바뀐 기록이 당시 왕사였던 혼구(混丘, 1251~1322)의 비문에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원 간섭기 영원사를 둘러싼 종파 간의 갈등과 세력 다툼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