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례 ()

가족
개념
조상을 숭배하기 위해 행하는 의례.
이칭
이칭
제(祭), 제사, 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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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제례는 조상을 숭배하기 위해 행하는 의례이다. 『예기』에 “제례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라고 했듯이, 제례는 예의 시초이며 발단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유교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는 예의 본질은 의례에 있으며, 그 의례의 핵심은 조상 제례이다. 또한 유교적 이념에 입각할 때 조상 제례는 초월적 신에 대한 종교 행위가 아니라 혈통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는 인격적 존재로서의 조상에 대한 효의 실천 행위이다. 즉 초월적 효험에 바탕한 기복 사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유교가 표방하고 있는 효 사상과 가계 영속 관념에 기인하고 있는 것이다.

정의
조상을 숭배하기 위해 행하는 의례.
연원 및 변천

조상숭배는 고대 중국 종교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였다. 이런 사실은 『시경(詩經)』에 등장하는 의례 대부분의 내용이 조상 제례와 관련되어 있는 점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한편 『주례(周禮)』의 「춘관」에서는 “ 길례(吉禮)를 거행함으로써 국가의 인귀 · 천신 · 지기(地祇)를 섬긴다.”라고 했는데, 길례는 흉례(凶禮) · 빈례(賓禮) · 군례(軍禮) · 가례(嘉禮)와 더불어 국가 오례(五禮) 중 하나로, 제례를 일컫는다. 『예기(禮記)』에 “제례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라고 했듯이, 제례는 예의 시초라 할 수 있다.

중국 고대에 성립한 예제와 예치는 오랜 기간 초월적 통치 이념으로 역사를 지배해 왔는데,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수용했던 조선시대에도 법이나 제도 이전에, 사회 통합의 기본 원리로 예(禮)를 우선시했다. 예의 본질적 의미는 상하 · 귀천 · 존비 · 장유 등을 구분하는 것에 있으며, 이들 구별이 명확해지면 각각을 공경하게 되고 조화로움을 달성할 수 있다는 이치이다. 구체적으로는 군신 · 부자 · 형제 · 남녀의 구분이 있은 후에 비로소 공경이 뒤따르며, 이러한 구분적 질서가 조화를 이루면 천하가 태평해진다는 내용이다. 이런 이유로 중국 고대사회에서는 예치를 정치의 근본으로 삼고 있었다. 물론 춘추전국시기에는 예치와 법치가 상호 대립한 적도 있었으나, 유학이 본격적으로 대두하면서 예치의 사상은 절대적 통치 수단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러한 예의 실천적 행위가 바로 제례이다.

제사는 대상에 따라 명칭을 달리한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따르면 천신에게 지내는 제사는 사(祀), 지기(地祇)에게 지내는 제사는 제(祭), 인귀에게 지내는 제사는 향(享), 문선왕 공자에게 지내는 제사는 석전(釋奠)이라고 한다. 즉 천신과 지기에 대한 제사의 경우 하늘을 향해서는 원구단을 조성하여 제사를 지냈으며, 땅과 곡식신에게는 사직단, 농사신에게는 선농단, 누에신에게는 선잠단 등을 마련하여 제사를 올렸다. 그러다가 후대에 이르러 왕실의 조상신을 모시는 종묘, 공자를 모시는 문묘, 관우를 모시는 관왕묘, 각 집안의 조상을 모시는 가묘 등을 중심으로 사회적으로 존망받는 성현과 자신들의 혈통적 정체성을 나타내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제사를 둘러싼 이런 분류는 『국조오례의』와 『대한예전(大韓禮典)』 등에도 이어지는데, 오늘날에는 이를 통칭하여 제사라고 한다. 『예기』를 보면 천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제후는 땅과 산천에 제사를 지낸다고 했다. 이에 근거하여 왕은 천신 제례를 직접 주관했으며, 그 외의 제례는 왕을 대신해서 관리나 지방의 수령이 거행했다.

한편 고려의 『고금상정례』, 조선의 『국조오례의』, 대한제국의 『대한예전』 등에는 제사의 중요도에 따라 대사(大祀) · 중사(中祀) · 소사(小祀)로 분류하여 제사의 규모 등을 정했으며, 또 국가 정책이나 이념에서 벗어난 제사는 잡사(雜祀)나 음사(陰祀)로 규정했다. 그외 선농단 · 선잠단 · 성황단 등의 제단과 역대 군왕을 모신 사당, 중국의 관우를 모신 관왕묘 등의 사당을 비롯하여 명산대천 등에 대한 제사가 있는데, 이들 모두 국가에서 관리하면서 제수 비용 등을 지원했다. 지방의 제단과 묘는 지방 수령이 관할하는데, 경우에 따라 왕이 치제문과 제수를 내리기도 했다.

『시경(詩經)』과 『상서((尙書)』 등의 중국 고전을 보면, 예는 초자연적 보호와 은총을 얻기 위한 조상 숭배 혹은 다산 숭배와 관련된 제사 의례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예는 시행한다는 이(履)다. 그러므로 신을 섬겨 복이 이르도록 하는 것이다. 시(示)를 따르고 풍(豊)을 따른다(禮, 履也. 所以事神致福也, 從示從豊).”라는 내용이 나타난다. 아울러 “풍은 예를 행하는 기물이다(豊, 行禮之器也).”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사실 ‘풍(豊)’은 ‘풍(豐)’과 동일한 것으로, 고기를 담는 제기인 ‘두(豆)’ 위에 제물이 놓여 있는 형상을 뜻한다. 이처럼 예의 시발점은 신령에게 제물을 바치는 행위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예는 귀신을 받드는 것에서 사람을 섬기는 영역으로 확대되는데, 이로써 제례의 주된 대상은 천지와 조상이 된다. 즉 제천(祭天) · 제사직(祭社稷) · 제산천임택(祭山川林宅) 등의 제례 행위는 상고시대의 자연숭배에서 비롯되었으며,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표현하고 있다. 반면 인륜 관계에 바탕한 조상 제례는 원시시대의 ‘가례(家禮)’의 차원에서 시작되었다. 그런 다음 종법제를 채택한 국가가 수립되고 나서 세습 왕조에 대한 조상 제례는 국례(國禮)로 전환되었는데, 가례에 비해 국례가 포괄하는 범위가 훨씬 넓었다. 가례의 경우 조상 제례를 비롯하여 빈객(賓客) · 혼례(婚禮) · 관례(冠禮) · 상장례(喪葬禮)를 포함하고 있는 반면에 국례는 가례에 속하는 모든 의례는 물론이고 제후의 조회(朝會), 군대의 사열(査閱), 수렵과 친경(親耕) 등을 포함하고 있다. 결국 이로 볼 때 유교의 요체를 이루는 예의 본질은 의례에 있으며, 그 의례의 핵심은 조상 제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조상 제례의 출발점은 자연적이고 생물학적 혈통 관계인 ‘조상-후손[父母-子]’을 기반으로 삼고 있는데, 이는 곧 가례의 기본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제례」편에는 총 6종류의 제례가 소개되어 있다. 사계절의 가운데 달(음력 2·5·8·11월)에 지내는 사시제(四時祭), 시조에 대한 초조제(初祖祭), 시조 및 고조 이하를 위한 선조제(先祖祭), 아버지에게 올리는 녜제(禰祭), 기일에 지내는 기일제(忌日祭), 묘소에서 행하는 묘제(墓祭)가 그것이다. 『사례편람(四禮便覽)』에는 사시제, 녜제, 기제, 묘제 등과 같이 초조제와 선조제가 누락된 채 4종류로 제시되어 있으며, 이중 오늘날 전승되고 있는 것은 기제와 묘제이다.

사시제는 4계절의 중월(仲月)에 해당하는 음력 2, 5, 8, 11월에 사당에 모신 고조부모 이하의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로, 고대 중국에서 정제(正祭)라고 해서 매우 중시되었다. 마치 국가의 종묘에서 춘하추동 사계절마다 대향(大饗)을 올리듯이 모든 제사의 으뜸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우리나라로 건너와서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으며, 마침내 묘제와 혼용되기에 이르렀다. 일설에 따르면, 조선 중기 이후 기제를 중시하는 경향이 강해짐에 따라 시제에 대한 중요성이 퇴색되었으며, 아울러 4대 조상들의 기제와 더불어 연 4차례에 달하는 시제를 거행하는 것이 적지 않은 부담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성호(星湖) 이익(李瀷)과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등도 봄가을의 시제만을 지내도록 권고했는데, 실제로 1년에 한 번 행하는 집도 많았다고 한다. 현재 사시제의 습속은 사라졌으나 명칭은 시제(時祭), 시사(時祀), 묘제(墓祭), 묘사(墓祀) 등의 형태로 남아 있다. 그런데 사실, 시제는 사시제(四時祭)로 불리면서 사계절의 달에 고조부모 이하의 조상을 대상으로 신주가 모셔진 사당에서 지내던 제례였다. 반면 묘제는 매년 3월 상순 묘소에서 거행하는 것으로 시제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것이다. 따라서 『가례』에서의 시제는 사시제를 말하는 것으로, 묘제와 시제는 다르다고 하겠다.

초조제는 가문의 시조에게 지내는 제사이다. 시조를 잇는 대종손이 제주가 되어 동지에 지낸다. 동지는 일양(日陽)이 생(生)하는 날로, 시조는 가문을 있게 한 시초이기 때문에 양기가 처음으로 생겨나는 시절에 제사를 올리는 것이다.

선조제는 사당에 모시지 않는 초대 선조 이하 고조 이상의 조상에 대해 지내는 제사이다. 만물이 생명을 움트기 시작하는 입춘에 지내는데, 선조의 형상이 만물이 소생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녜제는 죽은 부모에게 지내는 제사로 만물이 성숙하기 시작하는 계절인 음력 9월 계추(季秋)에 지낸다. 녜(禰)는 가깝다(邇)는 뜻이다. 부모는 조상 중에서 자기와 가장 가깝고 자기 신체를 만들고 완성시켜 주셨으므로 이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녜제를 지내는 것이다.

기일제는 조상이 돌아가신 날, 곧 기일에 지내는 제사이다. 원래 고대 중국에는 기일제가 없었으나 송대 이후에 정착된 것으로 전하며,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유교의 효사상과 결합되어 기일제를 각별히 중시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묘제는 1년에 한 번 조상의 묘소에서 지내는 제사이다. 『가례』에서는 음력 3월 상순에 지낸다고 되어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음력 10월에 5대조 이상의 조상에게 지내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다.

그 외 명절[節氣]에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를 차례(茶禮)라고 하는데, 이는 『가례』의 「사당」편에 “설날 및 동지에 술과 과일을 올려 참례한다.” 및 “세속 명절에는 계절 음식을 올린다.”라는 지침에 근거하여 오늘날의 차례 습속으로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절차와 의미

제(祭)라는 용어에는 ‘사람과 신이 서로 접한다.’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으며, 조상 제례는 그야말로 조상과 자손들이 소통을 하는 장(場)이자 시간이다. 이는 또한 조상의 혼령을 일상과의 단절된 존재가 아니라 연속적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기도 한데, 이런 경향은 제례의 절차를 통해서 확인된다.

우선 조상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재계(齋戒)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에 대해 『예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군자가 재계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순수하고 밝은 덕으로 제사를 지내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산만해진 마음을 정돈하는 산재(散齋)를 7일간 수행함으로써 마음을 안정시키며, 그 마음을 잘 유지하기 위한 치재(致齋)를 3일간 실행하여 그것으로써 마음을 정리하는 것이다. 재계란 몸과 마음이 순수하고 밝은 상태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러한 상태가 된 후에야 비로소 신명(神明)을 맞이할 수 있다.

이처럼 일상의 흐트러진 마음을 안정시키고 이를 잘 가다듬고 정리함으로써 이른바 오염의 상태에서 정화의 상태로 돌입하게 되는데, 이로써 조상의 모습을 비로소 느낄 수 있게 된다고 간주했다.

재계하는 동안에는 항상 제사의 대상이 되는 조상이 생전에 기거하던 모습을 생각하고, 웃으면서 이야기하던 모습을 생각하고, 그 뜻하던 바를 생각하고, 그 즐거워하던 바를 생각하고 취미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재계한 지 사흘이 지나면 그분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것이다. 제사 지내는 날 방 안에 들어가면 그분의 혼령이 반드시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며, 제사를 마치고 문을 나갈 때는 숙연해져서 그분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이 느껴지며, 문밖에 나가서 들으면 방 안에서 뚜렷하게 그분의 탄식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므로 제사에 있어서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면 부모의 혼령이 눈앞에 존재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면 부모의 혼령이 나타나는 것이다.

내용을 보듯이 조상의 혼령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청정한 마음과 몸을 갖출 필요가 있으며, 재계를 통해 그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원리이다. 이처럼 재계의 수행은 신과 교감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정화시키는 절차로, 여타 종교에서도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의례의 신성화(celestialization)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유교식 제사 역시 마찬가지로, 재계를 통해 몸과 마음이 정화되면 조상을 모실 자격을 갖추었다고 간주한다. 그런 다음 사당에서 신주를 모셔와 교의에 좌정시키면 제관들이 절을 올리고 혈통 집단의 적장자인 초헌관이 조상신을 불러들인다. 이때 하늘에 계신 혼을 불러 내리기 위해 향을 불살라 연기를 올려 보내고 술을 따라 모사 그릇에 3번 나누어 붓는다. 『예기』에 “사람이 죽으면 혼기(魂氣)는 하늘로 돌아가고 형백(形魄)은 땅으로 돌아간다. 이런 이유로 제사를 지낼 때 음지와 양천에서 신령을 찾는 것이다. 은나라 사람들은 양인 하늘에서 신령을 먼저 찾았고, 주나라 사람들은 음인 땅을 향해 신령을 찾았다.”라고 했듯이, 향을 불사르면서 하늘로부터 혼(魂)을 불러내리고 술을 따름으로써 땅 밑으로부터 백(魄)을 불러올리는 것이다.

강신례를 마치면 조상신이 오신 것으로 간주하여 조상을 대접하는 삼헌례를 행하게 된다. 가장 먼저 초헌관이 술을 올리는데, 이때 축관이 축문을 읽는다. 축문의 마지막에는 상향(尙饗), 곧 조상이 마음껏 흠향하시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말로 마무리된다. 흠향이란 조상이 음식을 드시는 행위를 일컫는데, 제례에서 가장 중시하는 절차이다. 비록 혼령을 육안으로 확인하지는 못하지만 음식을 드신다는 믿음 아래 제물을 올린다. 아울러 “죽은 사람에게 등 돌리지 않는다.”라는 언설은 현세에서 주고받았던 소통을 단절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즉 생전에 행해 왔던 모든 소통을 죽음으로 인해 차단시키는 이른바 ‘등을 돌리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제사상에 살아 있는 사람인 시동(尸童)을 앉혀 두고 흠향 과정을 직접 확인했다. 이처럼 시동은 조상을 대신하여 자손들이 차려 주는 음식을 먹는 역할을 담당했는데, 제사에서 조상의 흠향을 시각적으로 연출하기 위해 살아 있는 인간인 시동을 앉혀 두었던 것이다. 『시경』에도 시동이 흠향을 하는 장면이 나타나는데 흠향을 마치고 나서 자손들의 정성에 답하여 축복을 내려주기도 한다. 이러한 축복의 말을 하사(嘏辭)라고 한다. “시동은 신상(神像)이고, 축(祝)은 신의 명(命)을 전하는 자”라고 했듯이 시동이 먹고 마시는 행위는 신의 흠향이었고, 시동의 말은 신이 내리는 축복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조상 제례에서 흠향을 중시하는 까닭은 흠향 자체보다 응감(應感)을 위해서이다. 흠향은 조상이 제사 음식을 드시는 것이고, 응감은 후손들의 정성을 마음으로 느끼는 것인데, 이로써 조상과 후손의 기(氣)는 서로 교감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축문을 낭독함으로써 조상을 향한 흠향 기원이 충분히 전달되었다고 간주하면 아헌관과 종헌관이 차례로 술을 올리고 마지막으로 초헌관이 첨작 절차를 수행한다. 그런 다음 삽시정저와 합문, 계문을 거행하고 국을 내리고 숭늉을 올리는 것으로 조상의 흠향 과정은 마무리된다. 그리고 숭늉 그릇에 걸쳐두었던 숟가락과 제물에 올려두었던 젓가락을 거두어 시접에 가지런히 정돈하고, 밥그릇 뚜껑을 닫는다. 이로써 흠향을 마친 조상이 되돌아가야 하므로 제관 일동이 마지막 인사를 올리고 신주를 사당으로 모시고 간다. 그런 다음 분축례가 수행되는데, 이때 축문을 불살라 연기를 하늘로 올려보내고 재는 땅을 의미하는 향로의 재 속에 묻는다. 이 절차를 통해 혼은 하늘로 가고 백은 땅 밑으로 되돌아갔다고 믿는다.

마지막으로 제사상에 올린 음식을 먹으면 복(福)을 내려받는다는 인식 아래 음복례의 절차를 행한다. 음복의 또 다른 명칭인 준(餕)은 ‘먹다 남긴 음식’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음복례는 조상신이 남기고 드신 음식을 후손이 먹음으로써 그 복덕(福德)을 내려받는다는 의미에서 거행된다. 그런데 사실, 신령이 남긴 음식이기에 복덕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신령이 응감하여 그 기가 담긴 음식이기 때문에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즉 조상이 제사 음식을 기쁘게 흠향하면 후손들의 정성에 응감하게 되는데, 이때 조상의 기가 제물에 전달되어 복덕이 담긴 유의미한 것으로 전환된다는 이치이다.

의의 및 평가

유교적 이념에 입각할 때 조상 제례는 초월적 신에 대한 종교 행위가 아니라 혈통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는 인격적 존재로서의 조상에 대한 효를 실천하는 행위이다. 즉 유교에서는 죽음을 초월하여 이루어지는 만남과 소통을 중시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망자를 일상과 단절된 존재로 인식하지 않고 연속성을 갖는 존재로 간주하여 여러 형태의 소통을 시도해 왔는데, 이러한 일련의 행위는 유교의 생사혼적 관념에 따른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이런 경향은 혼령을 추모하거나 혹은 초월적 효험에 바탕한 기복 사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유교가 표방하고 있는 효 사상과 가계 영속 관념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원전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예기(禮記)』
『주자가례(朱子家禮)』

단행본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의 제사』(국립민속박물관, 2003)
한국국학진흥원, 『제사와 제례문화』(한국국학진흥원, 2005)
금장태, 『귀신과 제사』(제이앤씨, 2009)
김미영, 『유교의례의 전통과 상징』(민속원, 2010)
김미영, 『유교공동체와 의례문화』(민속원. 2018)

논문

금장태·이용주, 「고대 유교의 예론과 국가 제사」(『동아문화』 38집, 서울대 동아문화연구소, 2000)
김미영, 「조상제례의 규범성과 실제성」(『역사민속학』 제51호, 한국역사민속학회, 2016)
도민재, 「유교 제례의 구조와 의미-기제를 중심으로」(『동양철학연구』 42집, 동양철학연구회, 2005)
관련 미디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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