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 2권 1책. 『제왕운기』는 1287년(충렬왕 13)에 출간되었고, 1360년(공민왕 9)과 1413년(태종 13)에 각각 중간되었다.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중요한 판본은 다음과 같다.
① 보물, 1965년 지정: 목판본. 상·하 2권 1책. 규격은 세로 29㎝, 가로 18㎝이며, 8행 16자씩 판각되었다. 1965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자양(字樣)이나 판식(版式) 등으로 보아 여말선초의 것으로 보이며, 현존한 것 중에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에 저자가 왕에게 올리는 「진제왕운기(進帝王韻紀)」가 있고, 책 끝에 정소(鄭玿)의 발문이 있으며 또 후기가 있는데 이 부분은 떨어져나갔다. 서울의 곽영대(郭英大)가 소장하고 있다.
② 보물, 1986년 지정: 목판본. 2권 1책. 인쇄상태로 보아 여말선초에 인출한 듯하다. 권수에 1287년에 쓴 이승휴의 인표(引表)가 있고, 권미에 정소의 발문, 이원(李源)·안극인(安克仁) 등의 후제(後題)가 있고 맨 끝에 간기(刊記)가 있다.
1965년 보물로 지정된 곽영대 소장본은 후제와 간기가 떨어져나가 확실한 간행연대를 알 수 없었는데, 이 책은 상권 제18장과 하권 제6·7·8·16장이 떨어져나가 필사로 채우고 있기는 하지만 발문·후제·간기 등이 모두 갖추어져 있어 인쇄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형태 서지면에서 볼 때 곽영대 소장본과 동시에 인출된 것으로 보인다.
③ 보물, 1991년 지정: 목판본. 2권 1책. 고려 말·조선 초에 간행된 듯하다. 고려 말에 판각된 『제왕운기』는 1965년 보물로 이미 지정된 바가 있거니와, 이 책은 권수 1장, 하권 여섯 째 장이 떨어져나갔다.
또 하권 여덟 째 장은 다른 판의 각자가 보입(補入)된 것이기는 하나, 여말선초의 간본으로 이미 발견된 것과 대비할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서지학·역사학·한문학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 삼성출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승휴는 『제왕운기』의 저술 동기를 고려, 즉 당대의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본조군왕세계연대」의 말미에서 밝히고 있다. 그의 생존기간은 무신의 난과 30여 년간에 걸친 몽고와의 항쟁으로 왕권이 약화되어가고 있었고, 정치기강마저 해이해지던 때였다.
그리고 몽고와의 강화로 인해 고려가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전락되면서 자주국으로서의 존립마저 위태로운 상태였고, 원나라의 세력에 편승한 부원세력가의 반사회적인 책동에 의하여 국내외의 혼란이 더욱 가중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신진사인(新進士人)으로 등제해 직간과 파직으로 연속된 정치활동을 하였다. 『제왕운기』도 1280년 충렬왕의 실정과 부원세력가들을 비판한 10여 건의 폐단을 상소했다가 미움을 사 파직되어 은둔한 시기에 제작되었다.
그러한 점에서 이 역사시는 당시의 대내외적인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출발해 그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포원(布願)을 노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국내적으로는 왕권의 강화를 통한 국가질서의 회복을 기원하고 있었으므로 실정한 군주, 왕권에 도전한 신하를 드러내어 폄론하고, 군신이 각각 갖추어야 할 유교적 정치이념을 제시하고 있다. 즉, 『제왕운기』는 난세에 정치·사회 윤리의 재확립을 목표로 한 것이며, 그 가치기준을 역사에서 제시하려는 의도에서 저술된 것이다.
한편 그것은 원나라에 대한 저항의식의 소산이었다. 당시 현실의 모순은 궁극적으로는 원나라의 침략과 정치적 간섭에서 기인하는 것이었음을 그는 누구보다도 명확히 판단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의 정치적·군사적 열세로 인해 원나라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은 불가능하였다.
더구나 그는 두 차례에 걸친 원사행(元使行)을 통해 당시 동아시아 전역에 걸쳐 대제국을 형성해가고 있던 원나라의 위력을 직접 목도하면서 우리의 문화마저도 그 속에 흡수되어버릴 것 같은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거기에서 자국의 강역과 역사전통에 대한 강렬한 자각의식이 싹터 역사서술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상권에는 서(序)에 이어 중국 역사의 요점을 신화시대부터 삼황오제(三皇五帝), 하(夏)·은(殷)·주(周)의 3대와 진(秦)·한(漢) 등을 거쳐 원(元)의 흥기에 이르기까지 칠언고시 264구로 읊어놓았다.
하권은 우리나라 역사에 관한 내용으로 동국군왕개국연대(東國君王開國年代)와 본조군왕세계연대(本朝君王世系年代)의 2부로 나누었다. 전자에는 서에 이어 지리기(地理紀), 단군의 전조선(前朝鮮), 기자의 후조선(後朝鮮), 위만(衛滿)의 찬탈, 삼한(三韓)을 계승한 신라·고구려·백제의 3국과 후고구려·후백제·발해가 고려로 통일되는 과정까지를 칠언고시 264구 1,460언으로 서영(敍詠)하고 있다. 후자는 고려 태조 세계설화(世系說話)에서 필자 당대인 충렬왕 때까지 오언으로 읊고 있다.
체재상으로 볼 때 오언·칠언의 영사시(詠史詩)이다. 이러한 체는 고려 명종 때 오사문(吳士文)의 「역대가(歷代歌)」가 그 시초이며, 『제왕운기』는 규모가 크고 훨씬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특히, 장체(長體)의 영사시는 가사문학의 원초적 형태로서 고대소설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러한 점에서 『제왕운기』는 같은 시대 이규보(李奎報)의 「동명왕편(東明王篇)」·「역대가」와 함께 장가체의 설화적 가사로 국문학 상의 가치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제왕운기』의 구성은 중국사·한국사를 각 권으로 분리했고, 강역도 요동(遼東)에 따로 천지세계가 있어 중국과 엄연히 구별되는 생활영역임을 밝혔다. 또, 우리 민족은 중국인과 다른 천(天)과 연결되는 단군을 시조로 하는 단일민족임을 나타냈고, 당시까지 민간신앙이나 고기류 등을 통해 전승되어온 단군신화를 한국사체계 속에 편입시킴으로써 우리 역사의 유구성을 과시하였다.
그리고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인정해 고려 태조에 귀순해온 사실을 서술함으로써 발해를 최초로 우리 역사 속에 편입시켰다. 그것은 만주일대까지도 고려의 영역이었음을 역사적으로 고증한 것이며, 영토회복의 의사를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제왕운기』는 중국과 우리 민족과의 지리적·문화적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우리는 중국과 구별되는 독자성·자주성·주체성을 가진 우수한 문화민족임을 국민 각자에게 자각하게 하여 몽고의 정치적 지배에 대항하는 정신적 지주로 삼기 위하여 제작된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동명왕편」과 함께 고려 중기의 대민족서사시라고 불리기도 한다.
몽고의 강대한 외압 때문에 가지게 된 문화적 위기의식과 저항정신은 같은 시기에 일연(一然)이 『삼국유사』를 저술하였던 동기와 같다. 그러므로 양자는 단군을 한국사체계 속에 편입시키는 선구자적인 역사서술을 남기게 된 것이다.
『제왕운기』에서 시작된 단군기원의 역사의식은 고려 말 개혁파 신진사류에게 전승되어 그들이 조선을 개국하였을 때 단군을 국조로서 치제화(致祭化)했고, 『동국통감』을 비롯한 정사에서도 그가 국조임을 밝혀 우리 역사의 첫머리에 기록하게 되었다.
그 뒤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사의 시작을 단군으로부터 출발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므로 몽고간섭 하에서 성장된 민족의식에 짝하여 삼국 이전의 상고사를 한국사에 편입시킨 『제왕운기』의 사학사상의 위치는 매우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