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치극(稚克). 호는 후계(後溪). 동지중추부사 조위(曺偉)의 12세손으로, 아버지는 참봉 조진만(曺鎭萬)이며, 어머니는 진주강씨(晉州姜氏)로 강처중(姜處重)의 딸이다. 큰아버지 조진구(曺鎭九)에게 입양되었으며, 할아버지 조예규(曺禮奎)에게 수학하였다.
1873년(고종 10)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었고, 1882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의 수찬·교리·응교, 사간원헌납, 사헌부지평·장령·집의, 성균관사성, 장악원정, 동학교수(東學敎授), 병조정랑, 통례원(通禮院)의 좌통례·우통례 등을 지냈다.
1890년 통정대부에 올라 돈녕부도정을 거쳐 병조의 참지·참의, 형조참의, 동부승지가 되었다. 외직(外職)으로는 흥양·고령군수, 여산부사(礪山府使), 경상도소모사(慶尙道召募使), 경상도관찰사 등을 역임하면서 향약(鄕約)과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실시하여 풍속을 교화하고 농상(農桑)을 권장하여 치적을 남겼다.
또한, 염찰사 엄세영(嚴世永)의 장계에 따라 임금이 내리는 말을 하사받기도 하였으며, 고을마다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졌다. 만년에는 봉계(鳳溪) 옥호동(玉壺洞)에 퇴거하여 후진배양에 힘썼다. 효성이 지극하고 문장이 뛰어났다. 편서로는 『상례제요(喪禮提要)』가 있고, 저서로는 『후계문집(後溪文集)』 16권 8책이 있다.